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도 야근, 나도 야근 - 업계 부부의 저녁 식탁

아내도 야근, 나도 야근 - 업계 부부의 저녁 식탁

아내도 야근, 나도 야근 - 업계 부부의 저녁 식탁

오늘도 각자 먹는다

저녁 7시 42분. 아내한테 카톡 왔다.

“오빠 저녁 뭐 먹어?” “아직. 미팅 끝나고.” “나도 수정 들어와서 못 먹을듯” “ㅇㅋ 각자”

이게 우리 부부의 일상이다. 결혼 2년차. 같은 업계 부부. 나는 브랜드 디자이너, 아내는 카피라이터. 둘 다 에이전시에서 일한다.

저녁을 함께 먹는 날이 일주일에 두세 번이면 많은 편이다. 나머지는 각자 편의점, 배달, 아니면 굶는다. 클라이언트 피드백은 오후 5시쯤 오고, 수정 요청은 칼퇴 10분 전에 온다. 그게 이 업계다.

오늘은 나도 미팅이 길어졌다. 클라이언트가 로고 시안 15개 중에 고민한다며 커피를 세 잔 더 시켰다. 결국 2시간 반. 결론은 “일단 내부 검토 후 연락드릴게요”였다.

냉장고에 남은 반찬

집에 도착한 건 9시 20분. 아내는 아직 회사다. 현관 불 꺼져 있다. 혼자다.

냉장고 연다. 김치, 계란, 햄, 우유. 어제 아내가 싸온 도시락 반찬 조금. 밥은 있다. 아내가 아침에 해놓고 간 거다.

전자레인지 돌린다. 2분 30초. 돌아가는 소리 듣고 있으면 왠지 쓸쓸하다. 결혼하면 따뜻한 밥상 차려주는 사람 있을 줄 알았는데, 우리 둘 다 차려줄 시간이 없다.

밥 먹으면서 폰 본다. 인스타그램에 친구들이 저녁 사진 올렸다. 예쁜 파스타, 와인, 분위기 있는 식당. 좋아요 누른다. 부럽진 않다. 그냥 다른 삶이다.

아내한테 메시지 보낸다. “밥 먹었어. 맛있었어. 고마워.”

읽씹이다. 바쁜가보다. 나도 미팅 중엔 못 봤으니까. 이해한다.

같은 언어로 싸운다

10시 반쯤 아내 들어왔다. 문 여는 소리, 한숨 소리.

“진짜 미치겠다.”

신발 벗으면서 하는 말이다. 나도 안다. 뭔지.

“수정?” “응. 5차.” “컨셉 바뀐 거야?” “아니, 톤앤매너 바뀜. 갑자기 MZ 타겟 아니래.” “미친.”

우리 대화는 이렇다. 설명 필요 없다. 업계 용어로 다 통한다. 컨셉, 톤앤매너, 타겟, 레퍼런스, 무드보드. 이 단어들이면 충분하다.

아내가 냉장고 열었다. 똑같은 반찬 본다. 밥 덥힌다. 나랑 똑같이.

“오빠도 야근?” “미팅 길었어. 로고 15개 보여줬는데 다 애매하대.” “ㅋㅋㅋ 그럼 20개 만들래?” “진짜 그러라 할 것 같아.”

아내 웃는다. 나도 웃는다. 이게 우리 위로다. 서로의 빡침을 이해한다. 다른 사람한테 설명하면 “그래도 돈 받잖아” 이런 말 듣는다. 하지만 우리끼린 안 그런다.

같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동료 같은 느낌이다. 부부이기도 하지만.

주말에도 각자 일한다

주말이다. 토요일 오전 11시. 아내는 노트북 켰다. 나도 태블릿 켰다.

“오빠, 나 일 좀 해야 돼.” “나도.” “미안.” “괜찮아. 나도 미안.”

우리 주말은 이렇다. 침대에 누워서 각자 일한다. 아내는 카피 수정하고, 나는 로고 작업한다. 옆에 있지만 각자 집중한다.

