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From
에이전시
- 28 Dec, 2025
직원 20명 에이전시의 현실, 작고 민첩하다는 것의 의미
직원 20명 에이전시의 현실, 작고 민첩하다는 것의 의미 오전 10시, 대표님이 부른다 출근했다. 커피 한 잔 마시기도 전에 대표님한테 호출됐다. "브랜드, 잠깐만." 이럴 땐 십중팔구 긴급 건이다. 회의실에 들어갔더니 신규 클라이언트 PT 제안서가 책상 위에 있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오늘이 수요일이다. "이거 우리가 해볼 만할 것 같아?" 대표님이 묻는다. 솔직히 일정은 빡빡하다. 근데 프로젝트 자체는 재밌어 보인다. 로컬 베이커리 브랜드 리뉴얼. 작지만 철학이 있는 클라이언트. "해볼 만해요." 대답했다. 대표님이 웃는다. "그럼 맡길게. 진우랑 수민이 붙여줄게." 이게 20명 에이전시다. 의사결정이 5분이면 끝난다. 대형 에이전시였으면 이런 건 회의만 세 번은 했을 거다.전략도 하고 디자인도 하고 PT도 한다 점심 먹고 돌아와서 신규 PT 준비 시작했다. 먼저 브랜드 전략부터 짜야 한다. 큰 회사였으면 전략팀이 따로 있다. 우리는? 나다. 시니어 디자이너가 전략도 짠다. 경쟁사 분석했다. 타겟 고객 정의했다. 브랜드 포지셔닝 키워드 뽑았다. 이게 2시간. 그다음 무드보드 만들기 시작했다. 레퍼런스 이미지 50장 모았다. 색상 팔레트 정리했다. 폰트 후보 추렸다. 이게 또 2시간. 오후 4시쯤 진우가 물어본다. "형, 이거 타이포 방향 어떻게 갈까요?" 주니어 디자이너 가이드도 내가 한다. 아트디렉터 역할이다. "먼저 손으로 스케치 몇 개 해봐. 디지털 작업은 그다음." 진우가 고개 끄덕이고 돌아간다. 저녁 6시. 대표님이 또 부른다. "PT 구성 어떻게 갈 거야?" PT 스토리라인 설명했다. "좋아. 근데 예산안도 같이 넣어줘." 아, 견적서도 내가 만든다. 프로젝트 타임라인 짜고, 단계별 비용 산출하고. 이게 30분. 20명 에이전시 시니어는 멀티플레이어다. 전략가, 디자이너, 아트디렉터, 기획자, 영업. 전부 다 한다. 처음엔 힘들었다. 지금은? 이게 재밌다. 한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주도한다. 오너십이 확실하다.클라이언트가 이름을 기억한다 목요일 오전. 기존 클라이언트한테 전화 왔다. "박브랜드님, 저번에 만들어주신 명함 디자인이요. 혹시 봉투도 같은 컨셉으로 가능할까요?" 이게 작은 에이전시의 장점이다. 클라이언트가 담당자 이름을 안다. 큰 회사는? "거기 담당자 분 좀 바꿔주세요." 이렇게 시작한다. 담당자가 누군지도 모른다. 프로젝트 끝나면 관계도 끝이다. 우리는 다르다. 프로젝트 끝나고도 연락 온다. 작은 수정 요청도 우리한테 온다. "박브랜드님이 우리 브랜드 제일 잘 아시잖아요." 이런 말 들으면 기분 좋다. 내가 만든 브랜드가 성장하는 걸 계속 지켜본다. 작년에 작업한 카페 브랜드. 요즘 인스타그램 보면 잘나가고 있다. 사장님이 가끔 인스타 DM 보낸다. "덕분에 잘되고 있어요." 이런 거. 큰 에이전시 다닐 땐 몰랐다. 프로젝트가 숫자였다. 지금은 관계다. 점심 먹으러 나갔다가 작년 클라이언트 만났다. "어, 박브랜드님!" 반갑게 인사한다. 같이 밥 먹었다. 새 프로젝트 이야기 나왔다. "다음에도 박브랜드님이랑 하고 싶어요." 이게 영업이다. 따로 영업팀 없어도 프로젝트가 들어온다.빠르게 움직인다는 것 금요일 아침. 어제 만든 PT 초안 내부 리뷰했다. 대표, 나, 진우, 수민. 네 명이서 30분 동안 피드백 주고받았다. "이 슬라이드 순서 바꾸자." "이 레퍼런스는 빼자." "색상 팔레트 하나 더 추가하면 어때?" 의견 나온 거 바로 적용한다. 점심 전에 수정 끝났다. 큰 회사였으면? 피드백 정리하고, 문서화하고, 다음 회의 잡고. 일주일 걸린다. 우리는 반나절이면 끝이다. 속도가 빠른 이유는 간단하다. 의사결정 라인이 짧다. 대표님한테 바로 보고한다. 중간 관리자 없다. 팀장, 본부장, 임원. 이런 거 없다. 대표님이 OK 하면 바로 진행한다. 이게 클라이언트한테도 좋다. 수정 요청 들어오면? 당일에 반영한다. "내일 오전까지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실제로 가능하다. 야근하면 된다. 20명이라 누가 뭐 하는지 다 안다. 리소스 조정도 빠르다. 작년에 큰 프로젝트 하나 있었다. 대형 에이전시랑 경쟁 PT였다. 클라이언트가 우리 선택했다. 이유를 물어봤다. "빠르고 유연할 것 같아서요. 큰 회사는 시스템은 좋은데 답답해 보였어요." 맞다. 우리는 시스템이 약하다. 근데 민첩하다. 상황에 맞춰 움직인다. 매뉴얼대로 안 한다. 클라이언트 니즈에 맞춰 프로세스를 조정한다. 이게 경쟁력이다. 모든 걸 다 봐야 한다는 압박 월요일 오전. PT 최종 점검하고 있는데 수민이가 급하게 온다. "브랜드 형, 저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목업 파일이 안 열린다고. 프로그램 버전 문제다. 10분 동안 같이 해결했다. 디자인 작업 돌아갔다가 또 호출. 이번엔 진우다. "형, 클라이언트가 급하게 수정 요청했는데 방향을 못 잡겠어요." 같이 앉아서 30분 동안 컨셉 다시 잡았다. 점심 먹고 돌아오니 대표님한테 메시지. "브랜드, 견적서 검토 좀 해줘." 신규 프로젝트 견적이다. 공수 계산하고, 일정 체크하고, 예산 조정했다. 30분 걸렸다. 오후 3시. 드디어 내 작업 시작한다. 근데 1시간 후 또 끊긴다. 클라이언트 전화. "로고 컬러 한 톤만 더 밝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30분 드릴게요." 수정했다. 메일 보냈다. 시니어 디자이너 일과가 이렇다. 내 작업 50%, 나머지 50%는 다른 사람 도와주기. 큰 회사였으면? 내 작업에만 집중한다. 주니어는 주니어 담당 선임이 본다. 견적은 PM이 한다. 역할이 명확하다. 20명 에이전시는? 역할이 겹친다. 시니어가 디자인도 하고, 멘토링도 하고, 기획도 하고, 견적도 본다. 처음엔 집중 안 돼서 힘들었다. 지금은 시간 분배를 배웠다. 오전에 집중 작업, 오후에 협업 및 피드백. 이렇게 루틴 만들었다. 근데 가끔 벅차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싶을 때가 있다. 디자이너인지 매니저인지 헷갈린다. 포트폴리오에 넣을 작업은 언제 하나 싶다. 모든 프로젝트가 내 작품이다 화요일. 지난주에 진행한 PT 결과 나왔다. 우리가 선정됐다. 팀 전체가 좋아한다. 작은 에이전시라 프로젝트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한 건 따내면 다 같이 기뻐한다. 큰 회사는? 프로젝트가 많다. 하나 따내도 별 감흥 없다. 내가 관여 안 한 프로젝트도 많다. 회사 실적이지 내 실적은 아니다. 20명 에이전시는 다르다. 모든 프로젝트를 안다. PT 준비할 때 다 같이 의견 낸다. 누가 어떤 프로젝트 하는지 다 안다. 점심 먹으면서 프로젝트 이야기한다. "너네 그거 어떻게 됐어?" "클라이언트 반응 좋았어." 이게 좋다. 소속감이 있다. 내가 회사 성장에 기여한다는 느낌. 큰 회사에선 톱니바퀴 하나였다. 여긴 엔진의 일부다. 내가 잘하면 회사가 잘된다. 내가 못하면 회사가 어렵다. 책임감이 크다. 포트폴리오도 풍부해진다. 다양한 역할 해봤으니까. 전략, 디자인, 아트디렉션, PT. 전부 경험이다. 이직할 때 유리하다. "다양한 역할 수행 가능"이 진짜가 된다. 작년에 에이전시 어워드 하나 받았다. 팀 전체가 시상식 갔다. 20명 다. 큰 회사는? 대표랑 임원 몇 명만 간다. 우리는 전부 갔다. 다 같이 축하했다. 회사 돈으로 고기 먹었다. 이런 게 작은 회사의 맛이다. 한계도 분명하다 수요일 오후. 클라이언트가 영상 브랜딩 문의했다. "모션 그래픽이랑 브랜드 필름도 같이 가능할까요?" 솔직히 애매하다. 우리 회사에 영상팀 없다. 외주 맡겨야 한다. 근데 외주 관리도 리소스다. 큰 회사는? 자체 영상팀 있다. 3D도 하고 모션도 한다. 원스톱 솔루션이다. 우리는 브랜드 디자인 특화다. 로고, 패키지, 인쇄물, 웹. 이게 메인이다. 영상은 협력사 통한다.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불편할 수 있다. 창구가 여러 개니까. 시스템도 약하다. 프로젝트 관리 툴? 노션 쓴다. 큰 회사는 전용 PM 시스템 있다. 결재 라인? 대표님한테 카톡. 큰 회사는 전자결재 시스템이다. 복지도 솔직히 약하다. 대기업처럼 복지포인트, 건강검진, 경조사비. 이런 거 없다. 있긴 한데 규모가 작다. 연봉도 대형 에이전시보다 낮다. 시니어인데 6200만원. 대형은 8000만원 이상 받는다. 안정성도 떨어진다. 프로젝트 몇 개 날아가면? 회사가 흔들린다. 큰 회사는 프로젝트 수백 개다. 몇 개 없어져도 끄떡없다. 우리는? 한 분기에 프로젝트 대여섯 개다. 하나가 크다. 작년 말에 큰 프로젝트 하나 없어졌다. 클라이언트 사정으로 보류됐다. 팀 분위기가 안 좋았다. 보너스 기대했는데 못 받았다. 이런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여기 있는 이유 목요일 저녁. 야근하고 있는데 대표님이 커피 사왔다. "다들 고생 많아." 같이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했다. 다음 분기 계획, 신규 클라이언트 전망, 회사 방향성. 큰 회사에서 이런 대화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대표 얼굴도 모른다. 전략은 위에서 내려온다. 우리는? 전략 회의에 시니어도 참여한다. 