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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젠테이션

경쟁 PT에서 떨어진 프로젝트, 한 달의 무게

경쟁 PT에서 떨어진 프로젝트, 한 달의 무게

경쟁 PT에서 떨어진 프로젝트, 한 달의 무게 알림은 금요일 저녁에 왔다 "고민 많이 하셨을 텐데, 아쉽게도..." 메일 첫 줄만 봐도 안다. 떨어졌다는 거. 한 달 전부터 준비한 F&B 브랜드 리뉴얼 프로젝트. 경쟁 PT 3사. 우리는 가장 먼저 제안했다. 컨셉부터 BI 시안, 패키징 목업, 공간 적용까지. 75페이지 제안서. 리허설만 다섯 번. 대표님이 "이번엔 가능성 있다"고 했다. PT 끝나고 클라이언트가 "방향성이 참신하다"고 했다. 담당자가 "내부 검토 후 연락드린다"고 했다. 2주를 기다렸다. 금요일 저녁 6시 47분에 메일이 왔다. "다른 업체로 결정했습니다.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한 달이 한 줄로 정리됐다.무료 컨설팅이라는 이름 경쟁 PT의 가장 큰 문제. 작업은 하는데 돈은 안 나온다. 이번 프로젝트. 3주 동안 들어간 시간을 계산했다.클라이언트 브리핑 및 현장 답사: 8시간 컨셉 리서치 및 무드보드: 40시간 BI 시안 작업 (3안): 60시간 패키징 목업 및 공간 시뮬레이션: 32시간 제안서 작성 및 리허설: 28시간총 168시간. 3명이 투입됐으니 실제로는 더 많다. 시급으로 계산하면 안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안 하면 프로젝트는 다른 에이전시로 간다. 딜레마다. 대표님은 "투자라고 생각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경쟁 PT로 따낸 프로젝트도 많다. 하지만 떨어지면 그냥 투자 손실이다. 클라이언트 입장도 이해는 간다. 여러 안을 보고 싶은 거. 그런데 가끔 생각한다. 우리 컨셉 참고해서 다른 데 작업 맡기는 거 아닌가. 증명할 방법은 없다.결과물을 보게 되는 순간 3개월 뒤. 그 브랜드가 론칭했다. 인스타그램에서 봤다. 업계 지인이 태그한 피드. 새로 나온 패키징 사진. 우리가 제안한 방향과 완전히 달랐다. 우리는 '로컬 정체성'을 강조했다. 한글 타이포, 지역 컬러, 수제 느낌. 클라이언트가 PT 때 "이런 느낌 좋다"고 했던 바로 그 방향. 근데 결과물은 미니멀 모던. 산세리프 영문, 블랙 앤 화이트, 고급 라인. 정반대였다. 이긴 에이전시를 찾아봤다. 우리보다 큰 곳. 포트폴리오가 화려했다. 대기업 프로젝트가 많았다. 아. 처음부터 우리 스타일이 아니었구나. 클라이언트는 로컬 정체성에 끌렸던 게 아니라 '안전한 고급화'를 원했던 거다. 우리 제안은 그냥 참고용. 트렌드 확인용. 씁쓸했다. 우리 안은 뭐가 문제였나 회사에서 복기 미팅을 했다. 대표님: "PT는 잘했어. 컨셉도 좋았고." 실장님: "근데 클라이언트가 원한 건 다른 거였나 봐." 나: "그럼 PT 전에 뭘 더 물어봤어야 했나요?" 답은 없었다. 브리핑 때 클라이언트가 한 말들."참신한 방향 원해요" "너무 흔한 건 싫어요"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뚜렷했으면"우리는 그대로 했다. 참신하게, 차별화되게, 정체성 뚜렷하게. 근데 선택받은 건 안전한 고급 디자인이었다. 클라이언트는 본인도 모른다. 정확히 뭘 원하는지. 여러 안 보고 나서야 안다. "아, 이게 아니었구나" 또는 "이게 맞네". 그래서 경쟁 PT가 존재하는 거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하나의 옵션일 뿐.