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차 수정 끝에 1차안으로 돌아가기

5차 수정 끝에 1차안으로 돌아가기

월요일 오전, 메일 한 통

“박실장님, 고민 많이 했는데요. 1차안으로 가면 안 될까요?”

커피 뱉을 뻔했다.

지난 3주간 뭐 한 거지.

1차안, 그때는 몰랐다

4월 12일. 첫 미팅.

클라이언트는 화장품 브랜드. 론칭 3년차. 리브랜딩.

“감성적이면서 모던하게요.”

알겠다는 대답. 속으로는 ‘또 그 말이네’.

일주일 뒤 PT. 3개 방향 준비했다.

A안: 미니멀 세리프. 여백 많이. 고급스러운 느낌. B안: 손글씨 느낌. 따뜻한 컬러. 친근한 방향. C안: 기하학 산세리프. 심플. 깔끔한 타입.

발표 시작했다. A안부터.

“이건 브랜드 에센스를 시각적으로 정제한 거예요. 여백이 곧 여유고, 세리프가 전통과 신뢰를 담았죠.”

대표 표정이 좋았다. 팀장도 고개 끄덕였다.

B안 넘어갔다. 반응 미지근.

C안은 “너무 흔하다”는 코멘트.

“1차는 A안 베이스로 가겠습니다.”

그날 저녁, 아내한테 말했다.

“이번 클라는 센스 있어. 한 방에 갔어.”

착각이었다.

2차부터 5차까지

2차 피드백.

“좋은데요, 세리프가 좀 부담스러워요. 젊은 고객들이 어려워하지 않을까요?”

그래. 산세리프로 바꿨다. A안의 뼈대에 C안의 타입.

3차 피드백.

“뭔가 너무 딱딱해요. 감성이 빠진 것 같아요.”

손글씨 느낌 추가했다. B안 요소 섞었다.

4차 피드백.

“컬러가 너무 화려해요. 고급스러움이 사라졌어요.”

팔레트 전면 수정. A안의 베이지 톤으로 회귀.

5차 피드백.

“전체적으로 애매해요. 방향성이 흐려진 느낌?”

그날 야근했다. 밤 11시까지.

아내 전화 왔다. “저녁 먹었어?”

“아직. 좀 이따 먹을게.”

끊고 모니터 봤다. A, B, C가 다 섞인 괴물.

정체성 없는 로고. 컨셉 없는 디자인.

이게 뭐지.

돌아보기

토요일 아침. 출근 안 했다.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클라이언트 탓? 아니다.

내 탓이다.

1차 PT 때, 나는 A안을 제대로 설명 못 했다.

“세리프가 전통과 신뢰를 담았다”는 말.

그게 다였다.

왜 세리프인지. 왜 이 여백인지. 왜 이 컬러인지.

브랜드 에센스를 어떻게 시각화했는지.

타깃 고객이 왜 이 디자인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지.

경쟁사와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3년 뒤 이 브랜드가 어떤 이미지로 자리 잡을지.

30분 발표에서 5분밖에 안 썼다.

나머지 25분은 B안, C안 설명.

사실 그 둘은 없어도 됐다. 비교용이었다.

근데 나는 3개 방향을 다 똑같이 취급했다.

클라이언트는 혼란스러웠을 거다.

“셋 다 좋은데요?”

그럼 그때부터다. 섞어달라는 요청.

“A안의 고급스러움에 B안의 감성을 더하면 어떨까요?”

나는 “네” 했다.

왜?

클라이언트니까. 돈 내는 사람이니까.

틀렸다.

프로세스가 아니라 확신

월요일 오전. 그 메일 받았다.

“1차안으로 가면 안 될까요?”

답장 쓰기 전에 폴더 열었다.

1차안 파일. 4월 17일.

다시 봤다.

좋았다. 지금 봐도 제일 좋았다.

왜 이걸 지키지 못했을까.

답은 간단했다.

나한테 확신이 없었으니까.

“이게 답입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으니까.

클라이언트 요청에 “그건 방향이 다릅니다”라고 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디자이너가 뭐 하는 사람인가.

예쁜 거 만드는 사람? 아니다.

문제 해결하는 사람이다.

브랜드의 본질을 시각화하는 사람이다.

클라이언트보다 브랜드를 더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근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리서치는 했다. 경쟁사 분석도 했다. 무드보드도 만들었다.

근데 확신은 없었다.

“혹시 틀리면 어쩌지”라는 생각.

“클라이언트가 싫어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

그래서 타협했다.

결과는 시간 낭비. 3주.

클라이언트도 지쳤을 거다. 나도 지쳤다.

답장 썼다.

“네, 그게 맞습니다. 1차안이 가장 브랜드 에센스에 부합합니다. 제가 제대로 설명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내일 오전에 다시 한번 PT 드리겠습니다.”

화요일, 두 번째 PT

같은 회의실. 같은 사람들.

다른 건 나.

이번엔 1차안만 들고 갔다.

“오늘은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프로젝터 켰다. A안 떴다.

“이 로고는 단순히 예쁜 게 아닙니다.”

45분 발표했다.

왜 이 서체인지. 11가지 후보 중 이걸 선택한 이유.

왜 이 여백인지. 타깃 고객의 시선 흐름 데이터.

왜 이 컬러인지. 화장품 업계 트렌드와 차별화 전략.

경쟁사 5곳 로고 비교. 우리 브랜드만의 아이덴티티.

3년 뒤 브랜드 확장 시 응용 가능성. 패키지, 웹, 매장.

끝나고 대표가 말했다.

“진작 이렇게 설명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맞는 말이다.

“처음부터 이게 답이었네요.”

그것도 맞는 말이다.

계약서 썼다. 최종안 확정.

그날 저녁

퇴근길. 합정역.

편의점 들렀다. 맥주 2캔.

집 와서 아내한테 말했다.

“확정됐어. 1차안으로.”

“처음 거? 그럼 수정은 왜 한 거야?”

“내가 제대로 못 설명해서.”

맥주 땄다. 한 모금.

“다음부턴 다르게 할 거야.”

“뭘?”

“확신 있으면 밀어붙일 거야. 안 섞을 거야.”

아내가 웃었다.

“그래, 브랜드 디자이너답게.”

배운 것

프로세스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수정 5차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내 태도였다.

디자이너는 서비스업이 맞다.

근데 단순 주문 받는 사람은 아니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걸 주는 게 아니라.

클라이언트에게 필요한 걸 제안하는 사람이다.

그 차이를 이제 안다.

다음 프로젝트.

1차안에 확신 있으면 그것만 들고 간다.

“이게 답입니다.”

그렇게 말할 거다.

틀릴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적어도 시간은 낭비 안 한다.

적어도 방향은 흔들리지 않는다.


5차 수정 끝에 돌아온 1차안. 3주가 알려준 건 프로세스가 아니라 확신의 중요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