AI 디자인 툴이 나를 실직시킬까

AI 디자인 툴이 나를 실직시킬까

AI 디자인 툴이 나를 실직시킬까

오늘 또 봤다. 인스타그램 광고로 뜨는 AI 디자인 툴. “3분 만에 완성하는 브랜드 아이덴티티.” 클릭했다. 둘러봤다. 꽤 괜찮았다.

배가 아팠다.

아침에 본 광고

출근하면서 봤다. AI 로고 생성 툴 광고. 키워드 입력하면 로고 30개가 뚝딱. 컬러 조합도, 폰트 조합도 알아서. 월 구독료 2만원.

우리 회사 한 달 프로젝트 비용이 800만원이다.

광고 댓글을 읽었다. “이거면 디자이너 필요 없는데?” “스타트업한테 완전 좋음.” “이제 에이전시 안 써도 되겠네.”

지하철에서 내렸다. 걸어서 회사까지 10분. 내내 생각했다. 나는 대체될까.

실제로 써봤다

점심 먹고 몰래 써봤다. 동료들 모르게. 키워드 몇 개 넣었다. “친환경”, “내츄럴”, “프리미엄”. 엔터 쳤다.

30초 만에 로고 20개가 나왔다.

솔직히 말하면. 절반은 쓸 만했다. 트렌디했다. 밸런스도 괜찮았다. 컬러도 무난했다.

내가 3일 걸려서 만드는 퀄리티를 30초 만에.

옆 자리 후배가 물었다. “형, 뭐 보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창을 껐다. 손에 땀이 났다.

오후 내내 집중이 안 됐다. 지금 하는 프로젝트. 유기농 식품 브랜드. 로고 시안 5개 작업 중. 지난주부터 시작했다. 컨셉 잡는 데 일주일 걸렸다.

AI는 30초면 된다는데.

나는 뭐 하는 건가.

클라이언트 미팅에서

오늘 4시. 클라이언트 미팅이 있었다. 신규 카페 브랜딩 프로젝트. 초기 컨셉 PT.

준비했다. 무드보드 30장. 레퍼런스 20개. 컨셉 방향 3개. 지난주 내내 매달렸다. 동네 카페 15곳 다녔다. 사진 찍고, 메뉴판 보고, 분위기 느꼈다.

PT 시작했다. 컨셉 A 설명했다. “요즘 카페는 공간이 브랜드입니다. 로고보다 중요한 건 경험이죠.”

대표님이 물었다. “그런데 로고는 언제 나와요?”

“로고는… 컨셉이 확정돼야 작업이…”

“제 친구가 AI 툴로 만든 로고 봤는데. 거기도 경험 키워드 넣으면 나오던데요?”

숨이 막혔다.

말했다. “AI는 키워드를 조합합니다. 하지만 브랜드는 조합이 아닙니다.”

대표님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뜻이죠?”

나도 몰랐다. 그게 무슨 뜻인지. 일단 뱉은 말이었다.

퇴근길에 생각했다

미팅은 어정쩡하게 끝났다. “일단 로고 시안도 같이 보고 싶어요.” 결국 로고다. 항상 로고로 끝난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AI는 뭘 못 할까.

로고는 만든다. 컬러도 뽑는다. 레이아웃도 짠다. 타이포그래피도 조합한다. 무드보드도 생성한다.

그럼 나는 뭘 하는 건가.

답이 없었다. 집에 와서도 계속 생각했다. 아내가 물었다. “왜 그래?” “아니, 그냥.”

맥주 마셨다. 한 캔 더 땄다.

밤 11시. 침대에 누워서도 생각했다.

새벽에 깨달은 것

잠이 안 왔다. 새벽 2시. 일어나서 노트북 켰다.

오늘 미팅 자료 다시 봤다. 무드보드를. 내가 찍은 카페 사진들을. 메뉴판 이미지들을.

그리고 AI 툴로 만든 로고들을 다시 봤다.

차이가 보였다.

AI 로고는 예뻤다. 깔끔했다. 트렌디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왜 이 모양인지, 왜 이 컬러인지, 왜 이 폰트인지. 설명이 없었다.

내 무드보드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 카페가 들어설 동네의 오래된 빵집. 그 앞을 지나는 퇴근길 직장인들. 창가에 앉아 노을 보는 사람들.

브랜드는 이유다.

AI는 결과물을 만든다. 나는 이유를 만든다.

그게 차이였다.

다음 날 아침

출근했다. 팀장한테 말했다. “어제 미팅, 다시 준비하고 싶어요.”

“뭘 바꾸게?”

“컨셉이요. 로고 먼저 보여드리면 안 될 것 같아요.”

팀장이 웃었다. “클라이언트는 로고 보고 싶어 하잖아.”

“그래서 이유를 먼저 만들려고요. 로고 전에 철학을. AI는 못 하는 거요.”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해봐.”

자리에 앉았다. 노트 폈다.

적었다. “이 카페는 왜 존재하는가. 이 동네에 왜 필요한가. 누구를 위한 공간인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AI는 키워드를 조합한다. 나는 철학을 만든다.

브랜딩이란

지난 9년간 배운 게 있다. 브랜딩은 예쁜 로고가 아니다. 일관된 컬러도 아니다. 세련된 폰트도 아니다.

브랜딩은 존재 이유다.

왜 이 브랜드가 필요한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무엇을 믿는가. 어떤 가치를 지키는가.

이게 먼저다. 로고는 그다음이다.

