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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전시
- 10 Dec, 2025
출근 후 가장 먼저 하는 일 - 클라이언트 메일 확인의 심리학
출근 후 가장 먼저 하는 일 - 클라이언트 메일 확인의 심리학 10시, 회사 앞 출근했다. 10시 2분. 늦은 건 아니다. 에이전시는 자유롭다. 9시 출근 강요 안 한다. 대신 야근도 자유다. 어제 밤 11시에 퇴근했으니 10시면 양심적이다. 엘리베이터 안. 휴대폰 확인 안 했다. 일부러. 사무실 도착 전까지는 현실 유예 시간이다. 커피 들고 있으면 출근한 것 같지 않다. 착각이지만 필요한 착각이다. 5층 도착. 문 열고 들어간다. 직원들 반 정도 왔다. 10시 30분까지는 다 온다. 내 자리로 간다. 맥북 켠다. 부팅 소리. 이제부터가 진짜 출근이다.메일함을 여는 순간 아웃룩 실행. 로딩 중. 심호흡 한 번. 매일 하는 의식이다. 메일함이 열린다. 읽지 않은 메일 14개. 어제 저녁 이후 쌓인 것들이다. 제목만 훑는다. 발신자 확인한다. 누가 보냈는지가 중요하다. 김대리(클라이언트) - "Re: 로고 시안 검토 결과" 박부장(클라이언트) - "브랜드북 수정 요청 건" 이실장(내부) - "오늘 회의 안건" 정대표(클라이언트) - "좋았습니다!" 마지막 메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좋았습니다!" 이 한 줄. 오늘 하루 색깔이 정해진다. 정대표 메일부터 연다. 역순이다. 좋은 것부터 보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어제 보내주신 컨셉 방향 좋았습니다. 팀 내부에서도 반응 좋고요. 1안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에 뵙죠." 54자. 짧지만 충분하다. 가슴이 뜨겁다는 게 이런 거다. 한 달 동안 리서치하고 컨셉 잡았다. 무드보드 세 번 갈아엎었다. 어제 PT 전날 밤 12시까지 키노트 다듬었다. 그 모든 게 "좋았습니다" 네 글자로 보상받는다.수정 요청의 온도 기분 좋을 때 나쁜 소식 봐야 한다. 감정 관리. 김대리 메일. "Re: 로고 시안 검토 결과". Re가 붙었다는 건 대화가 이어진다는 뜻이다. 클릭. "안녕하세요. 검토했습니다. 전체적으로 괜찮은데 몇 가지 수정 부탁드립니다." 몇 가지. 이 단어가 무섭다. 경험상 '몇 가지'는 최소 다섯 가지다. 스크롤 내린다. "1. 로고 컬러를 좀 더 밝게 해주세요. 지금은 너무 무겁습니다. 2. 폰트를 고딕으로 바꿔주세요. 명조는 올드해 보입니다. 3. 심볼 크기를 키워주세요. 임팩트가 약합니다. 4. 전체적으로 모던하게 가능할까요? 5. 아, 그리고 후보안 3개 더 보고 싶습니다." 다섯 개. 예상 적중. 한숨 나온다. 입 밖으로는 안 나온다. 사무실에서 한숨 쉬면 옆자리가 묻는다. "무슨 일 있어?" 설명하기 귀찮다. 4번이 문제다. "모던하게". 이 단어만큼 추상적인 주문이 없다. 사람마다 모던의 정의가 다르다. 김대리 머릿속 모던과 내 머릿속 모던이 같을 확률은 30%다. 그래도 괜찮다. 수정 요청은 일의 일부다. 피드백 없는 프로젝트는 없다. 중요한 건 톤이다. 김대리 메일은 정중하다. '부탁드립니다'가 두 번 나온다. 존중받는 느낌. 