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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폴리오 사이트 리뉴얼 - 1년마다 나를 갈아내기

포트폴리오 사이트 리뉴얼 - 1년마다 나를 갈아내기

또 시작이다 포트폴리오 사이트 리뉴얼. 올해로 9년차니까 아홉 번째다. 매년 이맘때쯤 되면 내 사이트가 눈에 안 들어온다. 작년에 만든 건데 이미 낡아 보인다. 폰트도, 레이아웃도, 심지어 올린 작업들도. 아내가 물었다. "또 만들어? 작년 거 괜찮았는데." 괜찮았다. 그때는. 지금은 아니다. 금요일 밤 11시. 커피 내리고 맥북 켰다. Figma 새 파일. 이름은 'Portfolio_2024_v1'. 내년에는 'Portfolio_2025_v1'을 만들겠지. 그렇게 계속.작년의 나는 틀렸다 2023년 사이트를 연다. 메인 화면에 굵은 고딕체로 "BRAND IDENTITY DESIGNER". 크게 박아놨다. 지금 보니까 너무 직설적이다. 왜 이렇게 증명하려고 했을까. 스크롤 내린다. 케이스 스터디 5개. 설명이 길다. 컨셉 과정을 3단계로 나눠서 보여주고, 무드보드 이미지가 8장씩 들어가 있다. 클라이언트한테 설명하듯 써놨다. 문제는 이거다. 누가 다 읽어? 나도 안 읽는다. 작년의 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전문성이라고 믿었다. 틀렸다. 지금 생각은 다르다. 결과물 하나가 열 장의 과정 설명보다 강하다. About 페이지를 본다. "브랜드의 본질을 찾아 시각화하는 디자이너입니다." 이런 말 쓰는 디자이너 천 명은 된다. 나만의 말이 아니다. 복사 붙여넣기다. 사이트를 끈다. 부끄럽다. 동시에 다행이다. 부끄러워할 수 있다는 건 성장했다는 뜻이니까.매년 버리는 것들 2020년 사이트. 검은 배경에 흰 글씨. 너무 힙하고 싶었다. 지금 보면 가독성이 바닥이다. 2021년 사이트. 반응형 안 만들었다. 모바일에서 깨진다. 그해에는 데스크톱만 생각했다. 2022년 사이트. 애니메이션을 20개 넣었다. 로딩이 느리다. 인터랙션에 취해 있었다. 매년 버린다. 작년에 집착했던 것들을. 폰트, 컬러, 구조, 말투. 전부 다시 쓴다. 이게 낭비냐고? 아니다. 이게 기록이다. 포트폴리오는 나의 현재를 보여주는 도구다. 과거가 아니라. 작년의 나는 작년 사이트에 담겨 있다. 올해의 나는 다르다. 다른 사람한테 다른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클라이언트는 과거의 나를 고용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를 본다. 그러니까 사이트도 지금이어야 한다.올해는 덜어낸다 새 사이트 컨셉. 한 줄로 정했다. "작업만 보여준다." 메인 화면에 프로젝트 썸네일 9개. 그리드로. 텍스트는 프로젝트 이름 하나. 그게 끝이다. 클릭하면 결과물만. 로고, 패키지, 어플리케이션. 큰 이미지로. 설명은 세 줄. 클라이언트, 연도, 한 줄 컨셉. 과정은 뺀다. 무드보드도 뺀다. 나는 나한테만 의미 있다. 보는 사람한테는 결과가 전부다. About 페이지도 바꾼다. "9년차 브랜드 디자이너. 서울에서 일한다. 이메일 주세요." 끝. 간단하다. 간단한 게 어렵다. 덜어내는 게 더하는 것보다 힘들다. 폰트는 산세리프 하나. 컬러는 검정, 흰색, 회색. 그게 다다. 작업이 색이다. 사이트는 배경이다. Figma에서 목업을 본다. 깔끔하다. 작년보다 훨씬. 5년 전보다는 비교도 안 된다.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는 작업이 아니다 여기서 착각하면 안 된다. 포트폴리오 사이트는 작업 모음집이 아니다. 나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어떤 프로젝트를 선택하는가. 어떤 순서로 보여주는가. 어떤 말로 설명하는가. 그게 나다. 올해는 9개를 선택했다. 작년에는 12개였다. 줄였다. 평범한 건 뺐다. 클라이언트가 유명해서 넣었던 것도 뺐다. 내가 자랑스러운 것만 남겼다. 순서도 바꿨다. 예전에는 최신 순이었다. 이제는 임팩트 순이다. 첫 번째에 가장 강한 걸 놓는다. 마지막에 두 번째로 강한 걸 놓는다. 시작과 끝이 기억에 남으니까. 설명도 줄였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같은 말 안 쓴다. 대신 "100년 된 한복 브랜드, 20대가 입게 만들기"라고 쓴다.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포트폴리오는 디자인 결과물의 모음이 아니다. 나라는 디자이너를 디자인하는 작업이다. 메타 디자인이다. 1년의 거리 작년 사이트와 올해 사이트를 나란히 놓는다. 달라 보인다. 많이. 작년 나는 증명하려고 했다. "나 잘해요, 과정도 체계적이에요, 전문가예요." 그래서 많이 보여줬다. 올해 나는 확신한다. "내 작업을 보세요." 그래서 적게 보여준다. 1년이 만든 거리다. 디자이너로 9년을 하면서 배운 게 있다. 성장은 누적이 아니다. 갱신이다. 작년의 나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넘어서는 거다. 포트폴리오 리뉴얼이 바로 그거다. 물리적으로 과거를 버리는 의식. 새 파일을 열고, 새 레이아웃을 잡고, 새 말을 쓴다. "나는 이제 이런 사람입니다." 클라이언트한테 하는 말이기도 하고, 나한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코드를 친다 Figma 디자인 끝났다. 이제 코딩이다. HTML, CSS, 약간의 JavaScript. 