의견 낸다. 반영된다. 이게 좋다. 내가 회사를 만들어간다는 느낌. 큰 회사는 이미 만들어진 곳에 들어간다. 시스템 따라간다. 여긴? 시스템을 같이 만든다. 프로세스 개선 제안하면 바로 적용된다. 성장도 빠르다. 입사 3년 만에 시니어 됐다. 큰 회사였으면? 5년은 걸렸을 거다. 승진 적체 심하다. 여긴 실력 있으면 빨리 올라간다. 포지션도 유동적이다. "이번 프로젝트 네가 리드 해봐." 기회가 많이 온다. 자유도도 높다. 출퇴근 자율이다. 오전 10시 출근이 원칙인데 안 지켜도 된다. 재택도 필요하면 한다. 큰 회사는? 규정 엄격하다. 30분 지각하면 반차 처리. 무엇보다 사람이 좋다. 20명이라 다 안다. 이름, 성격, 작업 스타일. 점심 먹으면서 농담한다. 주말에 같이 전시회 간다. 회식도 부담 없다. 큰 회사는? 같은 층 사람도 모른다. 지난달에 진우가 처음 프로젝트 리드 했다. 떨려서 PT 전날 밤새 연습했다. 내가 같이 리허설 봐줬다. PT 잘 끝났다. 진우가 고마워했다. "형 덕분이에요." 이런 게 보람이다. 작다는 것의 의미 금요일 오전. 이번 주 프로젝트 정리하고 있다. 베이커리 브랜드 PT 준비, 기존 클라이언트 수정 작업, 주니어 멘토링, 견적서 작성, 신규 문의 응대. 일주일 동안 다섯 가지 역할 했다. 피곤하다. 근데 지루하진 않다. 매일 다른 일 한다. 똑같은 작업 반복 안 한다. 큰 회사는? 로고만 1년 내내 그린다. 시니어인데도 단순 작업 많다. 여긴? 전략부터 실행까지 다 한다. 작은 에이전시 시니어는 제너럴리스트다. 모든 걸 조금씩 한다. 큰 회사 시니어는 스페셜리스트다. 한 분야를 깊게 판다. 어느 게 좋은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제너럴리스트가 맞다. 한 가지만 계속하면 답답하다. 다양한 일 하는 게 좋다. 그래서 여기 있다. 6년째다. 언젠가는 대형 에이전시 가볼까 생각한 적 있다. 연봉도 높고, 프로젝트 스케일도 크고, 복지도 좋고. 근데 안 갔다. 여기가 편하다. 내 속도로 일할 수 있다. 클라이언트랑 관계 쌓을 수 있다. 팀원들이랑 같이 성장한다. 작다는 건 약점이다. 동시에 강점이다. 시스템은 약하지만 민첩하다. 규모는 작지만 관계는 깊다. 안정적이진 않지만 성장은 빠르다. 이게 20명 에이전시다. 점심시간이다. 팀원들이랑 같이 밥 먹으러 나간다. "오늘 뭐 먹지?" "중식?" "좋아." 이렇게 정한다. 회의 없다. 투표 없다. 그냥 걸으면서 정한다. 이것도 작은 회사라 가능한 거다.작고 민첩하다는 건, 모든 걸 다 해야 한다는 뜻이다. 동시에 모든 걸 다 경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 26 Dec, 2025
아이디어가 없는 월요일 아침
아이디어가 없는 월요일 아침 월요일 10시 15분 회의실에 들어갔다. 새 프로젝트 브리핑. 클라이언트는 화장품 스타트업. 대표는 30대 초반, 열정 가득. "자연주의인데 럭셔리한 느낌이요." 또 나왔다. 자연주의와 럭셔리. 양립 가능한가. 노트북을 켰다. 빈 Illustrator 파일. 커서만 깜빡인다. 머릿속도 깜빡인다. 주말에 성수동 전시회 세 곳 돌았다. 사진 127장 찍었다. 책방에서 디자인 매거진 네 권 샀다. 무드보드 폴더에 저장한 이미지만 52개. 그런데 지금 머릿속은 텅 비어있다. "박 디자이너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표가 물었다. 나는 웃었다. "네, 재밌는 방향이네요. 레퍼런스 좀 보고 컨셉 잡아볼게요." 재밌는 방향. 거짓말이다. 아직 아무것도 안 보인다.영감 수집의 역설 주말마다 돌아다니는 이유가 있다. 월요일 아침에 빈손으로 앉아있고 싶지 않아서. 토요일 오후 2시. 성수동 갤러리 세 곳. 첫 번째는 타이포그래피 전시. 손글씨를 3D로 변환한 작업. 사진 찍었다. 두 번째는 패키지 디자인 기획전. 친환경 소재에 미니멀 그래픽. 이것도 찍었다. 세 번째는 일러스트레이터 개인전. 자연물을 기하학으로 해석. 역시 찍었다. 책방에 갔다. 연남동 작은 곳. 신간 《브랜딩의 본질》 샀다. 일본 디자이너 인터뷰집도. 독일 포스터 아카이브도. 집에 쌓인 책만 23권인데 또 샀다. 일요일은 집에서 무드보드 정리. Figma에 폴더 만들고 이미지 분류. 색감별, 무드별, 소재별. 세 시간 걸렸다. "이번 주에 쓸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월요일 아침. 막상 프로젝트 시작하니까 그 무드보드가 안 보인다. 찾을 수가 없다. 아니, 찾았는데 맥락이 안 맞다. 영감 수집. 많이 하면 할수록 선택이 어려워진다. 역설이다.컨셉은 왜 안 나오나 회의 끝나고 자리 왔다. 오전 11시 30분. 프로젝트 폴더 만들었다. "자연주의_럭셔리_화장품_브랜딩_2024". 파일명부터 모순이다. 레퍼런스 검색 시작. Pinterest에 "natural luxury cosmetics" 쳤다. 결과 2만 개. 다 비슷하다. 베이지톤, 세리프 폰트, 미니멀 레이아웃. 클리셰다. Behance로 넘어갔다. "organic beauty branding" 검색. 역시 비슷. 초록색, 손글씨, 식물 일러스트. 이것도 클리셰. 주말에 본 전시 사진 다시 봤다. 타이포 전시. 3D 손글씨. 화장품 브랜딩이랑 무슨 연결고리가 있지? 모르겠다. 패키지 전시. 친환경 소재. 그건 알겠는데 럭셔리는 어디서 나오지? 일러스트 전시. 기하학 자연물. 흠... 이건 좀? 아니다. 억지로 끼워 맞추는 느낌. 컨셉이 안 나온다. 수집한 영감은 많은데 정작 내 것으로 만들 줄 모른다. 9년 차가 이래도 되나. 선배 디자이너가 말했다. "좋은 디자이너는 많이 보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버리는 사람이야." 맞는 말이다. 근데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모르겠다.점심시간의 발견 12시 30분. 점심 먹으러 나갔다. 회사 근처 김밥천국. 혼자 앉아서 참치김밥 먹었다. 핸드폰 봤다. 인스타그램 피드. 친구 디자이너가 올린 작업물. 로컬 베이커리 브랜딩. 단순한데 강렬하다. 댓글 달았다. "컨셉 뭐야?" 답장 왔다. "빵 먹는 순간의 행복. 그것만 생각했어." 빵 먹는 순간의 행복. 그것만. 그렇다. 나는 너무 많이 생각한다. 자연주의와 럭셔리를 양립시키려고. 트렌드를 반영하려고. 참신하려고. 차별화하려고. 정작 중요한 질문을 안 했다. "이 화장품을 쓰는 순간, 사람들이 뭘 느끼길 원하나?" 대표 말 다시 떠올렸다. "피부에 바르면서 자연이 느껴지는 건데, 동시에 나를 가꾸는 특별한 시간이었으면 좋겠어요." 자연이 느껴지는 특별한 시간. 여기다. 컨셉이 보인다. '일상 속 의식(ritual)'. 자연스러운데 신성한. 매일 하는 건데 특별한. 모순이 아니라 공존이다. 김밥 다 먹었다. 1시 10분. 회사 돌아갔다. 오후의 작업 자리에 앉았다. Illustrator 새 파일. 이번엔 커서가 움직인다. 키워드 정리. "ritual", "daily sacred", "natural ceremony". 무드보드 다시 봤다. 이번엔 보인다. 타이포 전시의 3D 손글씨. 일상적인 글씨에 차원을 더한 것. 여기서 로고 방향. 패키지 전시의 친환경 소재. 자연. 일러스트 전시의 기하학. 의식의 형식감. 연결된다. 퍼즐 맞춰지는 느낌. 레퍼런스 새로 검색. "ritual design", "sacred geometry nature". 결과가 다르다. 아까 본 것들과 다르다. 맥락이 있으니까. 스케치 시작. A4 용지 다섯 장. 로고 러프 30개. 대부분 쓰레기지만 세 개는 가능성 있다. 그중 하나는 확신 있다. 오후 4시. 팀장한테 보여줬다. "오, 방향 좋은데? 이거 더 밀어봐." 오후 6시. 컬러 팔레트 세 가지. 타이포 조합 다섯 가지. 목업에 적용. 화면 캡처. 오후 7시 30분. 초안 완성. 물론 아직 멀었다. 디테일 수정할 게 산더미. 그래도 방향은 잡혔다. 주말에 본 것들이 헛되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의 공백이 의미 있었다. 퇴근길의 생각 9시 퇴근. 지하철 탔다. 합정역까지 30분. 창밖 봤다. 반대편 플랫폼 광고판. 새 음료 브랜딩. 누가 했을까. 컨셉이 뭘까. 궁금하다. 오늘 깨달은 것. 영감 수집은 필요하다. 근데 충분하지 않다. 수집한 것을 '번역'해야 한다. 내 프로젝트의 언어로. 월요일 아침 빈 머리. 무서웠다. 9년 차인데 아직도 이렇다. 근데 생각해보니 매번 이렇다. 새 프로젝트마다 백지 상태. 그게 정상이다. 중요한 건 백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채우려고 서두르지 않는 것. 질문부터 제대로 하는 것. '뭘 보여줄까'가 아니라 '왜 보여줘야 하나'. '어떻게 만들까'가 아니라 '왜 만들어야 하나'. 합정역 도착. 10시. 집 가서 샤워하고 맥주 한 캔 마셨다. 아내는 야근. 혼자 소파에 앉았다. 내일은 화요일. 오늘 잡은 컨셉 정리해서 내부 리뷰. 수요일에 클라이언트 1차 PT. 또 수정 피드백 올 거다. "뭔가 임팩트가..." 벌써 들린다. 괜찮다. 방향은 맞았으니까. 나머지는 디테일이다. 그건 익숙하다. 핸드폰 봤다. 인스타그램. 어제 성수동에서 찍은 전시 사진. 올릴까 말까. 안 올렸다. 내 작업으로 소화할 때 의미 있는 거지. 사진만으로는 그냥 사진이다. 내일 또 백지로 시작할 거다. 새로운 브랜드, 새로운 질문. 괜찮다. 백지가 무서운 게 아니라, 백지를 채울 이유를 못 찾는 게 무섭다. 토요일 되면 또 전시회 갈 거다. 책방도. 사진 찍고 책 사고. 그게 내 루틴이다. 그게 나를 디자이너로 만든다.월요일 아침은 항상 비어있다. 그래서 채울 수 있다.