이 정도면 할 만하다.박부장의 메일 다음. 박부장 메일. 제목만 봐도 안다. 이 사람은 다르다. 클릭. "브랜드북 봤는데요. 솔직히 기대 이하네요. 이게 3주 작업물입니까? 전체적으로 다시 해주세요. 컨셉부터 이해가 안 갑니다." 마침표가 칼이다. 물음표는 비수다. '솔직히'라는 단어. 이건 방패다. '솔직히'를 앞세우면 뭘 말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예의는 없어진다. '이게 3주 작업물입니까?' 반말 의문문. 존중 제로. '전체적으로 다시'. 이 네 글자가 제일 무섭다. 부분 수정이 아니다. 전체 리셋이다. 3주가 증발한다. 키보드 위에 손 올린다. 답장 버튼 누르지 않는다. 지금 쓰면 안 된다. 감정이 들어간다. 창 닫는다. 일단 묵힌다. 오후에 쓴다. 그때도 화나면 내일 쓴다. 박부장 같은 클라이언트가 있다. 항상 있다. 프로젝트 10개 중 2개는 박부장을 만난다. 확률의 문제다. 이런 메일이 아침에 오면 하루가 무너진다. 점심 입맛 없다. 오후 작업 집중 안 된다. 퇴근 후에도 생각난다. 그래서 순서가 중요하다. 정대표 메일을 먼저 본 게 신의 한 수다. 긍정 에너지가 충전됐다. 박부장 메일을 받아낼 힘이 생겼다. 메일의 심리학 9년 했다. 메일 읽는 순서에 법칙이 생겼다. 1. 제목으로 분류한다 긍정(칭찬, 승인, 계약), 중립(회의, 공지, 일정), 부정(수정, 거절, 컴플레인). 2. 긍정부터 읽는다 기분 좋을 때 나쁜 소식 소화된다. 반대는 안 된다. 아침에 박부장 메일 먼저 보면 하루 망한다. 3. 부정은 천천히 바로 답장 안 한다. 최소 2시간 묵힌다. 감정 가라앉힌다. 프로페셔널하게 응대한다. 4. 중립은 나중에 회의 안건, 공지는 급하지 않다. 업무 시작하고 처리한다. 이 순서 지키면 멘탈 관리된다. 아침 메일이 하루 톤을 정한다. 첫 메일이 긍정이면 오후까지 간다. 첫 메일이 부정이면 점심 전에 무너진다. 메일은 텍스트지만 감정이다. 53자가 기쁨이 되고, 127자가 분노가 된다. 같은 내용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다. "수정 부탁드립니다" vs "다시 해주세요". 의미는 같다. 받는 기분은 다르다. 클라이언트는 모른다. 자기 메일 한 통이 디자이너 하루를 좌우한다는 걸. 아침 10시에 보낸 메일이 오후 6시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걸. 답장을 쓰는 시간 정대표에게 먼저 답장한다. "감사합니다. 좋은 방향으로 함께 만들어가요. 화요일 뵙겠습니다." 34자. 짧게. 감사 표현하고 끝. 길게 쓸 필요 없다. 좋은 관계는 간결하다. 김대리 메일. 수정 요청 다섯 개. "검토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방향으로 수정해서 목요일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추가 후보안 3개 함께 준비하겠습니다." 존중받았으니 존중한다. '~겠습니다'를 세 번 썼다. 프로페셔널한 거리 유지. 박부장 메일은 안 연다. 오후 3시에 쓴다. 지금은 아니다. 내부 메일 확인한다. 이실장. "오늘 회의 안건". "오전 11시 - 신규 클라이언트 브리핑 오후 2시 - A프로젝트 중간 점검 오후 4시 - 디자인 리뷰" 회의 세 개. 표준적인 화요일이다. 