에이전시 다니지만 내 사이트는 내가 만든다. CMS 안 쓴다. WordPress 안 쓴다. Wix는 더더욱. 손으로 짠다. 한 줄 한 줄. 비효율적이다. 시간 오래 걸린다. 그래도 이게 맞다. 내 포트폴리오에 남의 템플릿 쓰면 이상하지 않나. 디자이너인데. 브랜드 만드는 사람인데. 코드 치는 건 명상이다. 논리적이고 명확하다. 디자인은 모호할 때가 많다. "이게 맞나?" 계속 고민한다. 코드는 작동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 하나다. 오전 2시. 반응형 작업 중이다. 모바일 버전. 태블릿 버전. 데스크톱 버전. 브레이크포인트 세 개. 아내가 먼저 잤다. 거실 불만 켜져 있다. 키보드 소리만 들린다. 과거를 아카이빙한다 새 사이트 올리기 전에 하는 일이 있다. 작년 사이트를 저장한다. Portfolio_Archive 폴더에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다. 2016년부터 2023년까지. 8개의 사이트. 가끔 연다. 옛날 거. 부끄러운데 재밌다. 2016년 사이트. 신입 때다. 프로젝트 3개밖에 없다. 개인 작업으로 채웠다. 가상 브랜딩, 포스터 시리즈. 지금 보면 학생 포트폴리오다. 2018년 사이트. 첫 대형 프로젝트 들어갔다. 그것만 메인에 크게 박아놨다. 나머지는 작아 보이게. 균형이 없다. 2020년 사이트. 코로나 때다. 집에서 사이트만 5번 갈아엎었다. 할 게 없었다. 과한 디테일이 보인다. 각 사이트마다 그해의 내가 담겨 있다. 걱정, 자신감, 불안, 성장. 전부. 지우지 않는다. 이게 내 히스토리니까. 디자이너로서의. 그래서 또 만든다 새 사이트 올렸다. 도메인은 그대로. 내용만 바뀌었다. 브라우저 캐시 삭제하고 접속한다. 로딩 빠르다. 이미지 최적화 잘했다. 스크롤 내린다. 깔끔하다. 작업이 잘 보인다. 나는 잘 안 보인다. 그게 의도다. 모바일로 확인한다. 문제없다. 태블릿도. 데스크톱도. Contact 페이지 메일 폼 테스트. 내 메일로 테스트 발송. 1초 만에 도착. 완료. 만족스럽다. 지금은. 1년 뒤에는 또 불만족스러울 거다. 당연하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를 테니까. 그럼 또 만든다. 열 번째 사이트를. 새 Figma 파일 열고, 새 컨셉 잡고, 새 코드 치고. 성장의 증거 포트폴리오 리뉴얼이 귀찮냐고? 솔직히 귀찮다. 시간 많이 든다. 주말 이틀은 날린다. 디자인 하루, 코딩 하루. 테스트 반나절. 돈도 안 된다. 클라이언트 프로젝트 하나 더 받으면 300만원이다. 그 시간에 내 사이트 만든다. 그래도 한다. 매년.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성장하고 있고, 그걸 확인하고 싶으니까. 작년 사이트를 볼 때 부끄럽다는 건, 내가 달라졌다는 뜻이다. 시각이 변했다. 기준이 높아졌다. 더 잘하게 됐다. 그게 증거다. 물리적인. 디자이너는 성장을 측정하기 어렵다. 매출도 아니고, 직급도 애매하고. 뭘 기준으로 봐야 하나. 나는 포트폴리오로 본다. 1년 전 내가 만든 것을 지금 내가 보고 "이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성장한 거다. 클라이언트는 모른다 재밌는 건 클라이언트는 이거 모른다는 거다. 미팅 때 포트폴리오 보여주면, "사이트 깔끔하네요" 한마디 하고 넘어간다. 작년 사이트든 올해 사이트든 똑같이. 그들한테는 차이가 안 보인다. 당연하다. 그들은 내 과거를 모르니까. 차이를 아는 건 나다. 나만. 그리고 그거면 된다. 내가 나를 갱신하는 거니까. 남을 위한 게 아니라. 클라이언트는 결과만 본다. 이 사람이 우리 프로젝트 잘할까. 그것만 판단한다. 하지만 그 "잘함"은 어디서 오는가. 끊임없이 나를 업데이트하는 태도에서 온다. 포트폴리오 리뉴얼은 그 태도의 표현이다. 내년의 나에게 2024년 사이트 완성. Portfolio_Archive 폴더에 2023년 사이트 저장. 파일명은 'Portfolio_2023_final'. 내년 이맘때쯤, 2024년 사이트를 열 거다. 그리고 생각하겠지. "이건 아닌데." 그럼 또 만들 거다. 열한 번째를.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을 거다. 새로운 작업을 했을 거고, 새로운 고민을 했을 거고, 새로운 답을 찾았을 거다. 그 답을 열한 번째 사이트에 담겠지. 지금의 나는 그걸 기대한다. 미래의 나를. 더 나은. 포트폴리오 리뉴얼은 미래의 나한테 보내는 신호다. "계속 성장해. 멈추지 마." 디자이너의 순환 다른 직업은 어떨까. 1년마다 자기를 갈아엎나. 의사는 병원 홈페이지를 매년 리뉴얼하지 않는다. 변호사는 명함을 해마다 바꾸지 않는다. 디자이너는 다르다. 우리는 변화를 다루는 사람들이니까. 트렌드를 읽고, 새로운 걸 시도하고, 본질은 유지하면서 형식은 바꾼다. 그게 우리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도 그래야 한다. 매년 리프레시. 매년 리빌드. 순환이다. 계절처럼. 봄에 기획하고, 여름에 디자인하고, 가을에 개발하고, 겨울에 론칭한다. 그리고 다시 봄. 포트폴리오는 그 순환의 결과물이자 시작점이다. 오전 3시 사이트 최종 확인 끝났다. 문제없다. 도메인 접속해서 캡처했다. 스크린샷 10장. 섹션별로. Portfolio_2024 폴더에 저장. 내년에 볼 거다. 그리고 쓴웃음 짓겠지. 맥북 덮는다. 불 끈다. 침대로 간다. 아내가 뒤척인다. "끝났어?" "응. 끝났어." 끝났다. 올해 리뉴얼은. 내년 리뉴얼까지 365일 남았다.매년 부정하고, 매년 다시 쓴다. 그게 성장이다.

