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10개 보여달라는 클라이언트와의 첫 미팅

로고 10개 보여달라는 클라이언트와의 첫 미팅

로고 10개, 10개의 철학

오늘 오전 10시. 새 클라이언트 미팅.

여성 의류 브랜드. 창업 3년차. 리브랜딩 프로젝트. 예산은 괜찮은 편. 팀은 3명. 좋은 출발이다.

미팅 하루 전에 메일이 왔다. “디자이너님, 로고 후보는 10개 정도 봐도 될까요?”

그 문장을 읽고 한숨을 쉬었다. 에이전시 일 9년. 그 문장을 5000번은 받은 것 같다.

로고 10개.

말 그대로 10개가 아니라는 걸 안다. 클라이언트는 “선택지가 많으면 마음에 드는 게 나올 거다”라고 생각한다. 확률 게임. 복권처럼. 내가 하는 일을 복권 판매기처럼 본다.

그런데 내가 만드는 건 복권이 아니다.


준비 과정

지난주부터 4일을 썼다.

첫날: 클라이언트 자료 정독. 기존 브랜드 스토리. 타겟 고객. 경쟁사 분석. 설립자 인터뷰 영상. SNS 피드. 쇼룸 사진.

왜 이렇게까지 하나. “그냥 로고잖아”라고 하면 웃긴다. 로고는 브랜드 철학이 요약된 거다. 한 줄짜리 시.

이 브랜드는 뭐였나.

“자연에서 얻은 소재로 만드는 옷. 지속가능성. 근데 럭셔리한 느낌. 윤리적이지만 세련된.”

흔한 요구사항. 그런데 이게 로고에 들어가려면?

단순함과 복잡함의 균형. 자연스러움과 정교함. 친근함과 프리미엄감. 이 모든 게 한 심볼에.

둘째 날: 무드보드. 30개 이미지. 컬러. 타이포그래피. 질감. 기존 로고들 분석. 뭐가 작동하고 뭐가 안 하는지.

셋째 날: 아이디어 스케치. 손으로 그렸다. 50개. 100개. 구분이 안 날 때까지.

넷째 날: 그 중에 10개를 고르는 작업.

여기가 진짜 고민이었다.



10개를 고르는 철학

그냥 10개를 고르는 게 아니었다.

1번: 도형 기반. 기하학적. 모던. 미니멀. “심플할 거면 이거다” 카테고리.

2번: 문자 기반. 브랜드 이니셜을 심벌화. 개성 강함. 타이포 강조. “개성 있을 거면 이거다” 카테고리.

3번: 자연 모티프. 풀. 생장. 오르가닉. “지속가능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줄 거면 이거다” 카테고리.

4번: 추상 기하. 위 1번보다 좀 더 따뜻함. 손으로 그린 느낌. “미니멀하지만 감정있을 거면 이거다” 카테고리.

5, 6, 7, 8, 9, 10번: 그 조합들. 변형들. 톤 다른 버전들.

하나하나가 다른 브랜드 철학을 담고 있었다.

“선택의 폭을 넓혀드리는 거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정반대다.

각각 다른 방향을 제시해서 클라이언트가 “아, 우리는 이 방향이구나”를 깨달으라고 한 거다. 10개 모두에서 선택하라는 게 아니라, 10개 중에서 우리 브랜드의 진짜 방향이 뭔지 발견하라는 거다.

근데 그걸 설명해야 하는데. 그게 문제다.


미팅룸에서

오전 10시 40분. 회의실. 내가 벽에 10개를 붙였다. A4 사이즈로 확대해서.

클라이언트 3명이 들어왔다. 설립자 여성, 마케팅 담당, 운영 담당.

“먼저, 왜 10개를 드렸는지 설명하고 싶어요.”

나는 1번부터 시작했다.

“1번은 도형 기반입니다. 가장 미니멀한 방향. 경쟁사 보니까 이 톤의 브랜드가 없었어요. 프리미엄 마켓에서 심플함은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설립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2번은 좀 다릅니다. 타이포 기반. 브랜드의 이니셜을 디자인 요소로 썼어요. 브랜드 이름을 강하게 드러내야 한다면 이 방향.”

마케팅 담당이 “오, 이건 좀 임팩트 있네”라고 했다.

“3번은 자연 모티프예요. 풀의 생장 이미지를 추상화했습니다. 브랜드의 핵심 메시지인 지속가능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면 이 쪽이…”

여기서 끊겼다.

설립자가 물었다. “근데 어떤 게 제일 좋으세요?”



그 질문 다시

“어떤 게 제일 좋으세요?”

에이전시에서 가장 자주 받는 질문. 동시에 가장 답하기 힘든 질문.

“제일 좋은 건 없어요.”라고 답할 수는 없다. 프로페셔널하지 않다. 그러면 너희가 뽑아라, 라는 식인데, 클라이언트는 그걸 원하는 게 아니다. 보험이 필요하다.

반대로 “3번이 제일 좋습니다”라고 단정하면 어떻게 되나.

클라이언트는 3번을 안 고르는 방향으로 간다. 항상 그렇다. 디자이너가 추천한 게 오히려 거리감을 만든다. 마치 정답을 주는 느낌이라 압박감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다르게 답했다.

“각 방향이 다른 브랜드 철학을 담고 있어요. 어떤 게 제일 중요한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1번은 ‘심플한 프리미엄’이 중요하면. 자신감 있고 세련된 브랜드.”