- 22 Dec, 2025
디자인 리젝, 아파도 배우는 법
디자인 리젝, 아파도 배우는 법 화요일 오후 3시, 메일함 메일이 왔다. 클라이언트한테. 제목: "Re: 브랜드 디자인 1차 시안 검토 결과" 클릭하기 전에 안다. 좋은 소리는 전화로 온다. 나쁜 소리는 메일로 온다. "검토 결과, 전체적인 방향성 재검토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번역: 다 엎어. 3주 작업했다. 후보안 5개. 무드보드부터 모션 목업까지. 팀원 2명이랑 밤 세 번 샜다. 전부 리젝.키보드 위에 손 올렸다가 뺐다. 답장 뭐라고 쓰지. "네, 알겠습니다. 방향 다시 잡아보겠습니다." 보냈다. 손 떤다. 첫 리젝의 기억 첫 리젝은 5년 전이었다. 신입 때. 카페 브랜딩 프로젝트. 시니어 선배가 내 시안 보더니 말했다. "이거 트렌디하긴 한데, 5년 뒤에도 쓸 수 있어?" 못 쓴다. 지금 핫한 스타일 그대로 베꼈으니까. "브랜드는 유행 따라가는 게 아니야. 본질 찾는 거지." 그때는 이해 못 했다. 지금은 안다. 트렌드는 6개월이면 촌스럽다. 본질은 10년 간다. 그 프로젝트, 결국 내 안 하나도 안 들어갔다. 3개월 내내 구경만 했다. 아팠다. 되게. 리젝의 종류 리젝에도 등급이 있다. 1급: "방향성 자체가 달라요"번역: 컨셉부터 틀렸다. 피해: 전체 엎음. 처음부터 다시. 소요: 2주 추가.2급: "느낌이 좀 아쉬워요"번역: 뭔지 모르겠는데 마음에 안 든다. 피해: 디테일 수정 반복. 소요: 일주일 왔다갔다.3급: "거의 다 왔는데 조금만 더"번역: 사실 맘에 든다. 갑질하고 싶다. 피해: 정신력. 소요: 수정 3차까지.오늘 받은 건 1급이다. 제일 아픈 거.리젝 직후의 루틴 일단 자리에서 일어난다. 화장실 간다. 손 씻는다. 찬물로. 얼굴도 씻는다. 거울 본다. "괜찮아." 거짓말이다. 안 괜찮다. 그래도 말한다. 휴게실 가서 커피 뽑는다. 아메리카노. 얼음 많이. 창문 앞에 선다. 5분. 생각 정리한다. "뭐가 잘못됐지?" 클라이언트 브리프 다시 읽는다. 첫 미팅 녹취록 다시 듣는다. 놓친 게 보인다. 항상. 우리는 "젊고 트렌디하게" 에 집중했다. 근데 클라이언트는 "신뢰감 있으면서 젊게" 라고 했다. 순서가 달랐다. 신뢰가 먼저였다. 우리는 젊음을 앞세웠다. 신뢰는 뒤로 뺐다. 그래서 틀렸다. 팀 미팅, 오후 4시 팀원들 불렀다. "리젝 왔어." 분위기 싸늘하다. "내 잘못이야. 브리프 해석을 잘못했어." 막내가 말한다. "아니에요. 같이 잡은 컨셉인데요." 고맙다. 근데 리드는 나다. 책임도 나한테 있다. "다시 시작하자. 이번엔 신뢰감부터."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이 브랜드의 본질이 뭐지?" 1시간 브레인스토밍. 키워드 30개 나왔다. 정리했다. 3개 남았다.오래된 것의 가치 변하지 않는 약속 시간이 증명하는 진심이게 맞다. 이제 보인다.리젝이 가르쳐준 것들 1. 클라이언트는 정답을 모른다 그들도 뭘 원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임팩트 있게요" 라고 말하지만, 임팩트가 뭔지는 모른다. 우리가 찾아줘야 한다. 그들이 말로 못 하는 걸. 2. 첫 안이 베스트는 아니다 5년 전엔 첫 안에 집착했다. "이게 제일 좋은데 왜 몰라줘?" 지금은 안다. 첫 안은 습관이다. 내 스타일이다. 클라이언트는 내 스타일 사려는 게 아니다. 해답 사는 거다. 3. 리젝은 대화의 시작이다 예전엔 리젝을 끝으로 봤다. 지금은 시작으로 본다. "왜 이게 아니었을까?" 에서 진짜 컨셉이 나온다. 4. 아픈 만큼 배운다 3주 날린 게 아깝다. 근데 이번에 배운 거, 다음 프로젝트에서 쓴다. 경험치는 쌓인다. 확실히. 다시, 수요일 오전 새 컨셉 잡았다. 방향 완전히 바꿨다. 트렌디한 서체 빼고, 클래식 세리프 넣었다. 컬러 톤 낮췄다. 채도 빼고 명도 올렸다. 무드보드 다시 짰다. 레퍼런스 20개 새로 찾았다. 시안 3개 뽑았다. 이번엔 확신 있다. 팀원들도 고개 끄덕인다. "이게 맞는 것 같아요." 맞다. 이게 맞다. 클라이언트한테 메일 보냈다. "재검토한 방향 공유드립니다." 금요일, 피드백 전화 왔다. 좋은 소리는 전화로 온다. "이번 거 정말 좋네요. 2안으로 진행하고 싶어요." 끊고 나서 팀원들한테 말했다. "됐어." 박수 나왔다. 근데 나는 안다. 이게 운이 아니라는 거. 화요일의 리젝이 금요일의 OK를 만들었다. 아프지 않았으면 못 찾았을 답이다. 리젝을 대하는 자세 9년 하면서 배운 거. 리젝은 실패가 아니다. 방향 수정 신호다. 리젝은 거절이 아니다. 더 나은 안 찾자는 초대장이다. 리젝은 끝이 아니다. 다음 단계로 가는 문이다. 그래도 아프다. 매번. 3주 날리면 속상하다. 당연하다. 근데 이제는 안다. 아픈 시간이 곧 성장하는 시간이라는 걸. 클라이언트 메일함에서 "Re: 재검토안 관련" 볼 때마다 심장 뛴다. 그래도 클릭한다. 도망치지 않는다. 리젝도 내 일의 일부다. 피하면 안 늘어난다. 월요일, 새 프로젝트 새 프로젝트 들어왔다. 브리프 받았다. 읽었다. 두 번 읽었다. 회의 소집했다. "이번엔 신중하게 가자. 컨셉 잡는 데 2주 쓰자." 막내가 물었다. "그럼 작업 시간 부족하지 않아요?" 대답했다. "컨셉 틀리면 3주 다시 쓴다. 지금 2주 쓰는 게 낫지." 경험이 말하게 한다. 리젝이 가르쳐준 거. 급하게 가면 결국 돌아온다. 느리게 가도 제대로 가면 빠르다.리젝은 아프다. 매번. 근데 그게 날 키운다.