아내도 야근, 나도 야근 - 업계 부부의 저녁 식탁

아내도 야근, 나도 야근 - 업계 부부의 저녁 식탁

아내도 야근, 나도 야근 - 업계 부부의 저녁 식탁 오늘도 각자 먹는다 저녁 7시 42분. 아내한테 카톡 왔다. "오빠 저녁 뭐 먹어?" "아직. 미팅 끝나고." "나도 수정 들어와서 못 먹을듯" "ㅇㅋ 각자" 이게 우리 부부의 일상이다. 결혼 2년차. 같은 업계 부부. 나는 브랜드 디자이너, 아내는 카피라이터. 둘 다 에이전시에서 일한다. 저녁을 함께 먹는 날이 일주일에 두세 번이면 많은 편이다. 나머지는 각자 편의점, 배달, 아니면 굶는다. 클라이언트 피드백은 오후 5시쯤 오고, 수정 요청은 칼퇴 10분 전에 온다. 그게 이 업계다. 오늘은 나도 미팅이 길어졌다. 클라이언트가 로고 시안 15개 중에 고민한다며 커피를 세 잔 더 시켰다. 결국 2시간 반. 결론은 "일단 내부 검토 후 연락드릴게요"였다.냉장고에 남은 반찬 집에 도착한 건 9시 20분. 아내는 아직 회사다. 현관 불 꺼져 있다. 혼자다. 냉장고 연다. 김치, 계란, 햄, 우유. 어제 아내가 싸온 도시락 반찬 조금. 밥은 있다. 아내가 아침에 해놓고 간 거다. 전자레인지 돌린다. 2분 30초. 돌아가는 소리 듣고 있으면 왠지 쓸쓸하다. 결혼하면 따뜻한 밥상 차려주는 사람 있을 줄 알았는데, 우리 둘 다 차려줄 시간이 없다. 밥 먹으면서 폰 본다. 인스타그램에 친구들이 저녁 사진 올렸다. 예쁜 파스타, 와인, 분위기 있는 식당. 좋아요 누른다. 부럽진 않다. 그냥 다른 삶이다. 아내한테 메시지 보낸다. "밥 먹었어. 맛있었어. 고마워." 읽씹이다. 바쁜가보다. 나도 미팅 중엔 못 봤으니까. 이해한다.같은 언어로 싸운다 10시 반쯤 아내 들어왔다. 문 여는 소리, 한숨 소리. "진짜 미치겠다." 신발 벗으면서 하는 말이다. 나도 안다. 뭔지. "수정?" "응. 5차." "컨셉 바뀐 거야?" "아니, 톤앤매너 바뀜. 갑자기 MZ 타겟 아니래." "미친." 우리 대화는 이렇다. 설명 필요 없다. 업계 용어로 다 통한다. 컨셉, 톤앤매너, 타겟, 레퍼런스, 무드보드. 이 단어들이면 충분하다. 아내가 냉장고 열었다. 똑같은 반찬 본다. 밥 덥힌다. 나랑 똑같이. "오빠도 야근?" "미팅 길었어. 로고 15개 보여줬는데 다 애매하대." "ㅋㅋㅋ 그럼 20개 만들래?" "진짜 그러라 할 것 같아." 아내 웃는다. 나도 웃는다. 이게 우리 위로다. 서로의 빡침을 이해한다. 다른 사람한테 설명하면 "그래도 돈 받잖아" 이런 말 듣는다. 하지만 우리끼린 안 그런다. 같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동료 같은 느낌이다. 부부이기도 하지만.주말에도 각자 일한다 주말이다. 토요일 오전 11시. 아내는 노트북 켰다. 나도 태블릿 켰다. "오빠, 나 일 좀 해야 돼." "나도." "미안." "괜찮아. 나도 미안." 우리 주말은 이렇다. 침대에 누워서 각자 일한다. 아내는 카피 수정하고, 나는 로고 작업한다. 옆에 있지만 각자 집중한다. 가끔 아내가 묻는다. "오빠, 이거 어때? '새로운 일상을 브랜딩하다'랑 '일상을 새롭게 브랜딩하다' 중에 뭐가 나아?" "후자. 더 액티브해."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나도 묻는다. "이 컬러 톤, 너무 무겁나? 좀 더 밝게 가야 하나?" "타겟이 누군데?" "30대 초반, 여성." "그럼 한 톤 올려." 서로 피드백 준다. 정확하다. 군더더기 없다. 이게 업계 부부의 장점이다. 설명 안 해도 안다. 타겟, 컨셉, 브랜드 톤 이런 거 설명 안 해도 바로 이해한다. 오후 3시쯤 아내가 노트북 덮는다. "배고파. 나가 먹을까?" "응." 근처 국밥집 간다. 줄 서 있는 동안 아내 손 잡는다. 아내가 웃는다. "오빠, 우리 이상한 부부지?" "왜?" "주말에 일하고, 저녁도 각자 먹고." "그래도 괜찮은데." "응. 나도." 국밥 먹으면서 각자 폰 본다. 레퍼런스 찾는다. 아내는 카피 레퍼런스, 나는 디자인 레퍼런스. 식사 중에도 일 얘기한다. 하지만 불편하지 않다. 다른 부부들은 데이트 코스 짜고, 여행 계획 세우고 그러는데, 우리는 프로젝트 일정 맞춘다. 이상하긴 하다. 근데 우리한텐 맞다. 새벽 2시의 공감 어제 새벽 2시. 아내가 안 잔다. 노트북 불빛이 침실까지 샌다. 일어나서 나간다. 거실에 아내가 앉아 있다. 화면 보고 있다. 표정이 안 좋다. "왜 안 자?" "내일 PT인데 카피가 맘에 안 들어." "다 만들었잖아." "근데 뭔가... 임팩트가 약한 것 같아." 안다. 그 느낌. 나도 맨날 그렇다. 로고 다 만들어놓고 새벽에 다시 본다. 뭔가 2%가 부족한 느낌. 설명 못 하는 그 느낌. "어디 보자." 옆에 앉는다. 화면 본다. 카피 10개 있다. 다 괜찮다. 