“2번은 ‘브랜드 네임 강화’가 중요하면. 기억에 남고 개성 있는 브랜드.”

“3번은 ‘가치관 표현’이 중요하면. 메시지가 명확하고 신뢰감 있는 브랜드.”

설립자가 생각에 잠겼다.

10초. 20초. 30초.

“음… 우리가 3개 중에 고르면 되나요?”


선택지의 함정

좋은 질문이었다.

“네, 그 3개 중에서 고르시고. 혹은 조합도 가능해요.”

내가 말했다. 그런데 심장이 철렁했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면서 느낀 거다.

“이 10개는 사실 선택지가 아니다.”

선택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방향 가이드인데.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는 “10개 중에 고르라”는 다중선택 문제다.

타이틀이 부족했다.

“로고 후보 10개”라고 하니까 후보처럼 느껴진다. 후보 중 하나를 “고르는” 느낌. 마치 회의실에 옷 10벌을 놔두고 “어떤 거 입을래?”라고 하는 느낌.

내가 하려던 건 다른 거였다.

“브랜드 방향 10개”라고 했어야 한다. 다중선택이 아니라 “너희 브랜드는 이 10개 중 어느 쪽인가”를 질문하는 거다.

그러려면 설명이 달라져야 한다.

“여기 10개는 10개의 다른 브랜드입니다. 1번을 고르면 그 브랜드는 이래요. 2번을 고르면 저래요.”

근데 나는 뭐를 했나.

“이렇게도 가능하고 저렇게도 가능하고…”

선택을 위한 선택지를 10개 제시했다. 그 결과는?

클라이언트의 머리는 좀 더 복잡해진다. 선택권은 많아진다. 근데 브랜드는 더 약해진다.



많은 선택지의 대가

심리학자들이 말한다. 너무 많은 선택지는 선택 자체를 방해한다.

“선택 마비(choice paralysis)”

아이스크림 30가지보다 7가지일 때 더 빨리 고르고 더 만족한다.

같은 원리다.

로고 10개를 보면, 클라이언트의 뇌는 다음을 한다.

1단계: “다 괜찮은데?” 2단계: “근데 뭐가 다른데?” 3단계: “아, 이건 이 느낌이고 저건 저 느낌이구나” 4단계: “그럼 뭐가 우리 브랜드지?” 5단계: “모르겠다. 일단 투표하자”

결국 민주주의다. 회의실 3명이 각각 고르는 로고가 다르다.

“1번이 좋아요” “3번이 낫지 않나요?” “2번은?”

그리고 타협의 산물이 나온다. “1번의 심플함에 3번의 자연감을 담으면?”

그게 맞나? 아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타협의 산물이 아니다. 결정이다.

“우리 브랜드는 이것이다.”

그런 명확함이 나와야 한다.


다시 생각해볼 것들

퇴근하고 집에 가면서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가.

클라이언트가 “로고 10개”를 요청했을 때, 나는 뭘 해야 했나.

1번 선택: 그냥 10개를 다 만든다. (나는 이걸 했다)

2번 선택: “로고는 3개만 보여드리는 게 낫습니다. 각각 다른 브랜드 철학이거든요. 10개면 브랜드가 약해져요”라고 설득한다.

차이가 뭔가.

1번은 “클라이언트 요청 수용”. 2번은 “디자인 전문성 발휘”.

두 개가 다르다.

9년을 일했는데, 내가 많이 한 건 1번이다. 에이전시다. 클라이언트 말을 듣는 게 직업이다. “일을 크게 벌려라”라고 배운다. 그래야 비용도 많이 나오고 프로젝트도 크다.

근데 거기서 뭔가를 잃는다.

설득력. 메시지. 명확함.

3개의 뚜렷한 방향보다, 10개의 애매한 방향이 더 “안전”하게 느껴진다. 선택권이 많으니까. 하나 떨어져도 9개가 남으니까.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게 더 위험하다.

클라이언트는 선택 아래서 갈팡질팡한다. 디자이너는 피드백을 예측할 수 없다. 누군가는 1번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3번을 좋아하니까.

수정 사이클이 길어진다.

“1번의 심플함 + 3번의 느낌 + 5번의 컬러”를 섞으라는 식의 피드백. 그건 10번을 해봐도 안 나온다.

“선택지를 줄여야 한다.”

그게 결론이다.


내일의 이메일

내일 아침, 나는 메일을 보낼 거다.

클라이언트에게.

“미팅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니, 로고는 3개 방향으로 집중하는 게 낫겠습니다.”

“각각 다른 브랜드 철학을 명확하게 담아서, 3개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훨씬 강한 브랜드를 만듭니다.”

“10개 중 골라주세요보다, 이 3개 중 ‘너희 브랜드는 이거다’라고 결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클라이언트가 거부할 수도 있다. “아니, 10개는 어디 갔어요?”

그럼 설명한다.

“로고 개수가 아니라 브랜드 철학이 중요하거든요.”

이게 9년 후 배운 거다.

선택지를 많이 주는 게 아니라, 선택을 쉽게 해주는 게 디자이너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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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팅룸 출입 횟수만 9년. 로고 “10개” 요청은 이제 웃길 일이다.


너무 많은 선택지는 선택 자체를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