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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드보드
- 09 Dec, 2025
무드보드 만들 때 가장 행복한 이유
월요일 오전 10시 출근했다. 노트북 켰다. 오늘부터 새 프로젝트다. 클라이언트는 신생 디저트 브랜드. 키워드는 '따뜻한', '수제', '정성'. 흔하다. 하지만 좋다. 시작할 수 있으니까. 메일함에 레퍼런스 20개. 훑어봤다. 다 비슷하다. 파스텔톤, 손글씨 느낌, 크래프트지. 예상했다. 팀장이 물었다. "언제까지 컨셉 나올 것 같아?" "이번 주 금요일이요." 속으로는 수요일에 끝낼 생각이다. 무드보드 만들 시간이 필요하니까.핀터레스트를 열 때 핀터레스트 켰다. 로그인했다. 비공개 보드 새로 만들었다. 이름은 'Dessert_Brand_241208'. 검색창에 'artisan dessert'를 쳤다. 이미지가 쏟아진다. 스크롤한다. 저장한다. 또 스크롤한다. 또 저장한다. 10분 지났다. 이미지 32개. 아직 멀었다. 'craft packaging', 'warm color palette', 'handmade aesthetic', 'cozy cafe interior'. 검색어를 바꿔가며 계속한다. 점심시간이 됐다. 배고프지 않다. 계속한다. 동료가 밥 먹자고 했다. "조금 있다가요." 대답하고 계속 스크롤한다. 이 시간이 좋다. 아무도 뭘 물어보지 않는다. 클라이언트 전화도 없다. 그냥 나와 이미지만 있다.이미지를 고르는 기준 저장한 이미지 78개. 많다. 줄여야 한다. 다시 본다. 하나씩 클릭한다. 이 이미지는 왜 골랐지? 색깔? 질감? 분위기? 답이 명확한 건 남긴다. 애매한 건 뺀다. 베이지 배경에 크림 얹은 타르트 사진. 좋다. 색이 따뜻하다. 질감이 살아있다. 남긴다. 미니멀한 흰색 패키징 사진. 깔끔하다. 하지만 차갑다. 우리 브랜드랑 안 맞는다. 뺀다. 손글씨 타이포그래피. 너무 흔하다. 하지만 '수제' 느낌은 확실하다. 일단 남긴다. 나중에 다시 볼 거다. 30분 지났다. 이미지 42개로 줄었다. 이 과정이 좋다. 내 취향이 아니라 브랜드 취향을 만드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블랙은 이번 프로젝트에 없다. 대신 따뜻한 오렌지와 크림색만 남았다. 피그마에 정리할 때 피그마 켰다. 새 파일. 이름은 'Moodboard_Dessert'. 프레임 만들었다. 1920x1080. 배경은 연한 아이보리. 저장한 이미지를 하나씩 드래그한다. 피그마 안으로. 배치한다. 크기 조절한다. 겹친다. 떨어뜨린다. 다시 모은다. 처음엔 질서 없다. 그냥 놓는다. 느낌대로. 10개 정도 놓으니까 보인다. 어떤 색이 많은지. 어떤 질감이 반복되는지. 크림색 많다. 베이지도. 오렌지는 포인트로. 질감은 종이 질감, 크림 질감, 나무 질감. 타이포그래피 추가한다. 세리프체 3개, 손글씨체 2개, 산세리프 1개. 폰트 이름 적어둔다. 나중에 쓸 거다. 배치 다시 한다. 색 순서대로. 왼쪽은 밝은 색, 오른쪽은 포인트 컬러. 한 시간 지났다. 보드가 모양 갖췄다.텍스처 파일을 뒤질 때 텍스처가 필요하다. 크래프트지, 린넨 천, 거친 종이. 외장하드 꺼냈다. 'Texture_Library' 폴더 열었다. 5년 치 텍스처가 있다. 스크롤한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다 좋다. 크래프트지 텍스처 12개 골랐다. 피그마에 올린다. 투명도 조절한다. 20%쯤. 배경으로 깐다. 분위기 달라진다. 따뜻해진다. 손맛 느껴진다. 동료가 지나가다 봤다. "오, 분위기 좋은데요?" 고맙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컬러칩 만든다. 이미지에서 스포이트로 색 뽑는다. 헥사코드 복사한다. 정리한다. 메인 컬러: #F4E8D8 (크림 베이지)서브 컬러: #E8B89A (따뜻한 오렌지)포인트: #D97852 (테라코타) 이 세 가지면 된다. 더 많으면 복잡하다. 처음 슬라이드 보여줄 때 금요일 됐다. 오전 11시. 팀 리뷰 시간. 피그마 화면 공유했다. 무드보드 보여줬다. 팀장이 봤다. 