근데 아내는 만족 못 한다. "이거, 톤이 너무 딱딱하지 않아?" "타겟이 기업이잖아." "그래도 요즘은 조금 더 친근하게 가는 추세잖아." "그럼 이거. '함께 만드는' 대신 '우리가 만드는'으로 바꿔봐." 아내가 쳐본다. 읽는다. 고민한다. "좀 나은 것 같은데?" "응. 주어가 명확해져." "고마워." 다시 작업한다. 나도 옆에서 본다. 30분쯤 지나니까 아내가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이제 됐다." "잘했어." "오빠도 새벽에 이러지?" "맨날." 둘이 웃는다. 새벽 2시에 일 얘기하면서 웃고 있다. 이상한 부부 맞다. 침대 돌아온다. 누운다. 아내가 내 손 잡는다. "오빠." "응." "우리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뭐가?" "이렇게 일만 하고, 저녁도 못 먹고, 주말에도 일하고." "음..." 생각해본다. 솔직히 답 없다. 이게 맞는 삶인지 모르겠다. 주변에선 일과 삶의 균형 얘기한다. 워라밸. 우리한텐 없다. 근데 후회는 안 한다. 우리 둘 다 이 일 좋아한다. 클라이언트한테 빡칠 때도 많지만, 좋은 결과물 나올 때 희열 있다. 그걸 서로 이해한다. "괜찮아. 우리한텐 이게 맞는 거 같아." "그치?" "응. 다른 사람들이 이해 못 해도, 우린 서로 이해하잖아." 아내가 고개 끄덕인다. 잠든다. 비어 있는 식탁의 의미 어제 퇴근하고 마트 갔다. 장 봤다. 고기, 야채, 과일. 장바구니 가득 담았다. 집 와서 아내한테 사진 보냈다. "오늘 내가 저녁 만들게." "진짜? 무슨 일이야ㅋㅋㅋ" "그냥. 오늘은 일찍 끝나서." 6시쯤 퇴근했다. 드문 일이다. 프로젝트 없는 주간이라 가능했다. 요리 시작한다. 삼겹살 굽고, 야채 썰고, 된장찌개 끓인다. 요리 못 하지만 할 수는 있다. 유튜브 보면서 한다. 7시 반. 상 차렸다. 그럴듯하다. 아내한테 메시지 보낸다. "다 됐어. 언제 와?" "30분 후. 금방 가." 기다린다. TV 켠다. 뉴스 본다. 식탁 본다. 두 사람 자리. 오랜만이다. 8시. 문 열린다. 아내 들어온다. 식탁 본다. 놀란다. "헐, 대박." "앉아." "오빠가 이걸 다?" "응. 맛있을지 모르겠다." 같이 먹는다. 맛은 그냥 그렇다. 근데 아내가 계속 맛있다고 한다. 거짓말인 거 안다. 근데 기분 좋다. "오빠, 고마워." "별거 아니야." "아니야. 이게 되게 큰 거야." 맞다. 큰 거다. 우리한텐. 함께 먹는 저녁. 일주일에 두세 번밖에 안 되는 이 시간이 우리한테는 특별하다. 밥 먹으면서 일 얘기 안 한다. 오늘은 다른 얘기한다. 주말에 뭐 할지, 다음 달 여행 갈지, 친구들 만날지. 평범한 대화. 설거지도 같이 한다. 아내가 설거지하고, 나는 닦는다. 싱크대 앞에서 나란히 선다. 아내가 갑자기 웃는다. "뭐?" "신기해서. 우리 이렇게 같이 설거지하는 거." "자주 못 하지." "응. 그래서 더 좋은 거 같아." 맞다. 자주 못 해서 더 좋다. 비어 있는 식탁이 일상이라서, 함께하는 식탁이 더 소중하다. 결국 우리는 오늘 아침. 출근 준비하는데 아내가 도시락 쌌다. 두 개. "오빠 거." "어? 나 점심 약속 있는데." "그럼 저녁에 먹어. 야근할 거잖아." "음... 맞네." 아내도 야근할 거다. 나도 안다. 내일 PT 있다고 어제 말했다. "오빠도 오늘 늦지?" "응. 미팅 있어." "그럼 저녁 각자?" "응. 미안." "괜찮아. 나도 어차피 야근." 현관에서 신발 신는다. 아내도 준비한다. 같이 나간다. 엘리베이터 탄다. 1층 내린다. 밖으로 나간다. 지하철역까지 같이 걷는다. 손 잡는다. "오빠." "응." "오늘 힘내." "너도." 역 앞에서 헤어진다. 아내는 2호선, 나는 6호선. 반대 방향이다. 돌아선다. 계단 내려간다. 출근길 사람들 사이에서 걷는다. 생각한다. 우리 부부 이상한가. 저녁도 각자 먹고, 주말에도 일하고, 함께 있어도 각자 노트북 보고. 근데 괜찮다. 우리한텐 맞다. 같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동료. 서로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 그게 우리다. 비어 있는 식탁이 외롭지 않은 이유.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을 알고 있어서다. 언젠가 함께 앉을 거라는 걸 알아서다. 그리고 그 사람도 똑같은 마음이라는 걸 아니까. 그걸로 충분하다. 오늘도 야근이다. 아내도 야근이다. 내일도 그럴 거다. 근데 주말엔 함께 국밥 먹을 거다. 그 정도면 됐다. 지하철 탄다. 앉는다. 아내한테 메시지 보낸다. "사랑해." 읽씹이다. 바쁜가보다. 괜찮다. 나중에 답 올 거다. "나도"라고. 그거면 된다.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매일의 저녁이 아니라, 이해하는 한 사람이었다.