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사실이다.그래도 배운 것들 경쟁 PT 떨어질 때마다 체크리스트가 늘어난다. 이번에 추가된 항목들.브리핑 때 레퍼런스 더 많이 물어볼 것"참신한 디자인"이 뭔지 구체적 이미지로 확인 좋아하는 브랜드, 싫어하는 브랜드 명확히의사결정권자 파악대표가 결정하나, 마케팅팀이 결정하나 PT 때 누가 제일 반응 좋았나예산과 타임라인 현실성우리가 제안한 방향, 그 예산으로 가능한가 클라이언트가 생각한 예산과 괴리는 없나경쟁사 스타일 사전 조사같이 경쟁하는 에이전시 포트폴리오 확인 우리 방향과 차별점 명확히완벽하게 준비해도 떨어질 수 있다. 그게 경쟁 PT다. 근데 최소한 "우리가 뭘 놓쳤나" 정도는 알 수 있다. 한 달의 무게를 견디는 법 야근한 날들. 리허설하면서 고민한 시간들. 퇴근길에 컨셉 다듬던 순간들. 떨어지면 다 의미 없어지나. 아니라고 생각하려 한다. 이번에 만든 컨셉. 다른 프로젝트에 변형해서 쓸 수 있다. 무드보드 리서치하면서 찾은 레퍼런스들. 포트폴리오 업데이트 소스로 쓸 수 있다. PT 준비하면서 연습한 프레젠테이션. 다음 미팅에서 더 잘할 수 있다. 손해는 손해다. 근데 완전히 버려지는 건 아니다. 에이전시 일이 원래 그렇다. 10개 제안하면 3개 붙는다. 나머지 7개는 경험치가 된다. 레벨업하는 데 필요한 과정.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 위로는 안 된다. 떨어진 건 떨어진 거다. 그래도 다음 프로젝트는 준비한다. 또 경쟁 PT일 거다. 경쟁사 결과물을 보는 태도 같은 업계 사람들끼리 하는 말이 있다. "저 프로젝트 우리도 PT 들어갔었는데." 서로 안다. 누가 어떤 프로젝트 경쟁했는지. 누가 이겼는지. 결과물 나오면 평가한다. 당연하다. 디자이너니까. "우리 안이 더 나았는데"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저게 나은 것 같다"고 인정할 때도 있다. 중요한 건 감정 섞지 않기.저건 왜 저렇게 했지? (호기심) 클라이언트는 왜 저걸 선택했을까? (분석) 우리 안과 뭐가 달랐나? (비교)질투나 자괴감은 도움 안 된다. 배우려는 태도만 필요하다. 가끔 놀랄 때도 있다. "어, 우리 컨셉이랑 비슷한데?" 싶을 때. 물론 증거는 없다. 그냥 비슷할 수도 있다. 트렌드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니까. 그래도 씁쓸하긴 하다. 결국 남는 것 프로젝트 파일 폴더를 정리했다. "2024_F&B브랜드리뉴얼_경쟁PT_미선정" 폴더명부터 서글프다. 안에 들어있는 파일들.컨셉 키워드 100개 무드보드 15장 BI 시안 AI 파일 3개 패키징 목업 PSD 8개 제안서 최종본 PDF용량 2.3GB. 한 달의 무게. 당장은 안 쓸 거다. 근데 언젠가 비슷한 프로젝트 오면 꺼내볼 거다. "아, 이때 이런 거 했었지." 하면서. 디자이너의 하드 드라이브에는 이런 폴더가 쌓인다. 빛을 못 본 작업들. 클라이언트 앞에 한 번 서고 사라진 컨셉들. 버리진 않는다. 언젠가 쓸 날이 온다. 다른 형태로든. 그게 위로가 될까. 잘 모르겠다. 그래도 지우진 않는다.경쟁 PT는 복권이 아니다. 실력과 운이 섞인 게임이다. 떨어져도 경험은 남는다. 그걸로 만족해야 한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5차 수정 끝에 1차안으로 돌아가기

5차 수정 끝에 1차안으로 돌아가기