가끔 아내가 묻는다. “오빠, 이거 어때? ‘새로운 일상을 브랜딩하다’랑 ‘일상을 새롭게 브랜딩하다’ 중에 뭐가 나아?” “후자. 더 액티브해.”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나도 묻는다. “이 컬러 톤, 너무 무겁나? 좀 더 밝게 가야 하나?” “타겟이 누군데?” “30대 초반, 여성.” “그럼 한 톤 올려.”

서로 피드백 준다. 정확하다. 군더더기 없다. 이게 업계 부부의 장점이다. 설명 안 해도 안다. 타겟, 컨셉, 브랜드 톤 이런 거 설명 안 해도 바로 이해한다.

오후 3시쯤 아내가 노트북 덮는다. “배고파. 나가 먹을까?” “응.”

근처 국밥집 간다. 줄 서 있는 동안 아내 손 잡는다. 아내가 웃는다.

“오빠, 우리 이상한 부부지?” “왜?” “주말에 일하고, 저녁도 각자 먹고.” “그래도 괜찮은데.” “응. 나도.”

국밥 먹으면서 각자 폰 본다. 레퍼런스 찾는다. 아내는 카피 레퍼런스, 나는 디자인 레퍼런스. 식사 중에도 일 얘기한다. 하지만 불편하지 않다.

다른 부부들은 데이트 코스 짜고, 여행 계획 세우고 그러는데, 우리는 프로젝트 일정 맞춘다. 이상하긴 하다. 근데 우리한텐 맞다.

새벽 2시의 공감

어제 새벽 2시. 아내가 안 잔다. 노트북 불빛이 침실까지 샌다.

일어나서 나간다. 거실에 아내가 앉아 있다. 화면 보고 있다. 표정이 안 좋다.

“왜 안 자?” “내일 PT인데 카피가 맘에 안 들어.” “다 만들었잖아.” “근데 뭔가… 임팩트가 약한 것 같아.”

안다. 그 느낌. 나도 맨날 그렇다. 로고 다 만들어놓고 새벽에 다시 본다. 뭔가 2%가 부족한 느낌. 설명 못 하는 그 느낌.

“어디 보자.”

옆에 앉는다. 화면 본다. 카피 10개 있다. 다 괜찮다. 근데 아내는 만족 못 한다.

“이거, 톤이 너무 딱딱하지 않아?” “타겟이 기업이잖아.” “그래도 요즘은 조금 더 친근하게 가는 추세잖아.” “그럼 이거. ‘함께 만드는’ 대신 ‘우리가 만드는’으로 바꿔봐.”

아내가 쳐본다. 읽는다. 고민한다.

“좀 나은 것 같은데?” “응. 주어가 명확해져.” “고마워.”

다시 작업한다. 나도 옆에서 본다. 30분쯤 지나니까 아내가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이제 됐다.” “잘했어.” “오빠도 새벽에 이러지?” “맨날.”

둘이 웃는다. 새벽 2시에 일 얘기하면서 웃고 있다. 이상한 부부 맞다.

침대 돌아온다. 누운다. 아내가 내 손 잡는다.

“오빠.” “응.” “우리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뭐가?” “이렇게 일만 하고, 저녁도 못 먹고, 주말에도 일하고.” “음…”

생각해본다. 솔직히 답 없다. 이게 맞는 삶인지 모르겠다. 주변에선 일과 삶의 균형 얘기한다. 워라밸. 우리한텐 없다.

근데 후회는 안 한다. 우리 둘 다 이 일 좋아한다. 클라이언트한테 빡칠 때도 많지만, 좋은 결과물 나올 때 희열 있다. 그걸 서로 이해한다.

“괜찮아. 우리한텐 이게 맞는 거 같아.” “그치?” “응. 다른 사람들이 이해 못 해도, 우린 서로 이해하잖아.”

아내가 고개 끄덕인다. 잠든다.

비어 있는 식탁의 의미

어제 퇴근하고 마트 갔다. 장 봤다. 고기, 야채, 과일. 장바구니 가득 담았다.