메일 확인 끝. 시간 확인. 10시 47분. 45분 걸렸다. 아침 메일 확인은 루틴이다. 커피 한 잔 하면서 천천히. 급하게 하면 놓친다. 중요한 건 놓치고 급한 것만 본다. 메일은 업무의 시작이다. 오늘 뭘 해야 하는지 정리된다. 우선순위가 보인다. 클라이언트 심리가 읽힌다. 메일 너머의 관계 박부장 메일 다시 생각한다. 화가 나지만 이해는 된다. 박부장도 위에서 받는다. 임원한테 보고했다가 털렸을 거다. "이게 뭐야?" 들었을 거다. 그 스트레스가 내게 온다. 폭포수다. 임원 → 박부장 → 나. 박부장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못된 메일 쓰는 사람일 뿐이다. 대면하면 괜찮다. 미팅 때는 웃는다. 메일에서만 칼 같다. 텍스트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다. 얼굴 안 보면 예의 잊는다. 목소리 안 들리면 감정 못 읽는다. "전체적으로 다시 해주세요" 이 문장. 대면에서는 못 한다. 미팅에서 내 눈 보면서 "3주치 다시 하세요" 못 말한다. 메일은 방패다. 화면 뒤에 숨어서 쏜다. 상처 안 보인다. 표정 확인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전화 건다. 메일로 주고받다가 꼬이면 전화한다. 5분 통화가 10통 메일을 대체한다. "박부장님, 메일 확인했습니다. 어떤 부분이 기대와 달랐는지 통화로 여쭤봐도 될까요?" 이렇게 시작한다. 목소리 들으면 달라진다. 톤 부드러워진다. "아 그게 아니고요..." 설명 시작한다. 결국 사람이다. 텍스트 아니고 사람이다. 메일 너머에 누군가 있다. 그 사람도 스트레스받고 피곤하고 실수한다. 메일이 정하는 하루 11시 회의 시작. 신규 클라이언트 브리핑. 화장품 브랜드다. 런칭 준비 중이다. 로고, 패키지, 브랜드북 전체. 대표님이 설명한다. "자연주의 콘셉트입니다. 타겟은 30대 여성이고요..." 듣는다. 메모한다. 그런데 집중이 안 된다. 머릿속에 박부장 메일이 맴돈다. "전체적으로 다시". 이 네 글자가 뇌를 점령했다. 고개 끄덕인다. 알아듣는 척한다. 실제로는 50%만 들린다. 회의 끝. 1시간 걸렸다. 나온다. 점심시간. 식당 간다. 동료 셋이서. 파스타 먹는다. "요즘 어때?" 후배가 묻는다. "그냥. 할 만해." 대답한다. 거짓말이다. 할 만하지 않다. 박부장 프로젝트가 발목 잡는다. 3주치 다시 하려면 밤샘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말 안 한다. 말하면 현실이 된다. 불평하면 에너지 빠진다. 파스타가 안 넘어간다. 입맛 없다. 역시 아침 메일이 영향을 미친다. 오후 2시. A프로젝트 중간 점검. 순조롭다. 클라이언트 만족도 높다. 수정 요청 적다. 왜 이렇게 차이 나나. 같은 우리 팀이 작업했다. 프로젝트 난이도도 비슷하다. 클라이언트다. 결국 사람이다. 박부장과 A사 담당자는 다르다.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이 다르다. 존중의 유무가 다르다.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일이 즐겁다. 디자인 퀄리티도 올라간다. 서로 신뢰하면 모험할 수 있다. 시도하고 실험하고 깨뜨린다. 