AI 디자인 툴이 나를 실직시킬까

AI 디자인 툴이 나를 실직시킬까

AI 디자인 툴이 나를 실직시킬까 오늘 또 봤다. 인스타그램 광고로 뜨는 AI 디자인 툴. "3분 만에 완성하는 브랜드 아이덴티티." 클릭했다. 둘러봤다. 꽤 괜찮았다. 배가 아팠다. 아침에 본 광고 출근하면서 봤다. AI 로고 생성 툴 광고. 키워드 입력하면 로고 30개가 뚝딱. 컬러 조합도, 폰트 조합도 알아서. 월 구독료 2만원. 우리 회사 한 달 프로젝트 비용이 800만원이다. 광고 댓글을 읽었다. "이거면 디자이너 필요 없는데?" "스타트업한테 완전 좋음." "이제 에이전시 안 써도 되겠네." 지하철에서 내렸다. 걸어서 회사까지 10분. 내내 생각했다. 나는 대체될까.실제로 써봤다 점심 먹고 몰래 써봤다. 동료들 모르게. 키워드 몇 개 넣었다. "친환경", "내츄럴", "프리미엄". 엔터 쳤다. 30초 만에 로고 20개가 나왔다. 솔직히 말하면. 절반은 쓸 만했다. 트렌디했다. 밸런스도 괜찮았다. 컬러도 무난했다. 내가 3일 걸려서 만드는 퀄리티를 30초 만에. 옆 자리 후배가 물었다. "형, 뭐 보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창을 껐다. 손에 땀이 났다. 오후 내내 집중이 안 됐다. 지금 하는 프로젝트. 유기농 식품 브랜드. 로고 시안 5개 작업 중. 지난주부터 시작했다. 컨셉 잡는 데 일주일 걸렸다. AI는 30초면 된다는데. 나는 뭐 하는 건가.클라이언트 미팅에서 오늘 4시. 클라이언트 미팅이 있었다. 신규 카페 브랜딩 프로젝트. 초기 컨셉 PT. 준비했다. 무드보드 30장. 레퍼런스 20개. 컨셉 방향 3개. 지난주 내내 매달렸다. 동네 카페 15곳 다녔다. 사진 찍고, 메뉴판 보고, 분위기 느꼈다. PT 시작했다. 컨셉 A 설명했다. "요즘 카페는 공간이 브랜드입니다. 로고보다 중요한 건 경험이죠." 대표님이 물었다. "그런데 로고는 언제 나와요?" "로고는... 컨셉이 확정돼야 작업이..." "제 친구가 AI 툴로 만든 로고 봤는데. 거기도 경험 키워드 넣으면 나오던데요?" 숨이 막혔다. 말했다. "AI는 키워드를 조합합니다. 하지만 브랜드는 조합이 아닙니다." 대표님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뜻이죠?" 나도 몰랐다. 그게 무슨 뜻인지. 일단 뱉은 말이었다.퇴근길에 생각했다 미팅은 어정쩡하게 끝났다. "일단 로고 시안도 같이 보고 싶어요." 결국 로고다. 항상 로고로 끝난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AI는 뭘 못 할까. 로고는 만든다. 컬러도 뽑는다. 레이아웃도 짠다. 타이포그래피도 조합한다. 무드보드도 생성한다. 그럼 나는 뭘 하는 건가. 답이 없었다. 집에 와서도 계속 생각했다. 아내가 물었다. "왜 그래?" "아니, 그냥." 맥주 마셨다. 한 캔 더 땄다. 밤 11시. 침대에 누워서도 생각했다. 새벽에 깨달은 것 잠이 안 왔다. 새벽 2시. 일어나서 노트북 켰다. 오늘 미팅 자료 다시 봤다. 무드보드를. 내가 찍은 카페 사진들을. 메뉴판 이미지들을. 그리고 AI 툴로 만든 로고들을 다시 봤다. 차이가 보였다. AI 로고는 예뻤다. 깔끔했다. 트렌디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왜 이 모양인지, 왜 이 컬러인지, 왜 이 폰트인지. 설명이 없었다. 내 무드보드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 카페가 들어설 동네의 오래된 빵집. 그 앞을 지나는 퇴근길 직장인들. 창가에 앉아 노을 보는 사람들. 브랜드는 이유다. AI는 결과물을 만든다. 나는 이유를 만든다. 그게 차이였다. 다음 날 아침 출근했다. 팀장한테 말했다. "어제 미팅, 다시 준비하고 싶어요." "뭘 바꾸게?" "컨셉이요. 로고 먼저 보여드리면 안 될 것 같아요." 팀장이 웃었다. "클라이언트는 로고 보고 싶어 하잖아." "그래서 이유를 먼저 만들려고요. 로고 전에 철학을. AI는 못 하는 거요."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해봐." 자리에 앉았다. 노트 폈다. 적었다. "이 카페는 왜 존재하는가. 이 동네에 왜 필요한가. 누구를 위한 공간인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AI는 키워드를 조합한다. 나는 철학을 만든다. 브랜딩이란 지난 9년간 배운 게 있다. 브랜딩은 예쁜 로고가 아니다. 일관된 컬러도 아니다. 세련된 폰트도 아니다. 브랜딩은 존재 이유다. 왜 이 브랜드가 필요한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무엇을 믿는가. 어떤 가치를 지키는가. 이게 먼저다. 로고는 그다음이다. AI는 이걸 못 한다. 할 수가 없다. 이건 데이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관찰해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했던 프로젝트가 생각났다. 동네 작은 책방 브랜딩. 사장님은 퇴직 교사였다. "아이들이 편하게 앉아서 책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 한마디에서 브랜드가 나왔다. 