집 와서 아내한테 사진 보냈다. “오늘 내가 저녁 만들게.” “진짜? 무슨 일이야ㅋㅋㅋ” “그냥. 오늘은 일찍 끝나서.”

6시쯤 퇴근했다. 드문 일이다. 프로젝트 없는 주간이라 가능했다.

요리 시작한다. 삼겹살 굽고, 야채 썰고, 된장찌개 끓인다. 요리 못 하지만 할 수는 있다. 유튜브 보면서 한다.

7시 반. 상 차렸다. 그럴듯하다. 아내한테 메시지 보낸다. “다 됐어. 언제 와?” “30분 후. 금방 가.”

기다린다. TV 켠다. 뉴스 본다. 식탁 본다. 두 사람 자리. 오랜만이다.

8시. 문 열린다. 아내 들어온다. 식탁 본다. 놀란다.

“헐, 대박.” “앉아.” “오빠가 이걸 다?” “응. 맛있을지 모르겠다.”

같이 먹는다. 맛은 그냥 그렇다. 근데 아내가 계속 맛있다고 한다. 거짓말인 거 안다. 근데 기분 좋다.

“오빠, 고마워.” “별거 아니야.” “아니야. 이게 되게 큰 거야.”

맞다. 큰 거다. 우리한텐. 함께 먹는 저녁. 일주일에 두세 번밖에 안 되는 이 시간이 우리한테는 특별하다.

밥 먹으면서 일 얘기 안 한다. 오늘은 다른 얘기한다. 주말에 뭐 할지, 다음 달 여행 갈지, 친구들 만날지. 평범한 대화.

설거지도 같이 한다. 아내가 설거지하고, 나는 닦는다. 싱크대 앞에서 나란히 선다. 아내가 갑자기 웃는다.

“뭐?” “신기해서. 우리 이렇게 같이 설거지하는 거.” “자주 못 하지.” “응. 그래서 더 좋은 거 같아.”

맞다. 자주 못 해서 더 좋다. 비어 있는 식탁이 일상이라서, 함께하는 식탁이 더 소중하다.

결국 우리는

오늘 아침. 출근 준비하는데 아내가 도시락 쌌다. 두 개.

“오빠 거.” “어? 나 점심 약속 있는데.” “그럼 저녁에 먹어. 야근할 거잖아.” “음… 맞네.”

아내도 야근할 거다. 나도 안다. 내일 PT 있다고 어제 말했다.

“오빠도 오늘 늦지?” “응. 미팅 있어.” “그럼 저녁 각자?” “응. 미안.” “괜찮아. 나도 어차피 야근.”

현관에서 신발 신는다. 아내도 준비한다. 같이 나간다. 엘리베이터 탄다.

1층 내린다. 밖으로 나간다. 지하철역까지 같이 걷는다. 손 잡는다.

“오빠.” “응.” “오늘 힘내.” “너도.”

역 앞에서 헤어진다. 아내는 2호선, 나는 6호선. 반대 방향이다.

돌아선다. 계단 내려간다. 출근길 사람들 사이에서 걷는다.

생각한다. 우리 부부 이상한가. 저녁도 각자 먹고, 주말에도 일하고, 함께 있어도 각자 노트북 보고.

근데 괜찮다. 우리한텐 맞다. 같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동료. 서로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 그게 우리다.

비어 있는 식탁이 외롭지 않은 이유.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을 알고 있어서다. 언젠가 함께 앉을 거라는 걸 알아서다.

그리고 그 사람도 똑같은 마음이라는 걸 아니까. 그걸로 충분하다.

오늘도 야근이다. 아내도 야근이다. 내일도 그럴 거다. 근데 주말엔 함께 국밥 먹을 거다. 그 정도면 됐다.

지하철 탄다. 앉는다. 아내한테 메시지 보낸다.

“사랑해.”

읽씹이다. 바쁜가보다. 괜찮다. 나중에 답 올 거다. “나도”라고.

그거면 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매일의 저녁이 아니라, 이해하는 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