나쁜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일이 지옥이다. 움츠러든다. 안전한 것만 제안한다. 거절당할까 봐 평범하게 간다. 메일 한 통이 관계를 만든다. 관계가 결과물을 만든다. 오후 4시, 디자인 리뷰 팀 내부 리뷰 시간. 각자 작업물 공유한다. 피드백 주고받는다. 내 차례. 박부장 프로젝트 브랜드북 보여준다. "클라이언트가 전체 수정 요청했어요. 컨셉부터 다시 잡으래요." 팀장이 본다. 스크롤 내린다. "왜? 이거 괜찮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클라이언트 생각은 달라요." "어떤 피드백 받았어?" 박부장 메일 보여준다. 팀장이 읽는다. "아... 이분이구나." 팀장도 안다. 박부장 타입을. 이런 클라이언트 있다는 걸. "통화해봤어?" "아직이요." "전화해. 메일로 하지 말고. 정확히 뭘 원하는지 확인해." 조언이다. 좋은 조언이다. 리뷰 끝. 자리 돌아온다. 박부장한테 전화한다. 두 번 신호음. 받는다. "네, 박부장입니다." "안녕하세요, 박브랜드입니다. 오전에 보내주신 메일 확인했습니다. 통화 가능하신가요?" "네, 말씀하세요." 목소리 듣는다. 메일이랑 다르다. 덜 날카롭다. "어떤 부분이 기대와 다르셨는지 구체적으로 여쭤봐도 될까요? 정확히 수정해드리고 싶어서요." "아... 그게 말이죠." 설명 시작한다. 10분 동안. 들으면서 메모한다. 구체적인 포인트들 나온다. '전체 수정'이 아니었다. 세 가지 섹션이 문제였다. 나머지는 괜찮다고 한다. "컨셉 자체는 좋았어요. 근데 표현 방식이 저희 타겟이랑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이해된다. 메일에선 안 보였던 게 통화에서 보인다. "알겠습니다. 그럼 컨셉은 유지하되 표현 방식을 타겟에 맞춰서 조정하면 되겠네요." "네, 그렇게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목소리 밝아진다. 메일 쓸 때랑 다른 사람이다. 전화 끊는다. 가슴이 편해진다. '전체 수정'이 '부분 조정'으로 바뀌었다. 3주가 3일로 줄었다. 메일의 무게 퇴근 시간. 7시. 오늘은 일찍 간다. 야근 없다. 맥북 정리한다. 내일 할 일 리스트 작성한다.김대리 로고 수정안 3종 박부장 브랜드북 부분 조정 신규 클라이언트 컨셉 리서치 시작할 만하다. 집 가는 길. 지하철 탄다. 휴대폰 본다. 메일 알림 두 개. 심장 빨리 뛴다. 조건반사다. 확인한다. 하나는 뉴스레터. 하나는 내부 공지. 안심한다. 클라이언트 아니다. 메일이 주는 긴장감. 이게 일상이 됐다. 알림 뜰 때마다 조금씩 떨린다. 좋은 소식일까, 나쁜 소식일까. 9년 했지만 익숙하지 않다. 매번 열 때마다 심장 뛴다. 메일은 가볍지 않다. 텍스트는 무게가 없지만 내용은 무겁다. 53자가 하루를 바꾼다. 127자가 일주일을 바꾼다. 클라이언트는 모른다. 자기가 보낸 메일의 무게를. 디자이너는 안다. 매일 아침 10시에 체감한다. 출근 후 첫 번째 일. 클라이언트 메일 확인. 이게 하루의 톤을 정한다. 기분을 좌우한다. 에너지를 충전하거나 소진한다. 그래서 나는 순서를 지킨다. 좋은 것부터 본다. 나쁜 것은 천천히. 중립은 나중에. 심리학이다. 감정 관리다. 생존 전략이다. 9년의 노하우다.오늘도 메일 14개 확인했다. 내일도 똑같을 거다. 하지만 괜찮다. 정대표 메일 같은 게 하나씩 있으니까.