- 16 Dec, 2025
로고 디자인은 왜 1년씩 걸리나
클라이언트가 본 로고 작업: 3일 "로고 하나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려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이 막힌다. "3일이요" 라고 하면 "그럼 300만원은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라고 온다. "3개월이요" 라고 하면 "그렇게 오래 걸려요?" 라는 반응. 정답은 둘 다다. 그리고 둘 다 아니다.클라이언트가 보는 로고 작업은 이렇다. 1차 미팅: 브리핑 듣고 방향 논의 (2시간) 2차 미팅: 컨셉 3개 발표 (1시간) 3차 미팅: 최종안 확정 (30분) 총 3시간 반. 3일이면 충분해 보인다. 실제로 클라이언트와 마주하는 시간은 그 정도다. 문제는 그 사이에 있는 시간이다. 보이지 않는 99%의 시간. 우리가 실제로 하는 것: 12개월 작년에 진행했던 프로젝트 하나. 카페 브랜드. 로고 디자인 의뢰. 클라이언트 미팅은 총 4번. 약 6시간. 실제 작업 시간은 누적 187시간. 이 숫자는 타임트래커로 확인한 것이다. 187시간이 어디로 갔나. 1단계: 리서치 (40시간) 카페 시장 조사. 경쟁사 로고 분석. 타겟 고객 라이프스타일 리서치. 비슷한 업종 해외 사례 100개 수집. 관련 서적 3권 읽음. 노트 정리. 브랜드 키워드 추출. 무드보드 제작. 클라이언트 인터뷰 3회. 녹취 정리. 이 단계에서 이미 한 달 지났다. 아직 펜을 들지도 않았다.2단계: 스케치 (60시간) 처음 한 주는 노트에만 낙서한다. 키워드에서 떠오르는 모든 형태를 그린다. 커피잔, 원두, 증기, 손글씨, 기하학. 100개쯤 그리면 패턴이 보인다. "아, 이 방향은 아니구나." 그럼 다시 50개 더 그린다. 이 중에 괜찮은 게 5개 나온다. 5개를 일러스트로 옮긴다. 옮기면서 디테일이 바뀐다. 곡선 각도, 선 굵기, 비례. 5개가 15개 배리에이션이 된다. 15개를 A4 용지에 인쇄해서 벽에 붙인다. 사흘 동안 출근할 때마다 본다. "2번이 제일 낫네. 근데 뭔가 부족해." 다시 10개 더 그린다.3단계: 정제 (50시간) 이제 진짜 작업이다. 선택된 3개 방향을 완성도 있게 만든다. 포인트는 '완성도 있게' 다. 로고는 1mm가 다르면 느낌이 달라진다. 'ㅇ' 모양 하나 만드는 데 2시간 쓴다. 정원? 타원? 어느 쪽으로 찌그러뜨릴까? 상단을 1px 올리니 가벼워 보인다. 좌측을 0.5px 당기니 안정감이 생긴다. 이런 걸 각 요소마다 반복한다. 글자 간격. 0.1pt씩 조정하면서 테스트. "너무 붙어 있나? 너무 떨어졌나?" 50번쯤 왔다갔다하면 답이 나온다. 컬러 테스트. 같은 형태에 색 100가지. RGB 한 단계 차이로 느낌이 다르다. #2A2A2A와 #2B2B2B. 일반인은 못 본다. 우린 본다. 그래서 고민한다. 4단계: 테스트 (37시간) 로고를 실제 상황에 넣어본다. 간판, 컵, 쇼핑백, 명함, 인스타그램. 각 매체마다 사이즈가 다르다. 간판에서 멋진 로고가 명함에선 뭉개진다. 그럼 디테일을 조정한다. 작은 사이즈용 버전을 따로 만든다. 흑백 버전도 만든다. 단색 버전도. 각 버전이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목업 제작. 실제 사진에 합성. "실제로 보면 이런 느낌이구나." 여기서 또 수정이 나온다. "간판에선 좋은데 컵에선 이상해." 다시 조정. 테스트. 조정. 테스트. 무한 반복. 보이지 않는 시간들 프레젠테이션 준비만 20시간. 컨셉 설명 문구 작성. 수정. 다시 작성. PT 자료 레이아웃. 순서 조정. 리허설. 혼자 발표 연습. "이 부분에서 반응이 안 좋을 것 같은데." 예상 질문 리스트 작성. 답변 준비. 클라이언트 피드백 해석하는 시간. "좀 더 임팩트 있게"가 뭔 뜻인지 파악. 3일 동안 고민. 동료들과 회의. "아, 색상을 말하는 거구나." 수정 작업. 다시 20시간. 내부 리뷰. 대표님 피드백.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다시 조정. 10시간 더.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 로고는 단순해 보인다. 선 몇 개. 글자 몇 자. "저것도 못 만들어?" 만들 수 있다. 10분이면 된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고는 브랜드의 얼굴이다. 10년 쓸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접점에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해야 한다. 단순한 게 제일 어렵다. 복잡한 건 숨길 데가 있다. 단순한 건 모든 게 드러난다. 선 하나, 각도 하나가 다 보인다. 나이키 스우시. 선 하나다. 그 선 하나 만드는 데 몇 달 걸렸을까. 애플 로고. 사과 하나다. 그 사과의 곡선을 몇 번 그렸을까. 우리가 쉽다고 느끼는 로고들. 그게 쉬워 보이는 이유는. 누군가 1년을 써서 단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클라이언트는 모른다 이 과정을 설명해도 이해 못 한다. "그냥 예쁘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니에요?" 예쁜 건 쉽다. 인스타에 널렸다. 우리가 만드는 건 '작동하는' 로고다. 10년 후에도 촌스럽지 않은 로고. 명함에도 간판에도 잘 어울리는 로고. 경쟁사와 확실히 구별되는 로고. 브랜드 가치를 정확히 전달하는 로고. 이런 걸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클라이언트는 결과만 본다. "로고 3개요? 음... 2번이 좋네요." 그 2번 뒤에 100개가 있다는 걸. 그 100개 뒤에 200시간이 있다는 걸.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딜레마 빨리 만들면 "성의 없다" 한다. 오래 걸리면 "왜 이렇게 늦냐" 한다. 비싸게 받으면 "로고 하나에 이 돈을?" 한다. 싸게 받으면 "실력이 별로구나" 생각한다. 프로세스를 설명하면 지루해한다. 설명 안 하면 "뭐 하는 거예요?" 한다. 이게 브랜드 디자이너의 숙명이다. 보이지 않는 노동. 인정받지 못하는 시간. 결과로만 평가받는 작업. 그래도 한다. 왜냐면. 그 1년이 만든 로고 하나가. 브랜드를 10년 먹여 살리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1년이다 정확히는 1년이 아니다. 프로젝트마다 다르다. 2주 만에 끝나는 것도 있다. 6개월 걸리는 것도 있다. 평균하면 3개월쯤. 하지만 그 3개월 안에. 지난 9년의 경험이 들어간다. 봐왔던 수천 개의 로고. 실패했던 수백 개의 시도. 배웠던 디자인 원리. 쌓아온 안목. 이 모든 게 로고 하나에 들어간다. 그래서 로고는 시간이 아니라 경험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클라이언트한테 설명하면. "그건 당신 공부 시간이잖아요" 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할 말이 없다. 그냥 만든다. 보여준다. "와, 좋네요" 하면 끝이다. 그 뒤의 1년은. 우리만 안다.로고 3개 PT 준비하러 간다. 밤샐 것 같다.
- 14 Dec, 2025
크레용 빨강 vs 브랜드 레드의 미묘한 차이
크레용 빨강 vs 브랜드 레드의 미묘한 차이 클라이언트: "빨강으로 해주세요" 또 시작이다. "로고 빨간색으로 하면 어떨까요?" 회의실에 앉은 클라이언트 대표님이 말했다. 좋다. 빨강. 나쁘지 않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어떤 느낌의 빨강을 원하세요?" 내가 물었다. 대표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냥... 빨강이요. 빨간색이요."500개가 넘는다. Pantone 레드 계열만. RGB로 표현 가능한 빨강은 수십만 개다. 그중 브랜드에 쓸 수 있는 건 30개 정도. 그중 이 브랜드에 맞는 건 3개.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건 하나다. 문제는 클라이언트도 뭘 원하는지 모른다는 거다. 내가 준비한 빨강 5개 다음 회의 때 가져갔다. 빨강 5개.Pantone 185C: 코카콜라 레드. 클래식. 강렬. 대중적. Pantone 1795C: 오렌지 기운 있는 레드. 젊고 활발함. Pantone 207C: 마젠타 섞인 레드. 고급스럽고 여성적. Pantone 7621C: 다크 레드. 와인 느낌. 프리미엄. Pantone 186C: 맨유 레드. 정열적. 스포티.각각 브랜드 샘플 붙여서 무드보드 만들었다. A3 용지 5장. 인쇄비만 3만원. "음... 다 비슷한데요?" 대표님이 말했다. 비슷하지 않다. 전혀.185C와 186C는 1도 차이다. 육안으로 거의 구분 안 된다. 근데 브랜드 적용하면 완전히 다르다. 185C는 '신뢰'다. 186C는 '열정'이다. 1도가 감정을 바꾼다. 크레용 빨강의 세계 클라이언트는 크레용 세트에서 자랐다. 12색, 24색, 많아야 36색. 빨강은 하나였다. 주황 아니고 분홍 아닌 그 하나. '빨강'이라는 단어가 하나의 색을 가리켰다. 그게 문제다. 디자이너는 다른 세계에서 자랐다. Pantone 책에서. Adobe RGB에서. CMYK 색분해에서. 빨강은 스펙트럼이다. 좌표다. 맥락이다. "따뜻한 빨강요? 차가운 빨강요?" 클라이언트는 멈췄다. 빨강이 따뜻하고 차가울 수 있다는 걸 처음 들었다. "빨강은 뜨거운 거 아니에요?" 아니다. 마젠타 섞인 빨강은 차갑다. 파랑 기운 있어서. 반대로 오렌지 섞인 빨강은 따뜻하다. 