월요일 오전, 메일 한 통 "박실장님, 고민 많이 했는데요. 1차안으로 가면 안 될까요?" 커피 뱉을 뻔했다. 지난 3주간 뭐 한 거지.1차안, 그때는 몰랐다 4월 12일. 첫 미팅. 클라이언트는 화장품 브랜드. 론칭 3년차. 리브랜딩. "감성적이면서 모던하게요." 알겠다는 대답. 속으로는 '또 그 말이네'. 일주일 뒤 PT. 3개 방향 준비했다. A안: 미니멀 세리프. 여백 많이. 고급스러운 느낌. B안: 손글씨 느낌. 따뜻한 컬러. 친근한 방향. C안: 기하학 산세리프. 심플. 깔끔한 타입. 발표 시작했다. A안부터. "이건 브랜드 에센스를 시각적으로 정제한 거예요. 여백이 곧 여유고, 세리프가 전통과 신뢰를 담았죠." 대표 표정이 좋았다. 팀장도 고개 끄덕였다. B안 넘어갔다. 반응 미지근. C안은 "너무 흔하다"는 코멘트. "1차는 A안 베이스로 가겠습니다." 그날 저녁, 아내한테 말했다. "이번 클라는 센스 있어. 한 방에 갔어." 착각이었다.2차부터 5차까지 2차 피드백. "좋은데요, 세리프가 좀 부담스러워요. 젊은 고객들이 어려워하지 않을까요?" 그래. 산세리프로 바꿨다. A안의 뼈대에 C안의 타입. 3차 피드백. "뭔가 너무 딱딱해요. 감성이 빠진 것 같아요." 손글씨 느낌 추가했다. B안 요소 섞었다. 4차 피드백. "컬러가 너무 화려해요. 고급스러움이 사라졌어요." 팔레트 전면 수정. A안의 베이지 톤으로 회귀. 5차 피드백. "전체적으로 애매해요. 방향성이 흐려진 느낌?" 그날 야근했다. 밤 11시까지. 아내 전화 왔다. "저녁 먹었어?" "아직. 좀 이따 먹을게." 끊고 모니터 봤다. A, B, C가 다 섞인 괴물. 정체성 없는 로고. 컨셉 없는 디자인. 이게 뭐지. 돌아보기 토요일 아침. 출근 안 했다.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클라이언트 탓? 아니다. 내 탓이다. 1차 PT 때, 나는 A안을 제대로 설명 못 했다. "세리프가 전통과 신뢰를 담았다"는 말. 그게 다였다. 왜 세리프인지. 왜 이 여백인지. 왜 이 컬러인지. 브랜드 에센스를 어떻게 시각화했는지. 타깃 고객이 왜 이 디자인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지. 경쟁사와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3년 뒤 이 브랜드가 어떤 이미지로 자리 잡을지. 30분 발표에서 5분밖에 안 썼다. 나머지 25분은 B안, C안 설명. 사실 그 둘은 없어도 됐다. 비교용이었다. 근데 나는 3개 방향을 다 똑같이 취급했다. 클라이언트는 혼란스러웠을 거다. "셋 다 좋은데요?" 그럼 그때부터다. 섞어달라는 요청. "A안의 고급스러움에 B안의 감성을 더하면 어떨까요?" 나는 "네" 했다. 왜? 클라이언트니까. 돈 내는 사람이니까. 틀렸다.프로세스가 아니라 확신 월요일 오전. 그 메일 받았다. "1차안으로 가면 안 될까요?" 답장 쓰기 전에 폴더 열었다. 1차안 파일. 4월 17일. 다시 봤다. 좋았다. 지금 봐도 제일 좋았다. 왜 이걸 지키지 못했을까. 답은 간단했다. 나한테 확신이 없었으니까. "이게 답입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으니까. 클라이언트 요청에 "그건 방향이 다릅니다"라고 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디자이너가 뭐 하는 사람인가. 예쁜 거 만드는 사람? 아니다. 문제 해결하는 사람이다. 브랜드의 본질을 시각화하는 사람이다. 클라이언트보다 브랜드를 더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근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리서치는 했다. 경쟁사 분석도 했다. 무드보드도 만들었다. 