- 09 Dec, 2025
무드보드 만들 때 가장 행복한 이유
월요일 오전 10시 출근했다. 노트북 켰다. 오늘부터 새 프로젝트다. 클라이언트는 신생 디저트 브랜드. 키워드는 '따뜻한', '수제', '정성'. 흔하다. 하지만 좋다. 시작할 수 있으니까. 메일함에 레퍼런스 20개. 훑어봤다. 다 비슷하다. 파스텔톤, 손글씨 느낌, 크래프트지. 예상했다. 팀장이 물었다. "언제까지 컨셉 나올 것 같아?" "이번 주 금요일이요." 속으로는 수요일에 끝낼 생각이다. 무드보드 만들 시간이 필요하니까.핀터레스트를 열 때 핀터레스트 켰다. 로그인했다. 비공개 보드 새로 만들었다. 이름은 'Dessert_Brand_241208'. 검색창에 'artisan dessert'를 쳤다. 이미지가 쏟아진다. 스크롤한다. 저장한다. 또 스크롤한다. 또 저장한다. 10분 지났다. 이미지 32개. 아직 멀었다. 'craft packaging', 'warm color palette', 'handmade aesthetic', 'cozy cafe interior'. 검색어를 바꿔가며 계속한다. 점심시간이 됐다. 배고프지 않다. 계속한다. 동료가 밥 먹자고 했다. "조금 있다가요." 대답하고 계속 스크롤한다. 이 시간이 좋다. 아무도 뭘 물어보지 않는다. 클라이언트 전화도 없다. 그냥 나와 이미지만 있다.이미지를 고르는 기준 저장한 이미지 78개. 많다. 줄여야 한다. 다시 본다. 하나씩 클릭한다. 이 이미지는 왜 골랐지? 색깔? 질감? 분위기? 답이 명확한 건 남긴다. 애매한 건 뺀다. 베이지 배경에 크림 얹은 타르트 사진. 좋다. 색이 따뜻하다. 질감이 살아있다. 남긴다. 미니멀한 흰색 패키징 사진. 깔끔하다. 하지만 차갑다. 우리 브랜드랑 안 맞는다. 뺀다. 손글씨 타이포그래피. 너무 흔하다. 하지만 '수제' 느낌은 확실하다. 일단 남긴다. 나중에 다시 볼 거다. 30분 지났다. 이미지 42개로 줄었다. 이 과정이 좋다. 내 취향이 아니라 브랜드 취향을 만드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블랙은 이번 프로젝트에 없다. 대신 따뜻한 오렌지와 크림색만 남았다. 피그마에 정리할 때 피그마 켰다. 새 파일. 이름은 'Moodboard_Dessert'. 프레임 만들었다. 1920x1080. 배경은 연한 아이보리. 저장한 이미지를 하나씩 드래그한다. 피그마 안으로. 배치한다. 크기 조절한다. 겹친다. 떨어뜨린다. 다시 모은다. 처음엔 질서 없다. 그냥 놓는다. 느낌대로. 10개 정도 놓으니까 보인다. 어떤 색이 많은지. 어떤 질감이 반복되는지. 크림색 많다. 베이지도. 오렌지는 포인트로. 질감은 종이 질감, 크림 질감, 나무 질감. 타이포그래피 추가한다. 세리프체 3개, 손글씨체 2개, 산세리프 1개. 폰트 이름 적어둔다. 나중에 쓸 거다. 배치 다시 한다. 색 순서대로. 왼쪽은 밝은 색, 오른쪽은 포인트 컬러. 한 시간 지났다. 보드가 모양 갖췄다.텍스처 파일을 뒤질 때 텍스처가 필요하다. 크래프트지, 린넨 천, 거친 종이. 외장하드 꺼냈다. 'Texture_Library' 폴더 열었다. 5년 치 텍스처가 있다. 스크롤한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다 좋다. 크래프트지 텍스처 12개 골랐다. 피그마에 올린다. 투명도 조절한다. 20%쯤. 배경으로 깐다. 분위기 달라진다. 따뜻해진다. 손맛 느껴진다. 동료가 지나가다 봤다. "오, 분위기 좋은데요?" 고맙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컬러칩 만든다. 이미지에서 스포이트로 색 뽑는다. 헥사코드 복사한다. 정리한다. 메인 컬러: #F4E8D8 (크림 베이지)서브 컬러: #E8B89A (따뜻한 오렌지)포인트: #D97852 (테라코타) 이 세 가지면 된다. 더 많으면 복잡하다. 처음 슬라이드 보여줄 때 금요일 됐다. 오전 11시. 팀 리뷰 시간. 피그마 화면 공유했다. 무드보드 보여줬다. 팀장이 봤다. 말없이 스크롤했다. 2분 지났다. "좋네요. 방향 맞는 것 같아요." 