노랑 기운. 같은 '뜨거움'도 다르다. 불꽃 뜨거움이냐 열기 뜨거움이냐. 이 차이가 브랜드 인상을 만든다. 코카콜라가 그 빨강인 이유 185C다. Pantone 185C. 왜 하필 185C냐고 물으면 대답은 간단하다. 100년 썼으니까. 근데 처음엔 왜 선택했을까. 1886년 코카콜라 탄생. 당시 약국에서 팔았다. 시럽 형태. 병에 담았다. 경쟁자는 Pepsi가 아니라 다른 약들이었다. 약병은 대부분 갈색, 투명, 초록이었다. 차별화가 필요했다. 빨강을 선택했다. 근데 어떤 빨강? 너무 밝으면 싸 보인다. 너무 어두우면 약 같다. 오렌지 기운 있으면 어린애 음료 같다. 정답은 '순수한 빨강'이었다. RGB(227, 6, 19). CMYK(0, 97, 92, 0). C=0이다. 시안 0%. 청록색 기운이 전혀 없다. M=97. 마젠타 거의 풀. Y=92. 노랑도 거의 풀. 이게 만드는 빨강이 '정열적이면서 신뢰할 수 있는' 빨강이다. 100년 후 사람들은 그냥 '코카콜라 빨강'이라고 부른다.브랜드 레드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전략적 선택. 100년의 일관성. 크레용 빨강은 그냥 빨강이다. "좀 더 임팩트 있게요" 4차 수정 피드백이었다. "이 빨강, 좀 더 임팩트 있게 할 수 있을까요?" 있다. 채도 올리면 된다. S+10. 근데 물었다. "어떤 방향의 임팩트요? 강렬함? 세련됨? 에너지?" "음... 다요." 안 된다. 다는 없다. 강렬함 원하면 어두운 빨강이다. Value 낮추고 Saturation 올린다. Pantone 1807C 쪽. 세련됨 원하면 차가운 빨강이다. 마젠타 믹스. 207C 방향. 에너지 원하면 따뜻한 빨강이다. 오렌지 터치. 1795C. 세 개 다 '임팩트'있다. 근데 완전히 다른 브랜드 된다. "일단 다 해볼까요?" 클라이언트가 말했다. 했다. 3개 버전. 각각 로고, 명함, 쇼핑백 목업.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첫 번째 거요." 원래 안이었다. 1mm가 만드는 브랜드 산맥 Pantone 책 펼친다. Red 섹션. 186C 옆에 185C 있다. 육안으로 거의 같다. 근데 브랜드 적용하면 다르다. 186C: Manchester United, 서울시 로고, 하이네켄 스타 185C: Coca-Cola, Supreme, Levi's 왜 각자 그 색 선택했을까. 우연일까. 아니다. 맨유는 열정이 브랜드 코어다. 186C가 185C보다 미세하게 더 따뜻하다. Y값이 2% 높다. 그 2%가 '불타는 열정' 만든다. 코카콜라는 신뢰가 필요하다. 식음료니까. 185C가 186C보다 미세하게 더 순수하다. 균형잡혀있다. 그게 '믿을 수 있는 즐거움' 된다. 1mm다. CMYK 2% 차이. RGB 5포인트 차이. 이 1mm가 브랜드 산맥 만든다. 한쪽은 열정 산맥. 한쪽은 신뢰 산맥. 소비자는 의식 못 한다. 근데 느낀다. 클라이언트가 본 건 결과뿐 문제는 이거다. 클라이언트는 결과만 본다. 완성된 로고. 적용된 간판. 찍힌 명함. 과정은 안 본다. 왜 이 빨강인지. 왜 저 빨강 아닌지. "이 빨강이랑 저 빨강 차이가 뭐예요?" 설명한다. 10분. 색상환. 색온도. 브랜드 레퍼런스. 타겟 감성. 끝나고 나면 대표님이 말한다. "그래서 뭐가 더 좋은 건데요?" 더 좋은 게 아니다. 더 맞는 거다. 근데 '맞음'을 설명하기 어렵다. 감각이니까. 맥락이니까. "일단 이걸로 가시죠. 나중에 수정 가능하니까." 가능하다. 근데 안 한다. 사람들은 익숙해진다. 처음 본 빨강이 '우리 빨강' 된다. 1년 후 리브랜딩 제안하면 대표님이 말한다. "우리 빨강 바꾸는 거예요? 이거 우리 상징인데." 그래서 첫 선택이 중요하다. 빨강의 정치학 회의실 정치가 있다. "대표님은 이 빨강 좋아하세요." 마케팅 팀장이 말한다. 207C 가리키며. "근데 전 이게 낫다고 봐요." 디자인 팀장이 1795C 가리킨다. 나는 185C 밀고 있었다. 투표가 시작된다. 7명 회의. 민주적으로 결정하자고. 결과: 207C 4표, 185C 2표, 1795C 1표. 민주주의가 이겼다. 브랜드는 졌다. 207C는 이 브랜드에 안 맞는다. 타겟이 2030 남성인데 207C는 여성적이다. 마젠타 기운 강해서. 근데 대표님 딸이 좋아한다고 했다. 대학생. 딸 의견이 4표 만들었다. 설득했다. 20분. 타겟 분석. 경쟁사 색상. 적용 시뮬레이션. 결국 185C로 갔다. 대표님이 말했다. "처음부터 전문가 의견 따를 걸 그랬네요." 그럼 회의는 왜 했나. 브랜드 레드를 만드는 3시간 실제 작업 과정이다. 1시간: 브랜드 코어 분석. 핵심 가치 3개 추출. 감성 키워드 10개. 이걸 색으로 번역. 30분: 경쟁사 색상 분석. 업계 색상 트렌드. 차별화 포인트 찾기. 30분: 타겟 리서치. 이 세대가 선호하는 색온도. 문화적 맥락. 1시간: 후보 색상 10개 선정. Pantone, RGB, CMYK 좌표 정리. 각각 A4 컬러 출력. 30분: 로고 목업 제작. 10개 색상 각각 적용. 명함, 간판, 패키지 시뮬레이션. 30분: 최종 3개 선정. PT 자료 정리.3시간이다. 클라이언트는 10분 본다. "다 비슷한데요?" 비슷하지 않다. 각각 다른 전략이다. 다른 감정이다. 다른 미래다. 근데 설명 못 하면 '그냥 빨강' 된다. 색맹 테스트의 역설 재밌는 거 있다. 색맹 테스트 해보면 대부분 통과한다. 적록색맹 아니고 청황색맹 아니고. 근데 빨강 10개 놓고 구분하라면 못 한다. 훈련 안 된 눈은 2-3개로 그룹핑한다. "이건 밝은 빨강, 이건 어두운 빨강, 이건 분홍 같은 빨강." 디자이너 눈은 10개 다 구분한다. 훈련됐으니까. 역설이다. 생리적으로 정상인데 문화적으로 색맹이다. 클라이언트가 나쁜 게 아니다. 안 배웠을 뿐. 디자이너 역할이 여기 있다. 번역. 클라이언트가 느끼는 걸 색으로. 색을 전략으로. "이 빨강이 우리 브랜드를 이렇게 만들 겁니다." 3초 안에 설득 못 하면 진다. 프린터가 만드는 변수 더 복잡한 게 있다. 모니터에서 본 빨강 ≠ 프린터에서 나온 빨강 ≠ 간판에 적용된 빨강. RGB는 빛이다. 가산혼합. 섞을수록 밝아진다. CMYK는 잉크다. 감산혼합. 섞을수록 어두워진다. 같은 빨강 코드여도 출력 매체마다 다르다. 모니터 RGB(227, 6, 19) = Pantone 185C 프린터 CMYK(0, 97, 92, 0) = Pantone 185C 근데 프린터마다 다르다. HP는 약간 주황빛. Canon은 약간 자주빛. 간판은 또 다르다. LED 백라이트냐 형광등이냐에 따라. 실제 간판 달고 나면 대표님이 전화한다. "색이 다른데요?" 다르다. 당연히. 빛이니까. "그럼 이거 잘못된 거 아니에요?" 아니다. 이게 맞다. Pantone 185C 맞다. 근데 모니터에서 봤던 그 빨강 아니다. 설명한다. 10분. 가산혼합, 감산혼합, 색온도. 끝나면 대표님이 말한다. "그럼 처음에 간판 색으로 보여주시지." 불가능하다. 간판은 밤에 켜봐야 안다. 문화마다 다른 빨강 한국 빨강 ≠ 중국 빨강 ≠ 일본 빨강. 한국은 Pantone 186C 선호한다. 태극기 빨강. 익숙해서. 중국은 1788C. 더 진하고 어둡다. '중국홍' 전통. 황제 권위. 일본은 185C. 한국보다 약간 밝다. 히노마루 일장기. 글로벌 브랜드 하면 이거 고려해야 한다. 한국에서 잘 먹힌 빨강이 중국 가면 '싸 보인다'. 중국 빨강이 한국 오면 '무겁다'. 작년에 했던 프로젝트. 한중일 동시 론칭. 빨강 3개 버전 만들었다. 같은 브랜드. 다른 색상 코드.한국: 186C (C:0 M:95 Y:91 K:0) 중국: 1788C (C:0 M:100 Y:91 K:20) 일본: 185C (C:0 M:97 Y:92 K:0)육안으로 거의 구분 안 된다. 근데 각국에서 반응 달랐다. 한국: "우리 느낌이네요." 중국: "대기업 같아요." 일본: "깔끔하네요." 같은 브랜드가 다르게 읽힌다. 1mm 차이로. AI가 못 하는 것 요즘 AI 툴 많다. "브랜드 컬러 추천해드려요." 키워드 넣으면 팔레트 나온다. "혁신, 신뢰, 열정" 입력하면 빨강 3개 제시. 편하다. 빠르다. 근데 못 한다. 맥락 읽기. AI는 185C가 왜 코카콜라 빨강인지 모른다. 100년 역사 모른다. 경쟁사와의 1도 차이 전략 모른다. 키워드만 본다. "식음료 + 신뢰 = 185C" 근데 실제는 이렇다. "1886년 약국 시럽 + 경쟁자 갈색병 + 차별화 필요 + 청량감 + 100년 일관성 = 185C" 맥락이 색을 만든다. AI는 숫자 줄 수 있다. 근데 이유는 못 준다. 디자이너는 이유 판다. 클라이언트는 이유 산다. "왜 이 빨강인가요?" 3분 설명할 수 있으면 디자이너다. 못 하면 픽셀 푸셔. 10년 후에도 빨강일까 브랜드 레드는 진화한다. 코카콜라 185C, 100년 넘게 썼다. 근데 미세하게 바뀌었다. 1950년대 185C ≠ 2024년 185C. 인쇄 기술 바뀌었다. 모니터 생겼다. LED 생겼다. 같은 코드여도 구현 방식 달라지면 색 달라진다. 브랜드는 적응한다. 미세 조정한다. 소비자는 모른다. 그냥 "코카콜라 빨강" 본다. 10년 후엔 또 바뀔 것이다.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나오면. VR 보편화되면. 빨강의 정의가 바뀐다. 근데 '코카콜라 빨강'은 남는다. 브랜드 레드는 코드가 아니라 인상이니까. 크레용에서 Pantone까지 결국 이거다. 클라이언트는 크레용 12색 세계에서 산다. 빨강은 하나다. 디자이너는 Pantone 2000색 세계에서 산다. 빨강은 스펙트럼이다. 브랜드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내 역할은 번역이다. 클라이언트가 상상하는 빨강을 Pantone 좌표로. 그 좌표를 브랜드 미래로. "그냥 빨강으로 해주세요." 괜찮다. 시작점이다. "어떤 빨강일까요?" 질문이 답을 만든다.185C와 186C, 1도 차이. 그 1도가 100년 브랜드 만든다.