근데 확신은 없었다. "혹시 틀리면 어쩌지"라는 생각. "클라이언트가 싫어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 그래서 타협했다. 결과는 시간 낭비. 3주. 클라이언트도 지쳤을 거다. 나도 지쳤다. 답장 썼다. "네, 그게 맞습니다. 1차안이 가장 브랜드 에센스에 부합합니다. 제가 제대로 설명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내일 오전에 다시 한번 PT 드리겠습니다." 화요일, 두 번째 PT 같은 회의실. 같은 사람들. 다른 건 나. 이번엔 1차안만 들고 갔다. "오늘은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프로젝터 켰다. A안 떴다. "이 로고는 단순히 예쁜 게 아닙니다." 45분 발표했다. 왜 이 서체인지. 11가지 후보 중 이걸 선택한 이유. 왜 이 여백인지. 타깃 고객의 시선 흐름 데이터. 왜 이 컬러인지. 화장품 업계 트렌드와 차별화 전략. 경쟁사 5곳 로고 비교. 우리 브랜드만의 아이덴티티. 3년 뒤 브랜드 확장 시 응용 가능성. 패키지, 웹, 매장. 끝나고 대표가 말했다. "진작 이렇게 설명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맞는 말이다. "처음부터 이게 답이었네요." 그것도 맞는 말이다. 계약서 썼다. 최종안 확정. 그날 저녁 퇴근길. 합정역. 편의점 들렀다. 맥주 2캔. 집 와서 아내한테 말했다. "확정됐어. 1차안으로." "처음 거? 그럼 수정은 왜 한 거야?" "내가 제대로 못 설명해서." 맥주 땄다. 한 모금. "다음부턴 다르게 할 거야." "뭘?" "확신 있으면 밀어붙일 거야. 안 섞을 거야." 아내가 웃었다. "그래, 브랜드 디자이너답게." 배운 것 프로세스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수정 5차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내 태도였다. 디자이너는 서비스업이 맞다. 근데 단순 주문 받는 사람은 아니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걸 주는 게 아니라. 클라이언트에게 필요한 걸 제안하는 사람이다. 그 차이를 이제 안다. 다음 프로젝트. 1차안에 확신 있으면 그것만 들고 간다. "이게 답입니다." 그렇게 말할 거다. 틀릴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적어도 시간은 낭비 안 한다. 적어도 방향은 흔들리지 않는다.5차 수정 끝에 돌아온 1차안. 3주가 알려준 건 프로세스가 아니라 확신의 중요성이었다.

프레젠테이션 전날 밤, 야근실의 진실

프레젠테이션 전날 밤, 야근실의 진실

프레젠테이션 전날 밤, 야근실의 진실 11시 30분, 시작 PT 자료 마지막 점검 시작했다. 내일 오전 10시 미팅. 클라이언트는 식음료 브랜드 런칭 준비하는 스타트업 대표. 투자 받은 돈으로 브랜딩 하는 거라 부담이 크다고 했다. 팀장이 옆에 앉았다. "로고 세 번째 안, 색상 다시 볼까?" 시작됐다. 이 시간부터가 진짜다. 오후 6시까지 완성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퇴근 전에 한 번 보자던 게 4시간째다. 슬라이드 42장. 하나씩 넘기면서 호흡 확인한다. PT는 리듬이다. 너무 빠르면 클라이언트가 못 따라온다. 너무 느리면 지루해한다. "여기 컨셉 설명 슬라이드, 레퍼런스 이미지 하나 더 넣자." 팀장 말에 레퍼런스 폴더 뒤진다. 500장 넘는다. 한 달 동안 모은 거다. 브랜드 컨셉이 '정직한 맛'. 가공 최소화, 로컬 재료. 그 느낌 살린 이미지 찾는다.