AI는 이걸 못 한다. 할 수가 없다. 이건 데이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관찰해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했던 프로젝트가 생각났다. 동네 작은 책방 브랜딩. 사장님은 퇴직 교사였다. “아이들이 편하게 앉아서 책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 한마디에서 브랜드가 나왔다. 로고는 동그란 안경 모양이었다. 컬러는 노을빛 주황이었다. 폰트는 교과서체였다.

왜냐고 물으면 다 대답할 수 있었다. 안경은 책 읽는 모습. 주황은 방과 후 석양. 교과서체는 따뜻한 선생님.

AI한테 “동네 책방, 따뜻함, 아이들” 넣으면. 예쁜 로고 나온다. 하지만 퇴직 교사의 마음은 안 담긴다.

미팅 재준비

이틀 걸렸다. 로고는 안 만들었다. 대신 이야기를 만들었다.

“당신의 카페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지를 만들었다. 클라이언트한테 보냈다. 직접 작성해달라고.

답변이 왔다. “퇴근 후 혼자 올 수 있는 곳. 아무도 모르는 내 아지트. 혼자여도 외롭지 않은 공간.”

이게 브랜드였다.

무드보드를 다시 짰다. 혼자 앉은 사람들 사진. 창가 자리. 따뜻한 조명. 작은 테이블.

컨셉을 다시 썼다. “당신만의 섬.”

이제 로고를 그릴 수 있었다. 작은 섬 모양. 한 그루 나무. 심플한 라인.

PT 자료 마지막 장에 적었다. “AI는 카페 로고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카페가 왜 필요한지는 AI가 말해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미팅

어제였다. 같은 클라이언트. 같은 회의실.

이번엔 로고를 안 보여줬다. 먼저 질문지 답변을 읽었다. 대표님 목소리로.

“퇴근 후 혼자 올 수 있는 곳. 아무도 모르는 내 아지트.”

대표님 얼굴이 달라졌다. “제가 쓴 거네요.”

“네. 이게 브랜드의 시작입니다.”

무드보드 넘겼다. 혼자 앉은 사람들. 창가. 조명. 대표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컨셉 설명했다. “당신만의 섬. 혼자여도 외롭지 않은 공간.”

로고 보여줬다. 작은 섬. 한 그루 나무.

대표님이 한참 봤다. 말했다. “이거예요. 제가 원한 게.”

미팅 끝나고. 대표님이 물었다. “AI 툴로는 이렇게 안 나오나요?”

웃었다. “예쁜 로고는 나와요. 근데 대표님 이야기는 안 담겨요.”

“아, 그런 차이구나.”

AI 시대의 디자이너

집에 와서 생각했다. 나는 대체될까. 아니, 뭐가 대체될까.

작업은 대체된다. 로고 그리기, 컬러 뽑기, 레이아웃 잡기. 이건 AI가 더 빠르다. 더 많이 만든다.

하지만 이유는 대체 안 된다. 왜 이 브랜드가 필요한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믿는지.

이건 사람만 만들 수 있다. 사람을 만나고, 관찰하고, 공감해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읽은 책이 생각났다. “디자이너의 미래”. 거기 이런 문장이 있었다. “도구가 발전하면 기술자는 줄고 철학자가 남는다.”

이제 이해했다.

AI 시대의 디자이너는 철학자다. 브랜드의 존재 이유를 만드는 사람. 로고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 만드는 사람.

요즘 하는 일

요즘 작업 방식이 바뀌었다. 프로젝트 시작하면 일단 만난다. 클라이언트를. 직접.

사무실 가서 관찰한다. 어떤 사람들이 일하는지. 벽에 뭐가 붙어 있는지. 회의할 때 어떤 말을 자주 쓰는지.

제품 만든다면 공장에 간다. 사장님이 어떤 표정으로 제품을 보는지. 직원들이 어떤 자부심을 가지는지.

카페 브랜딩이면 동네를 걷는다. 누가 지나다니는지. 어떤 가게들이 있는지. 저녁 몇 시에 불이 켜지는지.

이게 브랜딩의 시작이다. 로고는 나중이다.

AI는 이걸 못 한다. 데이터로 학습하지만 공감은 못 한다. 패턴은 찾지만 의미는 못 만든다.

동료들한테도 말했다. “우리는 로고 만드는 사람이 아니야. 브랜드의 존재 이유를 만드는 사람이야.”

팀 막내가 물었다. “그럼 AI 쓰면 안 돼요?”

“아니, 써. 많이 써. 대신 AI한테 철학을 만들라고 하지 마. 우리가 만든 철학을 시각화하는 데 써.”

불안은 여전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불안하다. AI 툴은 계속 발전한다. 더 빨라지고, 더 똑똑해진다.

어쩌면 언젠가 AI가 철학도 만들지 모른다. 데이터만으로 사람 마음을 읽어내는 날이 올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리고 그때가 오더라도. 나는 사람이다.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느끼고,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것. 이게 내 일의 본질이다.

로고 그리는 게 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이해하는 게 일이었다.

이걸 깨달으니까. 조금 편해졌다.

마지막으로

동료한테 말했다. “AI 디자인 툴 써봤어?”

“네. 신기하더라고요.”

“우리 일 대체할 것 같아?”

동료가 웃었다. “로고 그리는 일은요. 근데 형이 하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내가 하는 일이 뭔데?”

“브랜드한테 영혼 넣는 거요.”

좋은 표현이다. 영혼.

AI는 몸을 만든다. 나는 영혼을 넣는다.


AI는 30초 만에 로고를 만들지만, 9년차 디자이너는 한 달 동안 브랜드의 이유를 만든다. 그게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