- 10 Dec, 2025
출근 후 가장 먼저 하는 일 - 클라이언트 메일 확인의 심리학
출근 후 가장 먼저 하는 일 - 클라이언트 메일 확인의 심리학 10시, 회사 앞 출근했다. 10시 2분. 늦은 건 아니다. 에이전시는 자유롭다. 9시 출근 강요 안 한다. 대신 야근도 자유다. 어제 밤 11시에 퇴근했으니 10시면 양심적이다. 엘리베이터 안. 휴대폰 확인 안 했다. 일부러. 사무실 도착 전까지는 현실 유예 시간이다. 커피 들고 있으면 출근한 것 같지 않다. 착각이지만 필요한 착각이다. 5층 도착. 문 열고 들어간다. 직원들 반 정도 왔다. 10시 30분까지는 다 온다. 내 자리로 간다. 맥북 켠다. 부팅 소리. 이제부터가 진짜 출근이다.메일함을 여는 순간 아웃룩 실행. 로딩 중. 심호흡 한 번. 매일 하는 의식이다. 메일함이 열린다. 읽지 않은 메일 14개. 어제 저녁 이후 쌓인 것들이다. 제목만 훑는다. 발신자 확인한다. 누가 보냈는지가 중요하다. 김대리(클라이언트) - "Re: 로고 시안 검토 결과" 박부장(클라이언트) - "브랜드북 수정 요청 건" 이실장(내부) - "오늘 회의 안건" 정대표(클라이언트) - "좋았습니다!" 마지막 메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좋았습니다!" 이 한 줄. 오늘 하루 색깔이 정해진다. 정대표 메일부터 연다. 역순이다. 좋은 것부터 보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어제 보내주신 컨셉 방향 좋았습니다. 팀 내부에서도 반응 좋고요. 1안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에 뵙죠." 54자. 짧지만 충분하다. 가슴이 뜨겁다는 게 이런 거다. 한 달 동안 리서치하고 컨셉 잡았다. 무드보드 세 번 갈아엎었다. 어제 PT 전날 밤 12시까지 키노트 다듬었다. 그 모든 게 "좋았습니다" 네 글자로 보상받는다.수정 요청의 온도 기분 좋을 때 나쁜 소식 봐야 한다. 감정 관리. 김대리 메일. "Re: 로고 시안 검토 결과". Re가 붙었다는 건 대화가 이어진다는 뜻이다. 클릭. "안녕하세요. 검토했습니다. 전체적으로 괜찮은데 몇 가지 수정 부탁드립니다." 몇 가지. 이 단어가 무섭다. 경험상 '몇 가지'는 최소 다섯 가지다. 스크롤 내린다. "1. 로고 컬러를 좀 더 밝게 해주세요. 지금은 너무 무겁습니다. 2. 폰트를 고딕으로 바꿔주세요. 명조는 올드해 보입니다. 3. 심볼 크기를 키워주세요. 임팩트가 약합니다. 4. 전체적으로 모던하게 가능할까요? 5. 아, 그리고 후보안 3개 더 보고 싶습니다." 다섯 개. 예상 적중. 한숨 나온다. 입 밖으로는 안 나온다. 사무실에서 한숨 쉬면 옆자리가 묻는다. "무슨 일 있어?" 설명하기 귀찮다. 4번이 문제다. "모던하게". 이 단어만큼 추상적인 주문이 없다. 사람마다 모던의 정의가 다르다. 김대리 머릿속 모던과 내 머릿속 모던이 같을 확률은 30%다. 그래도 괜찮다. 수정 요청은 일의 일부다. 피드백 없는 프로젝트는 없다. 중요한 건 톤이다. 김대리 메일은 정중하다. '부탁드립니다'가 두 번 나온다. 존중받는 느낌. 이 정도면 할 만하다.박부장의 메일 다음. 박부장 메일. 제목만 봐도 안다. 이 사람은 다르다. 클릭. "브랜드북 봤는데요. 솔직히 기대 이하네요. 이게 3주 작업물입니까? 전체적으로 다시 해주세요. 컨셉부터 이해가 안 갑니다." 마침표가 칼이다. 물음표는 비수다. '솔직히'라는 단어. 이건 방패다. '솔직히'를 앞세우면 뭘 말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예의는 없어진다. '이게 3주 작업물입니까?' 반말 의문문. 존중 제로. '전체적으로 다시'. 이 네 글자가 제일 무섭다. 부분 수정이 아니다. 전체 리셋이다. 3주가 증발한다. 키보드 위에 손 올린다. 답장 버튼 누르지 않는다. 지금 쓰면 안 된다. 감정이 들어간다. 창 닫는다. 일단 묵힌다. 오후에 쓴다. 그때도 화나면 내일 쓴다. 박부장 같은 클라이언트가 있다. 항상 있다. 프로젝트 10개 중 2개는 박부장을 만난다. 확률의 문제다. 이런 메일이 아침에 오면 하루가 무너진다. 점심 입맛 없다. 오후 작업 집중 안 된다. 퇴근 후에도 생각난다. 그래서 순서가 중요하다. 정대표 메일을 먼저 본 게 신의 한 수다. 긍정 에너지가 충전됐다. 박부장 메일을 받아낼 힘이 생겼다. 메일의 심리학 9년 했다. 메일 읽는 순서에 법칙이 생겼다. 1. 제목으로 분류한다 긍정(칭찬, 승인, 계약), 중립(회의, 공지, 일정), 부정(수정, 거절, 컴플레인). 2. 긍정부터 읽는다 기분 좋을 때 나쁜 소식 소화된다. 반대는 안 된다. 아침에 박부장 메일 먼저 보면 하루 망한다. 3. 부정은 천천히 바로 답장 안 한다. 최소 2시간 묵힌다. 감정 가라앉힌다. 프로페셔널하게 응대한다. 4. 중립은 나중에 회의 안건, 공지는 급하지 않다. 업무 시작하고 처리한다. 이 순서 지키면 멘탈 관리된다. 아침 메일이 하루 톤을 정한다. 첫 메일이 긍정이면 오후까지 간다. 첫 메일이 부정이면 점심 전에 무너진다. 메일은 텍스트지만 감정이다. 53자가 기쁨이 되고, 127자가 분노가 된다. 같은 내용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다. "수정 부탁드립니다" vs "다시 해주세요". 의미는 같다. 받는 기분은 다르다. 클라이언트는 모른다. 자기 메일 한 통이 디자이너 하루를 좌우한다는 걸. 아침 10시에 보낸 메일이 오후 6시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걸. 답장을 쓰는 시간 정대표에게 먼저 답장한다. "감사합니다. 좋은 방향으로 함께 만들어가요. 화요일 뵙겠습니다." 34자. 짧게. 감사 표현하고 끝. 길게 쓸 필요 없다. 좋은 관계는 간결하다. 김대리 메일. 수정 요청 다섯 개. "검토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방향으로 수정해서 목요일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추가 후보안 3개 함께 준비하겠습니다." 존중받았으니 존중한다. '~겠습니다'를 세 번 썼다. 프로페셔널한 거리 유지. 박부장 메일은 안 연다. 오후 3시에 쓴다. 지금은 아니다. 내부 메일 확인한다. 이실장. "오늘 회의 안건". "오전 11시 - 신규 클라이언트 브리핑 오후 2시 - A프로젝트 중간 점검 오후 4시 - 디자인 리뷰" 회의 세 개. 표준적인 화요일이다. 메일 확인 끝. 시간 확인. 10시 47분. 45분 걸렸다. 아침 메일 확인은 루틴이다. 커피 한 잔 하면서 천천히. 급하게 하면 놓친다. 중요한 건 놓치고 급한 것만 본다. 메일은 업무의 시작이다. 오늘 뭘 해야 하는지 정리된다. 우선순위가 보인다. 클라이언트 심리가 읽힌다. 메일 너머의 관계 박부장 메일 다시 생각한다. 화가 나지만 이해는 된다. 박부장도 위에서 받는다. 임원한테 보고했다가 털렸을 거다. "이게 뭐야?" 들었을 거다. 그 스트레스가 내게 온다. 폭포수다. 임원 → 박부장 → 나. 박부장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못된 메일 쓰는 사람일 뿐이다. 대면하면 괜찮다. 미팅 때는 웃는다. 메일에서만 칼 같다. 텍스트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다. 얼굴 안 보면 예의 잊는다. 목소리 안 들리면 감정 못 읽는다. "전체적으로 다시 해주세요" 이 문장. 대면에서는 못 한다. 미팅에서 내 눈 보면서 "3주치 다시 하세요" 못 말한다. 메일은 방패다. 화면 뒤에 숨어서 쏜다. 상처 안 보인다. 표정 확인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전화 건다. 메일로 주고받다가 꼬이면 전화한다. 5분 통화가 10통 메일을 대체한다. "박부장님, 메일 확인했습니다. 어떤 부분이 기대와 달랐는지 통화로 여쭤봐도 될까요?" 이렇게 시작한다. 목소리 들으면 달라진다. 톤 부드러워진다. "아 그게 아니고요..." 설명 시작한다. 결국 사람이다. 텍스트 아니고 사람이다. 메일 너머에 누군가 있다. 그 사람도 스트레스받고 피곤하고 실수한다. 메일이 정하는 하루 11시 회의 시작. 신규 클라이언트 브리핑. 화장품 브랜드다. 런칭 준비 중이다. 로고, 패키지, 브랜드북 전체. 대표님이 설명한다. "자연주의 콘셉트입니다. 타겟은 30대 여성이고요..." 듣는다. 메모한다. 그런데 집중이 안 된다. 머릿속에 박부장 메일이 맴돈다. "전체적으로 다시". 이 네 글자가 뇌를 점령했다. 고개 끄덕인다. 알아듣는 척한다. 실제로는 50%만 들린다. 회의 끝. 1시간 걸렸다. 나온다. 점심시간. 식당 간다. 동료 셋이서. 파스타 먹는다. "요즘 어때?" 후배가 묻는다. "그냥. 할 만해." 대답한다. 거짓말이다. 할 만하지 않다. 