자정, 디테일의 늪 폰트 크기 2pt 차이로 30분 씀. 웃긴다. 근데 중요하다. 슬라이드 14번, 브랜드 네이밍 설명 부분. 본문이 타이틀을 먹는다. 위계가 안 보인다. 18pt에서 16pt로. 행간 150%에서 160%로. 다시 본다. 낫다. 근데 뭔가 또 이상하다. 자간이다. -10 줬더니 답답하다. -5로. "박브랜드, 커피." 팀장이 캔커피 던져줬다. 세 번째다 오늘. 클라이언트가 궁금해할 질문 리스트 뽑는다. 예상 질문 15개. "로고가 너무 심플한 거 아닌가요?" "경쟁사 ㅇㅇ브랜드랑 비슷해 보이는데요?" "색상을 좀 더 밝게 하면 안 될까요?" 답변 준비한다. 심플한 이유. 경쟁사와의 차별점. 색상의 브랜드 아이덴티티 연결고리. 논리 있어야 한다. 감으로 한 거 없다. 다 이유가 있다. PT 대본 읽어본다. 소리 내서. 중얼중얼. "이 브랜드의 핵심 가치는 정직함입니다. 그래서 로고 타입은..." 어색하다. 다시. "이 브랜드는 정직함에서 시작합니다." 낫다. 1시, 이미지 교체 사건 문제 발견했다. 슬라이드 23번. 패키징 목업 이미지. 해상도 낮다. 확대하면 깨진다. 프로젝터로 쏘면 티 난다. 목업 파일 다시 연다. 일러스트레이터에서 로고 다시 배치한다. 스마트 오브젝트 업데이트. 포토샵으로 넘어간다. 그림자 다시 조정. 질감 레이어 투명도 75%에서 60%로. 30분 걸렸다. 렌더링하고 키노트에 다시 넣는다. 비교한다. 확실히 다르다. 이런 거다. 클라이언트는 못 느낄 수도 있다. 근데 우리는 안다. 프로페셔널은 디테일에 있다.팀장이 슬라이드 전환 효과 확인한다. "여기 페이드 말고 푸시로." "여기는 전환 없이 바로." 리듬 조절이다. 강조할 곳에서 멈춘다. 넘어갈 곳에서 빠르게 간다. 사운드 체크도 한다. 노트북 스피커로. 내일 회의실 스피커는 더 크다. 음악 넣은 부분 볼륨 조절. 브랜드 필름 30초짜리. BGM이 너무 크면 대사 안 들린다. 2시, 컨셉의 재확인 팀장이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보자. 우리가 전달하려는 게 뭐지?" 피곤한데 필요한 질문이다. 디테일에 빠지면 본질 잊는다. 슬라이드 1번부터 42번까지 쭉 넘긴다. 말 안 하고 그냥 본다. 브랜드 컨셉: 정직한 맛. 타겟: 건강 의식 있는 3040 여성. 핵심 메시지: 가공 없이, 있는 그대로. 비주얼 방향: 미니멀, 따뜻함, 신뢰. 맞다. 슬라이드마다 이게 보인다. 로고의 둥근 서체. 자연스러운 색상. 여백 많은 레이아웃. 다 연결된다. "좋아. 일관성 있어." 팀장이 고개 끄덕인다. 근데 또 문제 발견. 슬라이드 31번. 어플리케이션 예시 부분. 쇼핑백 목업이 너무 세련됐다. 브랜드 톤이랑 안 맞는다. 고급스러움보다 친근함이 먼저여야 한다. 이미지 교체. 폴더에서 다른 목업 찾는다. 크라프트지 느낌 나는 거. 이게 맞다. 바꾼다.2시 40분, 예상 시나리오 PT 시뮬레이션 시작한다. 팀장이 클라이언트 역할. 나는 발표자. "안녕하세요. 오늘 준비한..." "잠깐, 좀 더 편하게. 너무 격식 차리지 마." 다시. "대표님, 한 달 동안 고민한 결과 가져왔습니다. 먼저 브랜드 컨셉부터..." "좋아. 그 톤으로." 쭉 진행한다. 10분쯤 갔을 때 팀장이 끊는다. "여기서 로고 설명할 때, 왜 이 서체 선택했는지 바로 말해. 질문 나오기 전에." 맞다. 선제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대본 수정한다. "이 서체는 기하학적이지만 모서리가 둥급니다. 정직하지만 딱딱하지 않다는..." 다시 처음부터. 이번엔 20분 갔다. "색상 선택 이유 파트, 레퍼런스 이미지 먼저 보여주고 설명하자." 순서 바꾼다. 세 번째. 끝까지 갔다. 42분 걸렸다. 