디자이너 두 명도 봤다. "컬러 예쁘다", "질감 살아있네". 좋다. 이렇게 시작하는 게 좋다. 무드보드 없이 로고 시안부터 보여주면 항상 싸운다. "왜 이 색이에요?", "이 폰트는 왜 선택했어요?". 설명하느라 에너지 다 쓴다. 무드보드 먼저 보여주면 다르다. 브랜드 느낌 먼저 공유된다. 로고 시안 나와도 "아, 무드보드 느낌이네요" 하고 넘어간다. 이게 중요하다. 설명 줄이는 거. 감각 공유하는 거. 클라이언트 미팅 전날 밤 화요일 저녁 9시. 내일 클라이언트 미팅이다. 무드보드 다시 본다. 뭔가 부족하다. 이미지 하나 더 추가한다. 손으로 반죽 치대는 사진. 좋다. 슬라이드 만든다. 키노트 켰다. 무드보드 이미지 복사. 붙여넣기. 첫 페이지: 무드보드 전체두 번째: 컬러칩만 크게세 번째: 텍스처 클로즈업네 번째: 타이포그래피 레퍼런스 여기에 설명 달았다. "따뜻하지만 세련된""수제이지만 촌스럽지 않은""정성스럽지만 무겁지 않은" 아내가 물었다. "또 야근?" "아니, 거의 끝났어." 사실 끝났다. 그냥 계속 보고 싶다. 내일 클라이언트가 어떤 반응 보일지 궁금하다. 미팅 당일, 오후 2시 클라이언트 오피스. 화이트보드 있는 작은 회의실. 대표님, 마케터, 외주 컨설턴트. 세 명 앉았다. 내 노트북 연결했다. 빔 프로젝터 켰다. "로고 시안 보기 전에 무드보드 먼저 보여드릴게요." 슬라이드 넘겼다. 무드보드 나왔다. 대표님 눈빛 달라졌다. "아, 이거 진짜 우리 브랜드네요." 마케터가 사진 찍었다. "이 색들 괜찮아요. 따뜻한데 고급스러워요." 컨설턴트는 말없이 끄덕였다. 15분 동안 무드보드만 얘기했다. 로고는 아직 안 봤다. "이 느낌으로 가면 될 것 같아요." 대표님 말이다. 좋다. 이게 무드보드의 힘이다. 감각을 언어로 바꾸지 않는다. 이미지로 보여준다. 색으로 보여준다. 질감으로 보여준다. 설명 필요 없다. 보면 안다. 광학 정보를 감정으로 브랜드 디자인은 번역이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건 결국 감정이다. 고객이 우리 브랜드 보고 어떻게 느꼈으면 좋겠는가. "따뜻하게", "믿음직하게", "세련되게". 이건 추상적이다. 이대로는 디자인 못 한다. 무드보드는 이걸 구체적으로 만든다. '따뜻하게' → 크림 베이지, 손글씨, 크래프트지 텍스처'믿음직하게' → 세리프체, 자연스러운 사진, 정갈한 레이아웃'세련되게' → 여백, 절제된 컬러, 밸런스 잡힌 구도 추상이 구상 된다. 감정이 이미지 된다. 이게 내가 하는 일이다. 번역자. 감정의 통역사. 클라이언트는 느낌 얘기한다. 나는 그걸 시각으로 바꾼다. 무드보드는 그 번역서다. 무드보드 만들 때만 순수하다 프로젝트 진행되면 복잡해진다. 클라이언트 의견. 팀 의견. 트렌드. 경쟁사. 예산. 일정. 다 고려해야 한다. 디자인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무드보드 만들 땐 다르다. 그냥 좋은 이미지 고른다. 어울리는 색 찾는다. 맞는 텍스처 배치한다. 정치 없다. 설득 필요 없다. 순수하게 감각만 쓴다. 이게 행복한 이유다. 디자이너로서 가장 창의적인 순간. 아무도 간섭 안 하는 순간. 내 감각 믿고 가는 순간. 무드보드 만들 때만큼은 내가 온전히 디자이너다. 저장해둔 무드보드 폴더 외장하드에 폴더 있다. 'Moodboards_Archive'. 2016년부터 쌓였다. 84개 프로젝트. 가끔 연다. 옛날 무드보드 본다. 첫 직장 때 만든 거 보면 웃긴다. 이미지 너무 많다. 정리 안 됐다. 그래도 열심히 했다. 3년 차 무드보드는 깔끔하다. 미니멀 유행이었다. 다 비슷비슷하다. 요즘 만든 건 다르다. 절제됐지만 따뜻하다. 정리됐지만 지루하지 않다. 실력 늘었다는 증거다. 무드보드는 거짓말 못 한다. 그때 내 감각이 그대로 보인다. 10년 뒤에도 이 폴더 열어볼 거다. 2024년 무드보드 보면서 뭐라 생각할까. "이때는 이런 걸 좋아했구나" 할까. "아직도 이 감각은 유효하네" 할까. 궁금하다.무드보드 만들 때가 가장 행복한 건, 디자인의 이유를 찾는 시간이니까.