로고는 동그란 안경 모양이었다. 컬러는 노을빛 주황이었다. 폰트는 교과서체였다. 왜냐고 물으면 다 대답할 수 있었다. 안경은 책 읽는 모습. 주황은 방과 후 석양. 교과서체는 따뜻한 선생님. AI한테 "동네 책방, 따뜻함, 아이들" 넣으면. 예쁜 로고 나온다. 하지만 퇴직 교사의 마음은 안 담긴다. 미팅 재준비 이틀 걸렸다. 로고는 안 만들었다. 대신 이야기를 만들었다. "당신의 카페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지를 만들었다. 클라이언트한테 보냈다. 직접 작성해달라고. 답변이 왔다. "퇴근 후 혼자 올 수 있는 곳. 아무도 모르는 내 아지트. 혼자여도 외롭지 않은 공간." 이게 브랜드였다. 무드보드를 다시 짰다. 혼자 앉은 사람들 사진. 창가 자리. 따뜻한 조명. 작은 테이블. 컨셉을 다시 썼다. "당신만의 섬." 이제 로고를 그릴 수 있었다. 작은 섬 모양. 한 그루 나무. 심플한 라인. PT 자료 마지막 장에 적었다. "AI는 카페 로고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카페가 왜 필요한지는 AI가 말해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미팅 어제였다. 같은 클라이언트. 같은 회의실. 이번엔 로고를 안 보여줬다. 먼저 질문지 답변을 읽었다. 대표님 목소리로. "퇴근 후 혼자 올 수 있는 곳. 아무도 모르는 내 아지트." 대표님 얼굴이 달라졌다. "제가 쓴 거네요." "네. 이게 브랜드의 시작입니다." 무드보드 넘겼다. 혼자 앉은 사람들. 창가. 조명. 대표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컨셉 설명했다. "당신만의 섬. 혼자여도 외롭지 않은 공간." 로고 보여줬다. 작은 섬. 한 그루 나무. 대표님이 한참 봤다. 말했다. "이거예요. 제가 원한 게." 미팅 끝나고. 대표님이 물었다. "AI 툴로는 이렇게 안 나오나요?" 웃었다. "예쁜 로고는 나와요. 근데 대표님 이야기는 안 담겨요." "아, 그런 차이구나." AI 시대의 디자이너 집에 와서 생각했다. 나는 대체될까. 아니, 뭐가 대체될까. 작업은 대체된다. 로고 그리기, 컬러 뽑기, 레이아웃 잡기. 이건 AI가 더 빠르다. 더 많이 만든다. 하지만 이유는 대체 안 된다. 왜 이 브랜드가 필요한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믿는지. 이건 사람만 만들 수 있다. 사람을 만나고, 관찰하고, 공감해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읽은 책이 생각났다. "디자이너의 미래". 거기 이런 문장이 있었다. "도구가 발전하면 기술자는 줄고 철학자가 남는다." 이제 이해했다. AI 시대의 디자이너는 철학자다. 브랜드의 존재 이유를 만드는 사람. 로고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 만드는 사람. 요즘 하는 일 요즘 작업 방식이 바뀌었다. 프로젝트 시작하면 일단 만난다. 클라이언트를. 직접. 사무실 가서 관찰한다. 어떤 사람들이 일하는지. 벽에 뭐가 붙어 있는지. 회의할 때 어떤 말을 자주 쓰는지. 제품 만든다면 공장에 간다. 사장님이 어떤 표정으로 제품을 보는지. 직원들이 어떤 자부심을 가지는지. 카페 브랜딩이면 동네를 걷는다. 누가 지나다니는지. 어떤 가게들이 있는지. 저녁 몇 시에 불이 켜지는지. 이게 브랜딩의 시작이다. 로고는 나중이다. AI는 이걸 못 한다. 데이터로 학습하지만 공감은 못 한다. 패턴은 찾지만 의미는 못 만든다. 동료들한테도 말했다. "우리는 로고 만드는 사람이 아니야. 브랜드의 존재 이유를 만드는 사람이야." 팀 막내가 물었다. "그럼 AI 쓰면 안 돼요?" "아니, 써. 많이 써. 대신 AI한테 철학을 만들라고 하지 마. 우리가 만든 철학을 시각화하는 데 써." 불안은 여전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불안하다. AI 툴은 계속 발전한다. 더 빨라지고, 더 똑똑해진다. 어쩌면 언젠가 AI가 철학도 만들지 모른다. 데이터만으로 사람 마음을 읽어내는 날이 올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리고 그때가 오더라도. 나는 사람이다.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느끼고,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것. 이게 내 일의 본질이다. 로고 그리는 게 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이해하는 게 일이었다. 이걸 깨달으니까. 조금 편해졌다. 마지막으로 동료한테 말했다. "AI 디자인 툴 써봤어?" "네. 신기하더라고요." "우리 일 대체할 것 같아?" 동료가 웃었다. "로고 그리는 일은요. 근데 형이 하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내가 하는 일이 뭔데?" "브랜드한테 영혼 넣는 거요." 좋은 표현이다. 영혼. AI는 몸을 만든다. 나는 영혼을 넣는다.AI는 30초 만에 로고를 만들지만, 9년차 디자이너는 한 달 동안 브랜드의 이유를 만든다. 그게 차이다.