적당하다. 질의응답 포함하면 1시간. 클라이언트가 예약한 시간이 1시간 반. 여유 있다. 새벽 3시, 마무리 의식 마지막 체크. 파일 이름 확인. "브랜드명_PT자료_20250129_Final". 버전 관리 중요하다. 내일 아침에 급하게 수정할 수도 있다. 백업한다. 이메일로 자기 자신한테 보낸다. 클라우드에도 올린다. USB에도 복사. 노트북에 원본. 총 네 군데. 파일 날아가면 끝이다. 인쇄물 체크리스트 본다. 명함 크기로 뽑은 로고 시안 세트. 내일 아침 9시에 출력소 가서 찾는다. 실물로 보여줘야 한다. 화면이랑 다르다. 팀장이 일어났다. "고생했다. 내일 잘하자." "네. 고생하셨습니다." 사무실 불 끈다. 비상등만 남는다. 컴퓨터 슬립 모드. 내일 아침 9시 출근. 6시간 남았다. 집 가는 길. 택시 탄다. 야근비 나온다. 창밖 본다. 새벽 3시 서울. 불 꺼진 건물들. 어디선가 누군가 또 PT 준비하고 있겠지. 의식의 의미 PT 전날 밤 야근. 힘들다. 근데 필요하다. 낮에는 못 보는 게 보인다. 집중도가 다르다. 전화 안 온다. 메일 안 온다. 방해 없다. 오롯이 PT 자료에만 집중한다. 디테일 잡는 시간이다. 폰트 2pt, 여백 5px, 색상 투명도 10%. 이런 거 신경 쓴다. 클라이언트는 모를 수도 있다. 근데 우리는 안다. 이 디테일이 쌓여서 완성도가 된다. 브랜드 컨셉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다. 우리가 왜 이 디자인을 했는지. 어떤 의도인지. 무엇을 전달하려는지. 본질로 돌아간다. 팀 호흡 맞추는 시간이다. 발표는 내가 하지만 결과는 팀이 만든다. 서로 체크하고 피드백하고 조율한다. 같은 방향 본다. 그리고 각오 다지는 시간이다. 내일 PT 잘해야 한다. 클라이언트 설득해야 한다. 한 달 작업이 한 시간에 달렸다. 긴장된다. 근데 준비했다. 할 수 있다. 새벽 3시까지 하는 이유. 완벽을 위해서가 아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확신을 위해서다. 내일 PT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경쟁사가 이길 수도 있다. 클라이언트 취향이 다를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이 시간이 단순한 야근이 아니다. 브랜드 디자이너의 의식이다. 컨셉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프로페셔널의 자세를 확인하는 순간이다.내일 10시 PT. 준비됐다.

컨셉 잡는 데 한 달, 디자인은 사흘의 역설

컨셉 잡는 데 한 달, 디자인은 사흘의 역설

클라이언트는 모른다 "로고 작업 기간이 한 달이요?" 클라이언트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로고 하나 그리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리냐는 표정이다. 설명한다. 컨셉 작업에 3주, 실제 디자인은 사흘이라고. 더 의아해한다. 이해한다. 그들에게 디자인은 '그리는 것'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켜고 펜툴로 선 그으면 끝나는 것. 한 달이면 로고 30개는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사흘의 작업이 가능하려면, 앞의 3주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첫 주: 질문만 한다 프로젝트 시작. 첫 주는 디자인 파일을 안 연다. 질문만 한다. 브랜드가 지향하는 가치는 뭔가. 타겟은 누구인가. 