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PT에서 떨어진 프로젝트, 한 달의 무게
- 05 Dec, 2025
경쟁 PT에서 떨어진 프로젝트, 한 달의 무게
알림은 금요일 저녁에 왔다
“고민 많이 하셨을 텐데, 아쉽게도…”
메일 첫 줄만 봐도 안다. 떨어졌다는 거.
한 달 전부터 준비한 F&B 브랜드 리뉴얼 프로젝트. 경쟁 PT 3사. 우리는 가장 먼저 제안했다. 컨셉부터 BI 시안, 패키징 목업, 공간 적용까지. 75페이지 제안서. 리허설만 다섯 번.
대표님이 “이번엔 가능성 있다”고 했다. PT 끝나고 클라이언트가 “방향성이 참신하다”고 했다. 담당자가 “내부 검토 후 연락드린다”고 했다.
2주를 기다렸다. 금요일 저녁 6시 47분에 메일이 왔다.
“다른 업체로 결정했습니다.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한 달이 한 줄로 정리됐다.

무료 컨설팅이라는 이름
경쟁 PT의 가장 큰 문제. 작업은 하는데 돈은 안 나온다.
이번 프로젝트. 3주 동안 들어간 시간을 계산했다.
- 클라이언트 브리핑 및 현장 답사: 8시간
- 컨셉 리서치 및 무드보드: 40시간
- BI 시안 작업 (3안): 60시간
- 패키징 목업 및 공간 시뮬레이션: 32시간
- 제안서 작성 및 리허설: 28시간
총 168시간. 3명이 투입됐으니 실제로는 더 많다.
시급으로 계산하면 안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안 하면 프로젝트는 다른 에이전시로 간다. 딜레마다.
대표님은 “투자라고 생각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경쟁 PT로 따낸 프로젝트도 많다. 하지만 떨어지면 그냥 투자 손실이다.
클라이언트 입장도 이해는 간다. 여러 안을 보고 싶은 거. 그런데 가끔 생각한다. 우리 컨셉 참고해서 다른 데 작업 맡기는 거 아닌가.
증명할 방법은 없다.

결과물을 보게 되는 순간
3개월 뒤. 그 브랜드가 론칭했다.
인스타그램에서 봤다. 업계 지인이 태그한 피드. 새로 나온 패키징 사진.
우리가 제안한 방향과 완전히 달랐다.
우리는 ‘로컬 정체성’을 강조했다. 한글 타이포, 지역 컬러, 수제 느낌. 클라이언트가 PT 때 “이런 느낌 좋다”고 했던 바로 그 방향.
근데 결과물은 미니멀 모던. 산세리프 영문, 블랙 앤 화이트, 고급 라인. 정반대였다.
이긴 에이전시를 찾아봤다. 우리보다 큰 곳. 포트폴리오가 화려했다. 대기업 프로젝트가 많았다.
아. 처음부터 우리 스타일이 아니었구나.
클라이언트는 로컬 정체성에 끌렸던 게 아니라 ‘안전한 고급화’를 원했던 거다. 우리 제안은 그냥 참고용. 트렌드 확인용.
씁쓸했다.
우리 안은 뭐가 문제였나
회사에서 복기 미팅을 했다.
대표님: “PT는 잘했어. 컨셉도 좋았고.” 실장님: “근데 클라이언트가 원한 건 다른 거였나 봐.” 나: “그럼 PT 전에 뭘 더 물어봤어야 했나요?”
답은 없었다.
브리핑 때 클라이언트가 한 말들.
- “참신한 방향 원해요”
- “너무 흔한 건 싫어요”
-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뚜렷했으면”
우리는 그대로 했다. 참신하게, 차별화되게, 정체성 뚜렷하게.
근데 선택받은 건 안전한 고급 디자인이었다.
클라이언트는 본인도 모른다. 정확히 뭘 원하는지. 여러 안 보고 나서야 안다. “아, 이게 아니었구나” 또는 “이게 맞네”.
그래서 경쟁 PT가 존재하는 거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하나의 옵션일 뿐.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그래도 배운 것들
경쟁 PT 떨어질 때마다 체크리스트가 늘어난다.