로고 10개 보여달라는 클라이언트와의 첫 미팅

로고 10개 보여달라는 클라이언트와의 첫 미팅

로고 10개, 10개의 철학 오늘 오전 10시. 새 클라이언트 미팅. 여성 의류 브랜드. 창업 3년차. 리브랜딩 프로젝트. 예산은 괜찮은 편. 팀은 3명. 좋은 출발이다. 미팅 하루 전에 메일이 왔다. "디자이너님, 로고 후보는 10개 정도 봐도 될까요?" 그 문장을 읽고 한숨을 쉬었다. 에이전시 일 9년. 그 문장을 5000번은 받은 것 같다. 로고 10개. 말 그대로 10개가 아니라는 걸 안다. 클라이언트는 "선택지가 많으면 마음에 드는 게 나올 거다"라고 생각한다. 확률 게임. 복권처럼. 내가 하는 일을 복권 판매기처럼 본다. 그런데 내가 만드는 건 복권이 아니다.준비 과정 지난주부터 4일을 썼다. 첫날: 클라이언트 자료 정독. 기존 브랜드 스토리. 타겟 고객. 경쟁사 분석. 설립자 인터뷰 영상. SNS 피드. 쇼룸 사진. 왜 이렇게까지 하나. "그냥 로고잖아"라고 하면 웃긴다. 로고는 브랜드 철학이 요약된 거다. 한 줄짜리 시. 이 브랜드는 뭐였나. "자연에서 얻은 소재로 만드는 옷. 지속가능성. 근데 럭셔리한 느낌. 윤리적이지만 세련된." 흔한 요구사항. 그런데 이게 로고에 들어가려면? 단순함과 복잡함의 균형. 자연스러움과 정교함. 친근함과 프리미엄감. 이 모든 게 한 심볼에. 둘째 날: 무드보드. 30개 이미지. 컬러. 타이포그래피. 질감. 기존 로고들 분석. 뭐가 작동하고 뭐가 안 하는지. 셋째 날: 아이디어 스케치. 손으로 그렸다. 50개. 100개. 구분이 안 날 때까지. 넷째 날: 그 중에 10개를 고르는 작업. 여기가 진짜 고민이었다.10개를 고르는 철학 그냥 10개를 고르는 게 아니었다. 1번: 도형 기반. 기하학적. 모던. 미니멀. "심플할 거면 이거다" 카테고리. 2번: 문자 기반. 브랜드 이니셜을 심벌화. 개성 강함. 타이포 강조. "개성 있을 거면 이거다" 카테고리. 3번: 자연 모티프. 풀. 생장. 오르가닉. "지속가능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줄 거면 이거다" 카테고리. 4번: 추상 기하. 위 1번보다 좀 더 따뜻함. 손으로 그린 느낌. "미니멀하지만 감정있을 거면 이거다" 카테고리. 5, 6, 7, 8, 9, 10번: 그 조합들. 변형들. 톤 다른 버전들. 하나하나가 다른 브랜드 철학을 담고 있었다. "선택의 폭을 넓혀드리는 거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정반대다. 각각 다른 방향을 제시해서 클라이언트가 "아, 우리는 이 방향이구나"를 깨달으라고 한 거다. 10개 모두에서 선택하라는 게 아니라, 10개 중에서 우리 브랜드의 진짜 방향이 뭔지 발견하라는 거다. 근데 그걸 설명해야 하는데. 그게 문제다.미팅룸에서 오전 10시 40분. 회의실. 내가 벽에 10개를 붙였다. A4 사이즈로 확대해서. 클라이언트 3명이 들어왔다. 설립자 여성, 마케팅 담당, 운영 담당. "먼저, 왜 10개를 드렸는지 설명하고 싶어요." 나는 1번부터 시작했다. "1번은 도형 기반입니다. 가장 미니멀한 방향. 경쟁사 보니까 이 톤의 브랜드가 없었어요. 프리미엄 마켓에서 심플함은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설립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2번은 좀 다릅니다. 타이포 기반. 브랜드의 이니셜을 디자인 요소로 썼어요. 브랜드 이름을 강하게 드러내야 한다면 이 방향." 마케팅 담당이 "오, 이건 좀 임팩트 있네"라고 했다. "3번은 자연 모티프예요. 풀의 생장 이미지를 추상화했습니다. 브랜드의 핵심 메시지인 지속가능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면 이 쪽이..." 여기서 끊겼다. 설립자가 물었다. "근데 어떤 게 제일 좋으세요?"그 질문 다시 "어떤 게 제일 좋으세요?" 에이전시에서 가장 자주 받는 질문. 동시에 가장 답하기 힘든 질문. "제일 좋은 건 없어요."라고 답할 수는 없다. 프로페셔널하지 않다. 그러면 너희가 뽑아라, 라는 식인데, 클라이언트는 그걸 원하는 게 아니다. 보험이 필요하다. 반대로 "3번이 제일 좋습니다"라고 단정하면 어떻게 되나. 클라이언트는 3번을 안 고르는 방향으로 간다. 항상 그렇다. 디자이너가 추천한 게 오히려 거리감을 만든다. 마치 정답을 주는 느낌이라 압박감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다르게 답했다. "각 방향이 다른 브랜드 철학을 담고 있어요. 어떤 게 제일 중요한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1번은 '심플한 프리미엄'이 중요하면. 자신감 있고 세련된 브랜드." "2번은 '브랜드 네임 강화'가 중요하면. 기억에 남고 개성 있는 브랜드." "3번은 '가치관 표현'이 중요하면. 메시지가 명확하고 신뢰감 있는 브랜드." 