경쟁사는 어떤 톤인가. 5년 후 이 브랜드는 어떤 이미지여야 하나. 클라이언트는 답한다. "젊고 세련되고 신뢰감 있으면서도 친근한 느낌이요." 다 원한다. 모든 걸. 불가능한 조합을. 내 일은 그 모호함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젊음"이 20대 대학생의 젊음인지, 30대 직장인의 젊음인지 구분한다. "신뢰감"이 은행의 신뢰감인지, 동네 빵집의 신뢰감인지 나눈다. 이 과정에 일주일. 디자인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클라이언트는 묻는다. "로고 시안은 언제 나오나요?" 참는다. 설명한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이게 틀어지면 나중에 로고 100개 그려도 다 헛것이라고. 둘째 주: 세상을 뒤진다 레퍼런스 수집. 핀터레스트를 뒤진다. 비핸스를 훑는다. 인스타그램을 스크롤한다. 길거리 간판을 찍는다. 잡지 광고를 오려낸다. 해외 브랜딩 사이트를 북마크한다. 500개 모은다. 그중 50개를 추린다. 다시 10개로 줄인다. 무드보드 만든다. 색감, 형태, 분위기, 질감. 이 브랜드가 살아갈 세계를 구축한다. 물리적 형태를 갖기 전에, 감각적 방향성을 잡는다. 아내가 묻는다. "아직도 로고 안 그려?" 한숨 쉰다. "이게 로고 그리는 거야." 그녀는 카피라이터라 이해한다. 글 쓰기 전에 자료 조사하는 시간. 키보드 두드리는 건 마지막 10%라는 걸.셋째 주: 말로 만든다 컨셉 정의. 이제 단어를 만든다. 이 브랜드를 설명할 3개의 키워드. 핵심 메시지 한 문장. 브랜드 에센스 정의. "혁신적"이라는 단어를 쓸까 고민한다. 너무 흔하다. "진보적"? 너무 무겁다. "전향적"? 발음이 어렵다. "새로운"? 너무 평범하다. 하루 종일 시소러스를 뒤진다. 단어 하나 정하는 데 6시간. 팀원이 묻는다. "그냥 깔끔하고 모던하게 가면 안 돼요?" 설명한다. "깔끔"과 "모던"은 컨셉이 아니라고. 그건 스타일이라고. 컨셉은 이유이고, 스타일은 결과라고. 톤앤매너 문서 작성한다. A4 15장. 색상 팔레트, 타이포그래피 방향성, 그래픽 모티브, 커뮤니케이션 톤. 로고가 태어날 환경을 세팅한다. 3주 지났다. 일러스트레이터는 아직 안 켰다. 사흘: 손이 움직인다 이제 그린다. 펜툴 잡는다. 선을 긋는다. 도형을 그린다. 변형한다. 회전한다. 조합한다. 놀랍게도 빠르다. 첫 시안이 2시간 만에 나온다. 변형안 3개가 그날 오후에 완성된다. 다음 날 컬러 조합 테스트. 그다음 날 최종 정리. 사흘. 로고 완성. 팀원들이 신기해한다. "와, 진짜 빠르시네요." 웃는다. 빠른 게 아니라고. 이미 3주 동안 머릿속으로 수백 번 그렸다고. 무드보드 만들면서 형태감을 익혔다. 컨셉 정의하면서 구조를 잡았다. 톤앤매너 쓰면서 디테일을 구상했다. 일러스트레이터를 켜는 순간, 이미 70%는 완성되어 있었다. 손은 머리를 따라갈 뿐이다.클라이언트는 또 모른다 발표 날. "한 달 작업하셨는데 시안이 3개뿐이에요?" 심호흡한다. 설명한다. 이 3개가 나오기까지 500개의 레퍼런스를 봤다고. 100가지 방향성을 고민했다고. 30개의 키워드를 검토했다고. "그래도 좀 더 다양한 스타일은 없나요?" 참는다. 다양함은 혼란이라고. 우리는 명확함을 판다고. 브랜딩은 선택이라고. 가능한 모든 걸 보여주는 게 아니라, 가장 맞는 하나를 제시하는 거라고. 설득한다. 30분 프레젠테이션. 15장 슬라이드. 컨셉부터 차근차근. 왜 이 색인지, 왜 이 형태인지, 왜 이 비율인지. "아,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클라이언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안다. 