이번에 추가된 항목들.
-
브리핑 때 레퍼런스 더 많이 물어볼 것
- “참신한 디자인”이 뭔지 구체적 이미지로 확인
- 좋아하는 브랜드, 싫어하는 브랜드 명확히
-
의사결정권자 파악
- 대표가 결정하나, 마케팅팀이 결정하나
- PT 때 누가 제일 반응 좋았나
-
예산과 타임라인 현실성
- 우리가 제안한 방향, 그 예산으로 가능한가
- 클라이언트가 생각한 예산과 괴리는 없나
-
경쟁사 스타일 사전 조사
- 같이 경쟁하는 에이전시 포트폴리오 확인
- 우리 방향과 차별점 명확히
완벽하게 준비해도 떨어질 수 있다. 그게 경쟁 PT다.
근데 최소한 “우리가 뭘 놓쳤나” 정도는 알 수 있다.
한 달의 무게를 견디는 법
야근한 날들. 리허설하면서 고민한 시간들. 퇴근길에 컨셉 다듬던 순간들.
떨어지면 다 의미 없어지나.
아니라고 생각하려 한다.
이번에 만든 컨셉. 다른 프로젝트에 변형해서 쓸 수 있다. 무드보드 리서치하면서 찾은 레퍼런스들. 포트폴리오 업데이트 소스로 쓸 수 있다. PT 준비하면서 연습한 프레젠테이션. 다음 미팅에서 더 잘할 수 있다.
손해는 손해다. 근데 완전히 버려지는 건 아니다.
에이전시 일이 원래 그렇다. 10개 제안하면 3개 붙는다. 나머지 7개는 경험치가 된다.
레벨업하는 데 필요한 과정.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 위로는 안 된다. 떨어진 건 떨어진 거다.
그래도 다음 프로젝트는 준비한다. 또 경쟁 PT일 거다.
경쟁사 결과물을 보는 태도
같은 업계 사람들끼리 하는 말이 있다.
“저 프로젝트 우리도 PT 들어갔었는데.”
서로 안다. 누가 어떤 프로젝트 경쟁했는지. 누가 이겼는지.
결과물 나오면 평가한다. 당연하다. 디자이너니까.
“우리 안이 더 나았는데”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저게 나은 것 같다”고 인정할 때도 있다.
중요한 건 감정 섞지 않기.
- 저건 왜 저렇게 했지? (호기심)
- 클라이언트는 왜 저걸 선택했을까? (분석)
- 우리 안과 뭐가 달랐나? (비교)
질투나 자괴감은 도움 안 된다. 배우려는 태도만 필요하다.
가끔 놀랄 때도 있다. “어, 우리 컨셉이랑 비슷한데?” 싶을 때. 물론 증거는 없다. 그냥 비슷할 수도 있다. 트렌드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니까.
그래도 씁쓸하긴 하다.
결국 남는 것
프로젝트 파일 폴더를 정리했다.
“2024_F&B브랜드리뉴얼_경쟁PT_미선정”
폴더명부터 서글프다.
안에 들어있는 파일들.
- 컨셉 키워드 100개
- 무드보드 15장
- BI 시안 AI 파일 3개
- 패키징 목업 PSD 8개
- 제안서 최종본 PDF
용량 2.3GB. 한 달의 무게.
당장은 안 쓸 거다. 근데 언젠가 비슷한 프로젝트 오면 꺼내볼 거다. “아, 이때 이런 거 했었지.” 하면서.
디자이너의 하드 드라이브에는 이런 폴더가 쌓인다. 빛을 못 본 작업들. 클라이언트 앞에 한 번 서고 사라진 컨셉들.
버리진 않는다. 언젠가 쓸 날이 온다. 다른 형태로든.
그게 위로가 될까. 잘 모르겠다.
그래도 지우진 않는다.
경쟁 PT는 복권이 아니다. 실력과 운이 섞인 게임이다. 떨어져도 경험은 남는다. 그걸로 만족해야 한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