박부장 프로젝트가 발목 잡는다. 3주치 다시 하려면 밤샘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말 안 한다. 말하면 현실이 된다. 불평하면 에너지 빠진다. 파스타가 안 넘어간다. 입맛 없다. 역시 아침 메일이 영향을 미친다. 오후 2시. A프로젝트 중간 점검. 순조롭다. 클라이언트 만족도 높다. 수정 요청 적다. 왜 이렇게 차이 나나. 같은 우리 팀이 작업했다. 프로젝트 난이도도 비슷하다. 클라이언트다. 결국 사람이다. 박부장과 A사 담당자는 다르다.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이 다르다. 존중의 유무가 다르다.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일이 즐겁다. 디자인 퀄리티도 올라간다. 서로 신뢰하면 모험할 수 있다. 시도하고 실험하고 깨뜨린다. 나쁜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일이 지옥이다. 움츠러든다. 안전한 것만 제안한다. 거절당할까 봐 평범하게 간다. 메일 한 통이 관계를 만든다. 관계가 결과물을 만든다. 오후 4시, 디자인 리뷰 팀 내부 리뷰 시간. 각자 작업물 공유한다. 피드백 주고받는다. 내 차례. 박부장 프로젝트 브랜드북 보여준다. "클라이언트가 전체 수정 요청했어요. 컨셉부터 다시 잡으래요." 팀장이 본다. 스크롤 내린다. "왜? 이거 괜찮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클라이언트 생각은 달라요." "어떤 피드백 받았어?" 박부장 메일 보여준다. 팀장이 읽는다. "아... 이분이구나." 팀장도 안다. 박부장 타입을. 이런 클라이언트 있다는 걸. "통화해봤어?" "아직이요." "전화해. 메일로 하지 말고. 정확히 뭘 원하는지 확인해." 조언이다. 좋은 조언이다. 리뷰 끝. 자리 돌아온다. 박부장한테 전화한다. 두 번 신호음. 받는다. "네, 박부장입니다." "안녕하세요, 박브랜드입니다. 오전에 보내주신 메일 확인했습니다. 통화 가능하신가요?" "네, 말씀하세요." 목소리 듣는다. 메일이랑 다르다. 덜 날카롭다. "어떤 부분이 기대와 다르셨는지 구체적으로 여쭤봐도 될까요? 정확히 수정해드리고 싶어서요." "아... 그게 말이죠." 설명 시작한다. 10분 동안. 들으면서 메모한다. 구체적인 포인트들 나온다. '전체 수정'이 아니었다. 세 가지 섹션이 문제였다. 나머지는 괜찮다고 한다. "컨셉 자체는 좋았어요. 근데 표현 방식이 저희 타겟이랑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이해된다. 메일에선 안 보였던 게 통화에서 보인다. "알겠습니다. 그럼 컨셉은 유지하되 표현 방식을 타겟에 맞춰서 조정하면 되겠네요." "네, 그렇게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목소리 밝아진다. 메일 쓸 때랑 다른 사람이다. 전화 끊는다. 가슴이 편해진다. '전체 수정'이 '부분 조정'으로 바뀌었다. 3주가 3일로 줄었다. 메일의 무게 퇴근 시간. 7시. 오늘은 일찍 간다. 야근 없다. 맥북 정리한다. 내일 할 일 리스트 작성한다.김대리 로고 수정안 3종 박부장 브랜드북 부분 조정 신규 클라이언트 컨셉 리서치 시작할 만하다. 집 가는 길. 지하철 탄다. 휴대폰 본다. 메일 알림 두 개. 심장 빨리 뛴다. 조건반사다. 확인한다. 하나는 뉴스레터. 하나는 내부 공지. 안심한다. 클라이언트 아니다. 메일이 주는 긴장감. 이게 일상이 됐다. 알림 뜰 때마다 조금씩 떨린다. 좋은 소식일까, 나쁜 소식일까. 9년 했지만 익숙하지 않다. 매번 열 때마다 심장 뛴다. 메일은 가볍지 않다. 텍스트는 무게가 없지만 내용은 무겁다. 53자가 하루를 바꾼다. 127자가 일주일을 바꾼다. 클라이언트는 모른다. 자기가 보낸 메일의 무게를. 디자이너는 안다. 매일 아침 10시에 체감한다. 출근 후 첫 번째 일. 클라이언트 메일 확인. 이게 하루의 톤을 정한다. 기분을 좌우한다. 에너지를 충전하거나 소진한다. 그래서 나는 순서를 지킨다. 좋은 것부터 본다. 나쁜 것은 천천히. 중립은 나중에. 심리학이다. 감정 관리다. 생존 전략이다. 9년의 노하우다.오늘도 메일 14개 확인했다. 내일도 똑같을 거다. 하지만 괜찮다. 정대표 메일 같은 게 하나씩 있으니까.
- 09 Dec, 2025
무드보드 만들 때 가장 행복한 이유
월요일 오전 10시 출근했다. 노트북 켰다. 오늘부터 새 프로젝트다. 클라이언트는 신생 디저트 브랜드. 키워드는 '따뜻한', '수제', '정성'. 흔하다. 하지만 좋다. 시작할 수 있으니까. 메일함에 레퍼런스 20개. 훑어봤다. 다 비슷하다. 파스텔톤, 손글씨 느낌, 크래프트지. 예상했다. 팀장이 물었다. "언제까지 컨셉 나올 것 같아?" "이번 주 금요일이요." 속으로는 수요일에 끝낼 생각이다. 무드보드 만들 시간이 필요하니까.핀터레스트를 열 때 핀터레스트 켰다. 로그인했다. 비공개 보드 새로 만들었다. 이름은 'Dessert_Brand_241208'. 검색창에 'artisan dessert'를 쳤다. 이미지가 쏟아진다. 스크롤한다. 저장한다. 또 스크롤한다. 또 저장한다. 10분 지났다. 이미지 32개. 아직 멀었다. 'craft packaging', 'warm color palette', 'handmade aesthetic', 'cozy cafe interior'. 검색어를 바꿔가며 계속한다. 점심시간이 됐다. 배고프지 않다. 계속한다. 동료가 밥 먹자고 했다. "조금 있다가요." 대답하고 계속 스크롤한다. 이 시간이 좋다. 아무도 뭘 물어보지 않는다. 클라이언트 전화도 없다. 그냥 나와 이미지만 있다.이미지를 고르는 기준 저장한 이미지 78개. 많다. 줄여야 한다. 다시 본다. 하나씩 클릭한다. 이 이미지는 왜 골랐지? 색깔? 질감? 분위기? 답이 명확한 건 남긴다. 애매한 건 뺀다. 베이지 배경에 크림 얹은 타르트 사진. 좋다. 색이 따뜻하다. 질감이 살아있다. 남긴다. 미니멀한 흰색 패키징 사진. 깔끔하다. 하지만 차갑다. 우리 브랜드랑 안 맞는다. 뺀다. 손글씨 타이포그래피. 너무 흔하다. 하지만 '수제' 느낌은 확실하다. 일단 남긴다. 나중에 다시 볼 거다. 30분 지났다. 이미지 42개로 줄었다. 이 과정이 좋다. 내 취향이 아니라 브랜드 취향을 만드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블랙은 이번 프로젝트에 없다. 대신 따뜻한 오렌지와 크림색만 남았다. 피그마에 정리할 때 피그마 켰다. 새 파일. 이름은 'Moodboard_Dessert'. 프레임 만들었다. 1920x1080. 배경은 연한 아이보리. 저장한 이미지를 하나씩 드래그한다. 피그마 안으로. 배치한다. 크기 조절한다. 겹친다. 떨어뜨린다. 다시 모은다. 처음엔 질서 없다. 그냥 놓는다. 느낌대로. 10개 정도 놓으니까 보인다. 어떤 색이 많은지. 어떤 질감이 반복되는지. 크림색 많다. 베이지도. 오렌지는 포인트로. 질감은 종이 질감, 크림 질감, 나무 질감. 타이포그래피 추가한다. 세리프체 3개, 손글씨체 2개, 산세리프 1개. 폰트 이름 적어둔다. 나중에 쓸 거다. 배치 다시 한다. 색 순서대로. 왼쪽은 밝은 색, 오른쪽은 포인트 컬러. 한 시간 지났다. 보드가 모양 갖췄다.텍스처 파일을 뒤질 때 텍스처가 필요하다. 크래프트지, 린넨 천, 거친 종이. 외장하드 꺼냈다. 'Texture_Library' 폴더 열었다. 5년 치 텍스처가 있다. 스크롤한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다 좋다. 크래프트지 텍스처 12개 골랐다. 피그마에 올린다. 투명도 조절한다. 20%쯤. 배경으로 깐다. 분위기 달라진다. 따뜻해진다. 손맛 느껴진다. 동료가 지나가다 봤다. "오, 분위기 좋은데요?" 고맙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컬러칩 만든다. 이미지에서 스포이트로 색 뽑는다. 헥사코드 복사한다. 정리한다. 메인 컬러: #F4E8D8 (크림 베이지)서브 컬러: #E8B89A (따뜻한 오렌지)포인트: #D97852 (테라코타) 이 세 가지면 된다. 더 많으면 복잡하다. 처음 슬라이드 보여줄 때 금요일 됐다. 오전 11시. 팀 리뷰 시간. 피그마 화면 공유했다. 무드보드 보여줬다. 팀장이 봤다. 말없이 스크롤했다. 2분 지났다. "좋네요. 방향 맞는 것 같아요." 디자이너 두 명도 봤다. "컬러 예쁘다", "질감 살아있네". 좋다. 이렇게 시작하는 게 좋다. 무드보드 없이 로고 시안부터 보여주면 항상 싸운다. "왜 이 색이에요?", "이 폰트는 왜 선택했어요?". 설명하느라 에너지 다 쓴다. 무드보드 먼저 보여주면 다르다. 브랜드 느낌 먼저 공유된다. 로고 시안 나와도 "아, 무드보드 느낌이네요" 하고 넘어간다. 이게 중요하다. 설명 줄이는 거. 감각 공유하는 거. 