설립자가 생각에 잠겼다. 10초. 20초. 30초. "음... 우리가 3개 중에 고르면 되나요?"선택지의 함정 좋은 질문이었다. "네, 그 3개 중에서 고르시고. 혹은 조합도 가능해요." 내가 말했다. 그런데 심장이 철렁했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면서 느낀 거다. "이 10개는 사실 선택지가 아니다." 선택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방향 가이드인데.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는 "10개 중에 고르라"는 다중선택 문제다. 타이틀이 부족했다. "로고 후보 10개"라고 하니까 후보처럼 느껴진다. 후보 중 하나를 "고르는" 느낌. 마치 회의실에 옷 10벌을 놔두고 "어떤 거 입을래?"라고 하는 느낌. 내가 하려던 건 다른 거였다. "브랜드 방향 10개"라고 했어야 한다. 다중선택이 아니라 "너희 브랜드는 이 10개 중 어느 쪽인가"를 질문하는 거다. 그러려면 설명이 달라져야 한다. "여기 10개는 10개의 다른 브랜드입니다. 1번을 고르면 그 브랜드는 이래요. 2번을 고르면 저래요." 근데 나는 뭐를 했나. "이렇게도 가능하고 저렇게도 가능하고..." 선택을 위한 선택지를 10개 제시했다. 그 결과는? 클라이언트의 머리는 좀 더 복잡해진다. 선택권은 많아진다. 근데 브랜드는 더 약해진다.많은 선택지의 대가 심리학자들이 말한다. 너무 많은 선택지는 선택 자체를 방해한다. "선택 마비(choice paralysis)" 아이스크림 30가지보다 7가지일 때 더 빨리 고르고 더 만족한다. 같은 원리다. 로고 10개를 보면, 클라이언트의 뇌는 다음을 한다. 1단계: "다 괜찮은데?" 2단계: "근데 뭐가 다른데?" 3단계: "아, 이건 이 느낌이고 저건 저 느낌이구나" 4단계: "그럼 뭐가 우리 브랜드지?" 5단계: "모르겠다. 일단 투표하자" 결국 민주주의다. 회의실 3명이 각각 고르는 로고가 다르다. "1번이 좋아요" "3번이 낫지 않나요?" "2번은?" 그리고 타협의 산물이 나온다. "1번의 심플함에 3번의 자연감을 담으면?" 그게 맞나? 아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타협의 산물이 아니다. 결정이다. "우리 브랜드는 이것이다." 그런 명확함이 나와야 한다.다시 생각해볼 것들 퇴근하고 집에 가면서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가. 클라이언트가 "로고 10개"를 요청했을 때, 나는 뭘 해야 했나. 1번 선택: 그냥 10개를 다 만든다. (나는 이걸 했다) 2번 선택: "로고는 3개만 보여드리는 게 낫습니다. 각각 다른 브랜드 철학이거든요. 10개면 브랜드가 약해져요"라고 설득한다. 차이가 뭔가. 1번은 "클라이언트 요청 수용". 2번은 "디자인 전문성 발휘". 두 개가 다르다. 9년을 일했는데, 내가 많이 한 건 1번이다. 에이전시다. 클라이언트 말을 듣는 게 직업이다. "일을 크게 벌려라"라고 배운다. 그래야 비용도 많이 나오고 프로젝트도 크다. 근데 거기서 뭔가를 잃는다. 설득력. 메시지. 명확함. 3개의 뚜렷한 방향보다, 10개의 애매한 방향이 더 "안전"하게 느껴진다. 선택권이 많으니까. 하나 떨어져도 9개가 남으니까.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게 더 위험하다. 클라이언트는 선택 아래서 갈팡질팡한다. 디자이너는 피드백을 예측할 수 없다. 누군가는 1번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3번을 좋아하니까. 수정 사이클이 길어진다. "1번의 심플함 + 3번의 느낌 + 5번의 컬러"를 섞으라는 식의 피드백. 그건 10번을 해봐도 안 나온다. "선택지를 줄여야 한다." 그게 결론이다.내일의 이메일 내일 아침, 나는 메일을 보낼 거다. 클라이언트에게. "미팅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니, 로고는 3개 방향으로 집중하는 게 낫겠습니다." "각각 다른 브랜드 철학을 명확하게 담아서, 3개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훨씬 강한 브랜드를 만듭니다." "10개 중 골라주세요보다, 이 3개 중 '너희 브랜드는 이거다'라고 결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클라이언트가 거부할 수도 있다. "아니, 10개는 어디 갔어요?" 그럼 설명한다. "로고 개수가 아니라 브랜드 철학이 중요하거든요." 이게 9년 후 배운 거다. 선택지를 많이 주는 게 아니라, 선택을 쉽게 해주는 게 디자이너의 일이다.[IMAGE_4]미팅룸 출입 횟수만 9년. 로고 "10개" 요청은 이제 웃길 일이다.너무 많은 선택지는 선택 자체를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