- 03 Dec, 2025
간판 사진을 찍는 일상 - 길 위의 리서치
간판 사진을 찍는 일상 - 길 위의 리서치 출근길 루틴 아침 9시 40분. 집 나섰다. 합정역까지 도보 12분. 이 시간이 중요하다. 폰 카메라 켰다. 습관이다. 길 위의 모든 간판이 리서치 대상이다.오늘은 세탁소 간판이 눈에 띄었다. "삼일세탁소". 1978년부터라고 써있다. 파란색 바탕에 흰색 명조체. 페인트가 벗겨졌다. 찍었다. 5장. 각도 바꿔가며. 빛 받는 부분 집중해서. 옆 건물은 신축이다. 1층에 카페. 간판은 레이저 커팅한 스테인리스. 산세리프. 자간 넓게. 미니멀하다. 두 간판이 나란히 있다. 50년 차이. 이게 재밌다. 기록하는 이유 동료들은 묻는다. "왜 그렇게 사진 찍어요?" 모르겠다. 그냥 찍는다. 리서치라고 하기엔 목적이 없다. 취미라고 하기엔 진지하다. 폴더를 봤다. 간판 사진만 3,247장. 2년 치다. 분류는 안 한다. 날짜순으로 쌓인다. 그게 좋다. 타임라인이 생긴다. 가끔 스크롤 내린다. 작년 봄에 찍은 꽃집 간판. 지금은 치킨집이다. 도시가 바뀐다. 간판으로 알 수 있다. 한글 타이포의 층위 전통시장 갔다. 망원시장. 오후 미팅 전 시간이 남았다. 현수막이 많다. "국내산 돼지고기", "할인행사 중" 손글씨다. 매직으로 썼다.이게 진짜 타이포그래피다. 글자 크기가 불규칙하다. 중심선이 흔들린다. 그런데 읽힌다. 확실하게. 기능이 먼저다. '예쁘게'는 나중이다. 우리가 하는 건 반대다. 예쁘게 만들고 기능 맞춘다. 클라이언트는 '세련됨'을 원한다. 시장 상인은 '전달'을 원한다. 목적이 다르다. 골목 안쪽. "영희네반찬". 노란 바탕에 검은 붓글씨. 20년은 됐다. 페인트 겹겹이 쌓였다. 리브랜딩하면 어떨까. 산세리프로 바꾸고, 색 정리하고. 망칠 것 같다. 이 간판은 이대로가 맞다. 힙한 것들의 법칙 주말. 성수동 갔다. 새 카페가 열었다는 연락 받았다. 간판 봤다. 예상대로다. 고딕. 자간 200%. 흰색 아크릴.요즘 카페는 다 이렇다. 미니멀. 뉴트럴 톤. 심플. 틀렸다는 게 아니다. 공식이 있다는 게 흥미롭다. '힙함'의 문법이 있다.산세리프 자간 넓게 무채색 또는 파스텔 여백 많이 영문 섞기법칙을 따르면 안전하다. 클라이언트도 좋아한다. 문제는 차별화다. 다들 똑같아진다. 옆 건물 보니까 같은 폰트다. 2개월 전 우리가 쓴 거다. 클라이언트가 다른데 말이다. 웃겼다. 트렌드의 속도가 이렇다. 낡은 것의 가치 을지로 프로젝트 있었다. 로컬 브랜딩이다. 답사 나갔다. 인쇄소 골목. 간판이 오래됐다. "대흥인쇄사", "동양제본소". 명조체. 테두리 있고. 금박 들어갔다. 50년대 스타일이다. 지금 만들면 레트로다. 그때는 그냥 간판이었다. 