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리젝, 아파도 배우는 법

디자인 리젝, 아파도 배우는 법

디자인 리젝, 아파도 배우는 법

화요일 오후 3시, 메일함

메일이 왔다. 클라이언트한테.

제목: “Re: 브랜드 디자인 1차 시안 검토 결과”

클릭하기 전에 안다. 좋은 소리는 전화로 온다. 나쁜 소리는 메일로 온다.

“검토 결과, 전체적인 방향성 재검토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번역: 다 엎어.

3주 작업했다. 후보안 5개. 무드보드부터 모션 목업까지. 팀원 2명이랑 밤 세 번 샜다.

전부 리젝.

키보드 위에 손 올렸다가 뺐다. 답장 뭐라고 쓰지.

“네, 알겠습니다. 방향 다시 잡아보겠습니다.”

보냈다. 손 떤다.

첫 리젝의 기억

첫 리젝은 5년 전이었다.

신입 때. 카페 브랜딩 프로젝트. 시니어 선배가 내 시안 보더니 말했다.

“이거 트렌디하긴 한데, 5년 뒤에도 쓸 수 있어?”

못 쓴다. 지금 핫한 스타일 그대로 베꼈으니까.

“브랜드는 유행 따라가는 게 아니야. 본질 찾는 거지.”

그때는 이해 못 했다. 지금은 안다.

트렌드는 6개월이면 촌스럽다. 본질은 10년 간다.

그 프로젝트, 결국 내 안 하나도 안 들어갔다. 3개월 내내 구경만 했다.

아팠다. 되게.

리젝의 종류

리젝에도 등급이 있다.

1급: “방향성 자체가 달라요”

  • 번역: 컨셉부터 틀렸다.
  • 피해: 전체 엎음. 처음부터 다시.
  • 소요: 2주 추가.

2급: “느낌이 좀 아쉬워요”

  • 번역: 뭔지 모르겠는데 마음에 안 든다.
  • 피해: 디테일 수정 반복.
  • 소요: 일주일 왔다갔다.

3급: “거의 다 왔는데 조금만 더”

  • 번역: 사실 맘에 든다. 갑질하고 싶다.
  • 피해: 정신력.
  • 소요: 수정 3차까지.

오늘 받은 건 1급이다.

제일 아픈 거.

리젝 직후의 루틴

일단 자리에서 일어난다.

화장실 간다. 손 씻는다. 찬물로. 얼굴도 씻는다.

거울 본다. “괜찮아.”

거짓말이다. 안 괜찮다. 그래도 말한다.

휴게실 가서 커피 뽑는다. 아메리카노. 얼음 많이.

창문 앞에 선다. 5분.

생각 정리한다.

“뭐가 잘못됐지?”

클라이언트 브리프 다시 읽는다. 첫 미팅 녹취록 다시 듣는다.

놓친 게 보인다. 항상.

우리는 “젊고 트렌디하게” 에 집중했다.

근데 클라이언트는 “신뢰감 있으면서 젊게” 라고 했다.

순서가 달랐다. 신뢰가 먼저였다.

우리는 젊음을 앞세웠다. 신뢰는 뒤로 뺐다.

그래서 틀렸다.

팀 미팅, 오후 4시

팀원들 불렀다.

“리젝 왔어.”

분위기 싸늘하다.

“내 잘못이야. 브리프 해석을 잘못했어.”

막내가 말한다. “아니에요. 같이 잡은 컨셉인데요.”

고맙다. 근데 리드는 나다. 책임도 나한테 있다.

“다시 시작하자. 이번엔 신뢰감부터.”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이 브랜드의 본질이 뭐지?”

1시간 브레인스토밍.

키워드 30개 나왔다. 정리했다. 3개 남았다.

  • 오래된 것의 가치
  • 변하지 않는 약속
  • 시간이 증명하는 진심

이게 맞다. 이제 보인다.

리젝이 가르쳐준 것들

1. 클라이언트는 정답을 모른다

그들도 뭘 원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임팩트 있게요” 라고 말하지만, 임팩트가 뭔지는 모른다.

우리가 찾아줘야 한다. 그들이 말로 못 하는 걸.

2. 첫 안이 베스트는 아니다

5년 전엔 첫 안에 집착했다.

“이게 제일 좋은데 왜 몰라줘?”

지금은 안다. 첫 안은 습관이다. 내 스타일이다.

클라이언트는 내 스타일 사려는 게 아니다. 해답 사는 거다.

3. 리젝은 대화의 시작이다

예전엔 리젝을 끝으로 봤다.

지금은 시작으로 본다.

“왜 이게 아니었을까?” 에서 진짜 컨셉이 나온다.

4. 아픈 만큼 배운다

3주 날린 게 아깝다.

근데 이번에 배운 거, 다음 프로젝트에서 쓴다.

경험치는 쌓인다. 확실히.

다시, 수요일 오전

새 컨셉 잡았다.

방향 완전히 바꿨다.

트렌디한 서체 빼고, 클래식 세리프 넣었다.

컬러 톤 낮췄다. 채도 빼고 명도 올렸다.

무드보드 다시 짰다. 레퍼런스 20개 새로 찾았다.

시안 3개 뽑았다. 이번엔 확신 있다.

팀원들도 고개 끄덕인다.

“이게 맞는 것 같아요.”

맞다. 이게 맞다.

클라이언트한테 메일 보냈다.

“재검토한 방향 공유드립니다.”

금요일, 피드백

전화 왔다. 좋은 소리는 전화로 온다.

“이번 거 정말 좋네요. 2안으로 진행하고 싶어요.”

끊고 나서 팀원들한테 말했다.

“됐어.”

박수 나왔다.

근데 나는 안다. 이게 운이 아니라는 거.

화요일의 리젝이 금요일의 OK를 만들었다.

아프지 않았으면 못 찾았을 답이다.

리젝을 대하는 자세

9년 하면서 배운 거.

리젝은 실패가 아니다.

방향 수정 신호다.

리젝은 거절이 아니다.

더 나은 안 찾자는 초대장이다.

리젝은 끝이 아니다.

다음 단계로 가는 문이다.

그래도 아프다. 매번.

3주 날리면 속상하다. 당연하다.

근데 이제는 안다.

아픈 시간이 곧 성장하는 시간이라는 걸.

클라이언트 메일함에서 “Re: 재검토안 관련” 볼 때마다 심장 뛴다.

그래도 클릭한다.

도망치지 않는다.

리젝도 내 일의 일부다.

피하면 안 늘어난다.

월요일, 새 프로젝트

새 프로젝트 들어왔다.

브리프 받았다. 읽었다. 두 번 읽었다.

회의 소집했다.

“이번엔 신중하게 가자. 컨셉 잡는 데 2주 쓰자.”

막내가 물었다.

“그럼 작업 시간 부족하지 않아요?”

대답했다.

“컨셉 틀리면 3주 다시 쓴다. 지금 2주 쓰는 게 낫지.”

경험이 말하게 한다.

리젝이 가르쳐준 거.

급하게 가면 결국 돌아온다.

느리게 가도 제대로 가면 빠르다.


리젝은 아프다. 매번. 근데 그게 날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