말없이 스크롤했다. 2분 지났다. "좋네요. 방향 맞는 것 같아요." 디자이너 두 명도 봤다. "컬러 예쁘다", "질감 살아있네". 좋다. 이렇게 시작하는 게 좋다. 무드보드 없이 로고 시안부터 보여주면 항상 싸운다. "왜 이 색이에요?", "이 폰트는 왜 선택했어요?". 설명하느라 에너지 다 쓴다. 무드보드 먼저 보여주면 다르다. 브랜드 느낌 먼저 공유된다. 로고 시안 나와도 "아, 무드보드 느낌이네요" 하고 넘어간다. 이게 중요하다. 설명 줄이는 거. 감각 공유하는 거. 클라이언트 미팅 전날 밤 화요일 저녁 9시. 내일 클라이언트 미팅이다. 무드보드 다시 본다. 뭔가 부족하다. 이미지 하나 더 추가한다. 손으로 반죽 치대는 사진. 좋다. 슬라이드 만든다. 키노트 켰다. 무드보드 이미지 복사. 붙여넣기. 첫 페이지: 무드보드 전체두 번째: 컬러칩만 크게세 번째: 텍스처 클로즈업네 번째: 타이포그래피 레퍼런스 여기에 설명 달았다. "따뜻하지만 세련된""수제이지만 촌스럽지 않은""정성스럽지만 무겁지 않은" 아내가 물었다. "또 야근?" "아니, 거의 끝났어." 사실 끝났다. 그냥 계속 보고 싶다. 내일 클라이언트가 어떤 반응 보일지 궁금하다. 미팅 당일, 오후 2시 클라이언트 오피스. 화이트보드 있는 작은 회의실. 대표님, 마케터, 외주 컨설턴트. 세 명 앉았다. 내 노트북 연결했다. 빔 프로젝터 켰다. "로고 시안 보기 전에 무드보드 먼저 보여드릴게요." 슬라이드 넘겼다. 무드보드 나왔다. 대표님 눈빛 달라졌다. "아, 이거 진짜 우리 브랜드네요." 마케터가 사진 찍었다. "이 색들 괜찮아요. 따뜻한데 고급스러워요." 컨설턴트는 말없이 끄덕였다. 15분 동안 무드보드만 얘기했다. 로고는 아직 안 봤다. "이 느낌으로 가면 될 것 같아요." 대표님 말이다. 좋다. 이게 무드보드의 힘이다. 감각을 언어로 바꾸지 않는다. 이미지로 보여준다. 색으로 보여준다. 질감으로 보여준다. 설명 필요 없다. 보면 안다. 광학 정보를 감정으로 브랜드 디자인은 번역이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건 결국 감정이다. 고객이 우리 브랜드 보고 어떻게 느꼈으면 좋겠는가. "따뜻하게", "믿음직하게", "세련되게". 이건 추상적이다. 이대로는 디자인 못 한다. 무드보드는 이걸 구체적으로 만든다. '따뜻하게' → 크림 베이지, 손글씨, 크래프트지 텍스처'믿음직하게' → 세리프체, 자연스러운 사진, 정갈한 레이아웃'세련되게' → 여백, 절제된 컬러, 밸런스 잡힌 구도 추상이 구상 된다. 감정이 이미지 된다. 이게 내가 하는 일이다. 번역자. 감정의 통역사. 클라이언트는 느낌 얘기한다. 나는 그걸 시각으로 바꾼다. 무드보드는 그 번역서다. 무드보드 만들 때만 순수하다 프로젝트 진행되면 복잡해진다. 클라이언트 의견. 팀 의견. 트렌드. 경쟁사. 예산. 일정. 다 고려해야 한다. 디자인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무드보드 만들 땐 다르다. 그냥 좋은 이미지 고른다. 어울리는 색 찾는다. 맞는 텍스처 배치한다. 정치 없다. 설득 필요 없다. 순수하게 감각만 쓴다. 이게 행복한 이유다. 디자이너로서 가장 창의적인 순간. 아무도 간섭 안 하는 순간. 내 감각 믿고 가는 순간. 무드보드 만들 때만큼은 내가 온전히 디자이너다. 저장해둔 무드보드 폴더 외장하드에 폴더 있다. 'Moodboards_Archive'. 2016년부터 쌓였다. 84개 프로젝트. 가끔 연다. 옛날 무드보드 본다. 첫 직장 때 만든 거 보면 웃긴다. 이미지 너무 많다. 정리 안 됐다. 그래도 열심히 했다. 3년 차 무드보드는 깔끔하다. 미니멀 유행이었다. 다 비슷비슷하다. 요즘 만든 건 다르다. 절제됐지만 따뜻하다. 정리됐지만 지루하지 않다. 실력 늘었다는 증거다. 무드보드는 거짓말 못 한다. 그때 내 감각이 그대로 보인다. 10년 뒤에도 이 폴더 열어볼 거다. 2024년 무드보드 보면서 뭐라 생각할까. "이때는 이런 걸 좋아했구나" 할까. "아직도 이 감각은 유효하네" 할까. 궁금하다.무드보드 만들 때가 가장 행복한 건, 디자인의 이유를 찾는 시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