로고가 아니라 과정을 산다는 걸. 역설의 본질 디자인은 결과가 아니라 여정이다. 한 달 중 3주는 보이지 않는 작업. 클라이언트는 산출물을 못 본다. 파일이 늘지 않는다. 진척률을 측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시간이 없으면, 마지막 사흘도 없다. 컨셉 없이 그린 로고는 예쁜 그림이다. 브랜드가 아니다. 무드보드 없이 정한 색은 취향이다. 전략이 아니다. 톤앤매너 없이 만든 디자인은 일회성이다. 시스템이 아니다. 사흘의 작업이 빛나려면, 3주의 고민이 필요하다. 빙산의 원리다. 수면 위 10%가 아름다우려면, 수면 아래 90%가 단단해야 한다. 이 균형이 무너질 때 가끔 프로젝트가 틀어진다. 클라이언트가 급하다고 한다. "컨셉은 나중에 하고, 일단 로고부터 볼 수 있나요?" 거절 못 한다. 일감이 필요하니까. 그린다. 이틀 만에 시안 5개. 발표한다. 클라이언트가 말한다. "음... 뭔가 임팩트가 부족한데요?" 당연하다. 임팩트는 형태에서 오지 않는다. 맥락에서 온다. 이 로고가 왜 이래야 하는지 설명할 이유가 없으니, 설득력이 없다. 수정 들어간다. 2차, 3차, 4차. 방향성이 없으니 수정도 갈팡질팡. "좀 더 강렬하게요", "아니 너무 강한데 부드럽게요". 결국 한 달 걸린다. 컨셉 먼저 잡았으면 2주 끝날 프로젝트. 효율성의 역설이다. 빠르게 가려고 과정을 생략하면, 결국 더 오래 걸린다. 후배에게 하는 말 신입 디자이너가 묻는다. "실력을 어떻게 늘리나요?" 대답한다. "일러스트레이터 단축키 외우지 마. 브랜드 케이스 스터디해." 그는 의아해한다. 디자이너인데 툴을 배우지 말라니. 설명한다. 툴은 수단이라고. 1년이면 마스터한다고. 하지만 컨셉 잡는 법은 10년 걸린다고. 클라이언트의 모호한 요구를 구체적 방향성으로 바꾸는 능력. 그게 진짜 실력이라고. "디자인 3일, 컨셉 3주. 이 비율 익혀." 그가 메모한다.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5년차 때는 몰랐으니까. 로고 예쁘게 그리는 게 실력인 줄 알았다. 빨리 그리는 게 효율인 줄 알았다. 시안 많이 뽑는 게 성실함인 줄 알았다. 다 아니었다. 한 방향으로 깊게 파는 것. 그게 프로였다. 내가 파는 것 결국 깨달았다. 나는 로고를 파는 게 아니다. 확신을 판다. 클라이언트는 불안하다. 이 선택이 맞는지, 이 방향이 맞는지, 시장이 받아줄지. 내 일은 그 불안을 지우는 것이다. 한 달 과정의 90%는 설득이다.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고, 팀을 설득하고, 나 자신을 설득한다. "이게 맞다"는 확신을 만든다. 그 확신이 서면, 손은 자동으로 움직인다. 사흘이면 충분하다. 역으로 확신 없이 그린 로고는 석 달 걸려도 불안하다. 클라이언트도 느낀다. "뭔가 아쉬운데"라는 말이 나온다. 다시 처음부터. 결국 시간은 같다. 제대로 가면 한 달. 헤매면 석 달. 처음부터 제대로 가는 게 빠르다. 오늘도 똑같다 월요일 아침. 새 프로젝트 킥오프. 일러스트레이터는 안 연다. 노션 켠다. 무드보드 페이지 만든다. 레퍼런스 폴더 생성한다. 클라이언트가 메시지 보낸다. "중간 산출물 언제 볼 수 있을까요?" 답장 친다. "2주 후 컨셉 발표 먼저 하겠습니다." 한숨. 또 설명해야 한다. 과정의 가치를. 하지만 괜찮다. 이게 내 일이니까. 보이지 않는 90%를 만드는 것. 수면 아래를 단단히 하는 것. 그래야 수면 위 10%가 빛난다.컨셉은 시간을 먹고, 디자인은 순간에 태어난다. 그게 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