사장님께 물었다. "간판 바꿀 생각 없으세요?" "뭐 하러요. 잘만 나가는데." 맞다. 30년 단골들은 이 간판을 찾는다. 바꾸면 헷갈린다. 브랜딩이 꼭 새 게 아니다. 유지하는 것도 전략이다. 클라이언트한테 말했다. "이 간판들 그대로 두는 게 어때요?" "그럼 우리가 뭘 하는 건데요?" 할 말이 없었다. 시간의 축적 사진 정리했다. 같은 장소를 다른 시기에 찍은 것들. 홍대 앞 건물. 2022년 3월: 레코드샵 2022년 11월: 팝업스토어 2023년 4월: 카페 2024년 1월: 공실 간판이 4번 바뀌었다. 2년도 안 됐다. 반대 케이스도 있다. 망원동 "청춘다방". 1987년부터 지금까지. 손님이 줄었다. 그래도 문 연다. 간판은 변함없다. 어느 쪽이 맞을까. 빨리 바뀌는 게 맞나. 오래 버티는 게 맞나. 답은 없다. 도시는 둘 다 필요하다. 무드보드의 재료 스튜디오 왔다. 신규 프로젝트 킥오프다. 클라이언트: "레트로 감성이요. 근데 세련되게." 예상했다. 항상 이렇게 말한다. 무드보드 만들었다. 간판 사진 10장 넣었다. 출근길에 찍은 것들이다. "이런 느낌에서 영감 받았어요." 클라이언트 눈빛이 달라졌다. "오, 이거 어디서 찍은 거예요?" 리서치의 힘이다. 레퍼런스를 핀터레스트에서 안 찾았다. 발로 찾았다. 차별화는 여기서 시작된다. 팀 막내가 물었다. "형, 이 사진들 어떻게 찍어요?" 간단하다. "길 걷다가 그냥 찍어." 관찰의 연습 디자이너는 관찰해야 한다. 학교에서 배운 얘기다. 현실은 다르다. 마감에 치이고, 수정에 지친다. 관찰할 시간이 없다. 출근길 12분. 이게 내 관찰 시간이다. 억지로라도 본다. 간판, 포스터, 전단지. 누가 만들었을까. 왜 저 색일까. 타깃은 누굴까. 생각하며 걷는다. 그게 쌓인다. 3년 전 나는 그냥 지나쳤다. "삼일세탁소" 간판. 지금은 5장 찍는다. 시선이 바뀌었다. 디자이너의 눈이 생겼다. 회의 중에 이야기한다. "저번에 본 간판 있는데요..." 누가 물었다. "어디서 봤는데요?" "출근길이요." 다들 웃는다. 그래도 듣는다. 길 위의 리서치가 통한다. 찍고 또 찍는다 오늘도 찍었다. 신촌 "옛날통닭". 1994년. 빨간 바탕에 노란 글씨. 흔한 조합이다. 그런데 이 집만의 느낌이 있다. 글자 획이 두껍다. 붓터치가 살아있다. 8장 찍었다. 언제 쓸지 모른다. 그냥 찍는다. 3,255장. 오늘 8장 더했다. 내일도 찍을 것이다. 도시는 매일 바뀐다. 간판도 바뀐다. 기록은 계속된다. 언젠가 쓸모 있을 거다. 아니어도 괜찮다. 찍는 그 자체가 연습이다.폰 용량이 부족하다. 간판 사진 때문이다. 지울 생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