클라이언트 미팅 전날 밤 화요일 저녁 9시. 내일 클라이언트 미팅이다. 무드보드 다시 본다. 뭔가 부족하다. 이미지 하나 더 추가한다. 손으로 반죽 치대는 사진. 좋다. 슬라이드 만든다. 키노트 켰다. 무드보드 이미지 복사. 붙여넣기. 첫 페이지: 무드보드 전체두 번째: 컬러칩만 크게세 번째: 텍스처 클로즈업네 번째: 타이포그래피 레퍼런스 여기에 설명 달았다. "따뜻하지만 세련된""수제이지만 촌스럽지 않은""정성스럽지만 무겁지 않은" 아내가 물었다. "또 야근?" "아니, 거의 끝났어." 사실 끝났다. 그냥 계속 보고 싶다. 내일 클라이언트가 어떤 반응 보일지 궁금하다. 미팅 당일, 오후 2시 클라이언트 오피스. 화이트보드 있는 작은 회의실. 대표님, 마케터, 외주 컨설턴트. 세 명 앉았다. 내 노트북 연결했다. 빔 프로젝터 켰다. "로고 시안 보기 전에 무드보드 먼저 보여드릴게요." 슬라이드 넘겼다. 무드보드 나왔다. 대표님 눈빛 달라졌다. "아, 이거 진짜 우리 브랜드네요." 마케터가 사진 찍었다. "이 색들 괜찮아요. 따뜻한데 고급스러워요." 컨설턴트는 말없이 끄덕였다. 15분 동안 무드보드만 얘기했다. 로고는 아직 안 봤다. "이 느낌으로 가면 될 것 같아요." 대표님 말이다. 좋다. 이게 무드보드의 힘이다. 감각을 언어로 바꾸지 않는다. 이미지로 보여준다. 색으로 보여준다. 질감으로 보여준다. 설명 필요 없다. 보면 안다. 광학 정보를 감정으로 브랜드 디자인은 번역이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건 결국 감정이다. 고객이 우리 브랜드 보고 어떻게 느꼈으면 좋겠는가. "따뜻하게", "믿음직하게", "세련되게". 이건 추상적이다. 이대로는 디자인 못 한다. 무드보드는 이걸 구체적으로 만든다. '따뜻하게' → 크림 베이지, 손글씨, 크래프트지 텍스처'믿음직하게' → 세리프체, 자연스러운 사진, 정갈한 레이아웃'세련되게' → 여백, 절제된 컬러, 밸런스 잡힌 구도 추상이 구상 된다. 감정이 이미지 된다. 이게 내가 하는 일이다. 번역자. 감정의 통역사. 클라이언트는 느낌 얘기한다. 나는 그걸 시각으로 바꾼다. 무드보드는 그 번역서다. 무드보드 만들 때만 순수하다 프로젝트 진행되면 복잡해진다. 클라이언트 의견. 팀 의견. 트렌드. 경쟁사. 예산. 일정. 다 고려해야 한다. 디자인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무드보드 만들 땐 다르다. 그냥 좋은 이미지 고른다. 어울리는 색 찾는다. 맞는 텍스처 배치한다. 정치 없다. 설득 필요 없다. 순수하게 감각만 쓴다. 이게 행복한 이유다. 디자이너로서 가장 창의적인 순간. 아무도 간섭 안 하는 순간. 내 감각 믿고 가는 순간. 무드보드 만들 때만큼은 내가 온전히 디자이너다. 저장해둔 무드보드 폴더 외장하드에 폴더 있다. 'Moodboards_Archive'. 2016년부터 쌓였다. 84개 프로젝트. 가끔 연다. 옛날 무드보드 본다. 첫 직장 때 만든 거 보면 웃긴다. 이미지 너무 많다. 정리 안 됐다. 그래도 열심히 했다. 3년 차 무드보드는 깔끔하다. 미니멀 유행이었다. 다 비슷비슷하다. 요즘 만든 건 다르다. 절제됐지만 따뜻하다. 정리됐지만 지루하지 않다. 실력 늘었다는 증거다. 무드보드는 거짓말 못 한다. 그때 내 감각이 그대로 보인다. 10년 뒤에도 이 폴더 열어볼 거다. 2024년 무드보드 보면서 뭐라 생각할까. "이때는 이런 걸 좋아했구나" 할까. "아직도 이 감각은 유효하네" 할까. 궁금하다.무드보드 만들 때가 가장 행복한 건, 디자인의 이유를 찾는 시간이니까.
- 03 Dec, 2025
간판 사진을 찍는 일상 - 길 위의 리서치
간판 사진을 찍는 일상 - 길 위의 리서치 출근길 루틴 아침 9시 40분. 집 나섰다. 합정역까지 도보 12분. 이 시간이 중요하다. 폰 카메라 켰다. 습관이다. 길 위의 모든 간판이 리서치 대상이다.오늘은 세탁소 간판이 눈에 띄었다. "삼일세탁소". 1978년부터라고 써있다. 파란색 바탕에 흰색 명조체. 페인트가 벗겨졌다. 찍었다. 5장. 각도 바꿔가며. 빛 받는 부분 집중해서. 옆 건물은 신축이다. 1층에 카페. 간판은 레이저 커팅한 스테인리스. 산세리프. 자간 넓게. 미니멀하다. 두 간판이 나란히 있다. 50년 차이. 이게 재밌다. 기록하는 이유 동료들은 묻는다. "왜 그렇게 사진 찍어요?" 모르겠다. 그냥 찍는다. 리서치라고 하기엔 목적이 없다. 취미라고 하기엔 진지하다. 폴더를 봤다. 간판 사진만 3,247장. 2년 치다. 분류는 안 한다. 날짜순으로 쌓인다. 그게 좋다. 타임라인이 생긴다. 가끔 스크롤 내린다. 작년 봄에 찍은 꽃집 간판. 지금은 치킨집이다. 도시가 바뀐다. 간판으로 알 수 있다. 한글 타이포의 층위 전통시장 갔다. 망원시장. 오후 미팅 전 시간이 남았다. 현수막이 많다. "국내산 돼지고기", "할인행사 중" 손글씨다. 매직으로 썼다.이게 진짜 타이포그래피다. 글자 크기가 불규칙하다. 중심선이 흔들린다. 그런데 읽힌다. 확실하게. 기능이 먼저다. '예쁘게'는 나중이다. 우리가 하는 건 반대다. 예쁘게 만들고 기능 맞춘다. 클라이언트는 '세련됨'을 원한다. 시장 상인은 '전달'을 원한다. 목적이 다르다. 골목 안쪽. "영희네반찬". 노란 바탕에 검은 붓글씨. 20년은 됐다. 페인트 겹겹이 쌓였다. 리브랜딩하면 어떨까. 산세리프로 바꾸고, 색 정리하고. 망칠 것 같다. 이 간판은 이대로가 맞다. 힙한 것들의 법칙 주말. 성수동 갔다. 새 카페가 열었다는 연락 받았다. 간판 봤다. 예상대로다. 고딕. 자간 200%. 흰색 아크릴.요즘 카페는 다 이렇다. 미니멀. 뉴트럴 톤. 심플. 틀렸다는 게 아니다. 공식이 있다는 게 흥미롭다. '힙함'의 문법이 있다.산세리프 자간 넓게 무채색 또는 파스텔 여백 많이 영문 섞기법칙을 따르면 안전하다. 클라이언트도 좋아한다. 문제는 차별화다. 다들 똑같아진다. 옆 건물 보니까 같은 폰트다. 2개월 전 우리가 쓴 거다. 클라이언트가 다른데 말이다. 웃겼다. 트렌드의 속도가 이렇다. 낡은 것의 가치 을지로 프로젝트 있었다. 로컬 브랜딩이다. 답사 나갔다. 인쇄소 골목. 간판이 오래됐다. "대흥인쇄사", "동양제본소". 명조체. 테두리 있고. 금박 들어갔다. 50년대 스타일이다. 지금 만들면 레트로다. 그때는 그냥 간판이었다. 사장님께 물었다. "간판 바꿀 생각 없으세요?" "뭐 하러요. 잘만 나가는데." 맞다. 30년 단골들은 이 간판을 찾는다. 바꾸면 헷갈린다. 브랜딩이 꼭 새 게 아니다. 유지하는 것도 전략이다. 클라이언트한테 말했다. "이 간판들 그대로 두는 게 어때요?" "그럼 우리가 뭘 하는 건데요?" 할 말이 없었다. 시간의 축적 사진 정리했다. 같은 장소를 다른 시기에 찍은 것들. 홍대 앞 건물. 2022년 3월: 레코드샵 2022년 11월: 팝업스토어 2023년 4월: 카페 2024년 1월: 공실 간판이 4번 바뀌었다. 2년도 안 됐다. 반대 케이스도 있다. 망원동 "청춘다방". 1987년부터 지금까지. 손님이 줄었다. 그래도 문 연다. 간판은 변함없다. 어느 쪽이 맞을까. 빨리 바뀌는 게 맞나. 오래 버티는 게 맞나. 답은 없다. 도시는 둘 다 필요하다. 무드보드의 재료 스튜디오 왔다. 신규 프로젝트 킥오프다. 클라이언트: "레트로 감성이요. 근데 세련되게." 예상했다. 항상 이렇게 말한다. 무드보드 만들었다. 간판 사진 10장 넣었다. 출근길에 찍은 것들이다. "이런 느낌에서 영감 받았어요." 클라이언트 눈빛이 달라졌다. "오, 이거 어디서 찍은 거예요?" 리서치의 힘이다. 레퍼런스를 핀터레스트에서 안 찾았다. 발로 찾았다. 차별화는 여기서 시작된다. 팀 막내가 물었다. "형, 이 사진들 어떻게 찍어요?" 간단하다. "길 걷다가 그냥 찍어." 관찰의 연습 디자이너는 관찰해야 한다. 학교에서 배운 얘기다. 현실은 다르다. 마감에 치이고, 수정에 지친다. 관찰할 시간이 없다. 출근길 12분. 이게 내 관찰 시간이다. 억지로라도 본다. 간판, 포스터, 전단지. 누가 만들었을까. 왜 저 색일까. 타깃은 누굴까. 생각하며 걷는다. 그게 쌓인다. 3년 전 나는 그냥 지나쳤다. "삼일세탁소" 간판. 지금은 5장 찍는다. 시선이 바뀌었다. 디자이너의 눈이 생겼다. 회의 중에 이야기한다. "저번에 본 간판 있는데요..." 누가 물었다. "어디서 봤는데요?" "출근길이요." 다들 웃는다. 그래도 듣는다. 길 위의 리서치가 통한다. 찍고 또 찍는다 오늘도 찍었다. 신촌 "옛날통닭". 1994년. 빨간 바탕에 노란 글씨. 흔한 조합이다. 그런데 이 집만의 느낌이 있다. 글자 획이 두껍다. 붓터치가 살아있다. 8장 찍었다. 언제 쓸지 모른다. 그냥 찍는다. 3,255장. 오늘 8장 더했다. 내일도 찍을 것이다. 도시는 매일 바뀐다. 간판도 바뀐다. 기록은 계속된다. 언젠가 쓸모 있을 거다. 아니어도 괜찮다. 찍는 그 자체가 연습이다.폰 용량이 부족하다. 간판 사진 때문이다. 지울 생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