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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 Dec, 2025
포트폴리오 사이트 리뉴얼 - 1년마다 나를 갈아내기
또 시작이다 포트폴리오 사이트 리뉴얼. 올해로 9년차니까 아홉 번째다. 매년 이맘때쯤 되면 내 사이트가 눈에 안 들어온다. 작년에 만든 건데 이미 낡아 보인다. 폰트도, 레이아웃도, 심지어 올린 작업들도. 아내가 물었다. "또 만들어? 작년 거 괜찮았는데." 괜찮았다. 그때는. 지금은 아니다. 금요일 밤 11시. 커피 내리고 맥북 켰다. Figma 새 파일. 이름은 'Portfolio_2024_v1'. 내년에는 'Portfolio_2025_v1'을 만들겠지. 그렇게 계속.작년의 나는 틀렸다 2023년 사이트를 연다. 메인 화면에 굵은 고딕체로 "BRAND IDENTITY DESIGNER". 크게 박아놨다. 지금 보니까 너무 직설적이다. 왜 이렇게 증명하려고 했을까. 스크롤 내린다. 케이스 스터디 5개. 설명이 길다. 컨셉 과정을 3단계로 나눠서 보여주고, 무드보드 이미지가 8장씩 들어가 있다. 클라이언트한테 설명하듯 써놨다. 문제는 이거다. 누가 다 읽어? 나도 안 읽는다. 작년의 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전문성이라고 믿었다. 틀렸다. 지금 생각은 다르다. 결과물 하나가 열 장의 과정 설명보다 강하다. About 페이지를 본다. "브랜드의 본질을 찾아 시각화하는 디자이너입니다." 이런 말 쓰는 디자이너 천 명은 된다. 나만의 말이 아니다. 복사 붙여넣기다. 사이트를 끈다. 부끄럽다. 동시에 다행이다. 부끄러워할 수 있다는 건 성장했다는 뜻이니까.매년 버리는 것들 2020년 사이트. 검은 배경에 흰 글씨. 너무 힙하고 싶었다. 지금 보면 가독성이 바닥이다. 2021년 사이트. 반응형 안 만들었다. 모바일에서 깨진다. 그해에는 데스크톱만 생각했다. 2022년 사이트. 애니메이션을 20개 넣었다. 로딩이 느리다. 인터랙션에 취해 있었다. 매년 버린다. 작년에 집착했던 것들을. 폰트, 컬러, 구조, 말투. 전부 다시 쓴다. 이게 낭비냐고? 아니다. 이게 기록이다. 포트폴리오는 나의 현재를 보여주는 도구다. 과거가 아니라. 작년의 나는 작년 사이트에 담겨 있다. 올해의 나는 다르다. 다른 사람한테 다른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클라이언트는 과거의 나를 고용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를 본다. 그러니까 사이트도 지금이어야 한다.올해는 덜어낸다 새 사이트 컨셉. 한 줄로 정했다. "작업만 보여준다." 메인 화면에 프로젝트 썸네일 9개. 그리드로. 텍스트는 프로젝트 이름 하나. 그게 끝이다. 클릭하면 결과물만. 로고, 패키지, 어플리케이션. 큰 이미지로. 설명은 세 줄. 클라이언트, 연도, 한 줄 컨셉. 과정은 뺀다. 무드보드도 뺀다. 나는 나한테만 의미 있다. 보는 사람한테는 결과가 전부다. About 페이지도 바꾼다. "9년차 브랜드 디자이너. 서울에서 일한다. 이메일 주세요." 끝. 간단하다. 간단한 게 어렵다. 덜어내는 게 더하는 것보다 힘들다. 폰트는 산세리프 하나. 컬러는 검정, 흰색, 회색. 그게 다다. 작업이 색이다. 사이트는 배경이다. Figma에서 목업을 본다. 깔끔하다. 작년보다 훨씬. 5년 전보다는 비교도 안 된다.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는 작업이 아니다 여기서 착각하면 안 된다. 포트폴리오 사이트는 작업 모음집이 아니다. 나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어떤 프로젝트를 선택하는가. 어떤 순서로 보여주는가. 어떤 말로 설명하는가. 그게 나다. 올해는 9개를 선택했다. 작년에는 12개였다. 줄였다. 평범한 건 뺐다. 클라이언트가 유명해서 넣었던 것도 뺐다. 내가 자랑스러운 것만 남겼다. 순서도 바꿨다. 예전에는 최신 순이었다. 이제는 임팩트 순이다. 첫 번째에 가장 강한 걸 놓는다. 마지막에 두 번째로 강한 걸 놓는다. 시작과 끝이 기억에 남으니까. 설명도 줄였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같은 말 안 쓴다. 대신 "100년 된 한복 브랜드, 20대가 입게 만들기"라고 쓴다.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포트폴리오는 디자인 결과물의 모음이 아니다. 나라는 디자이너를 디자인하는 작업이다. 메타 디자인이다. 1년의 거리 작년 사이트와 올해 사이트를 나란히 놓는다. 달라 보인다. 많이. 작년 나는 증명하려고 했다. "나 잘해요, 과정도 체계적이에요, 전문가예요." 그래서 많이 보여줬다. 올해 나는 확신한다. "내 작업을 보세요." 그래서 적게 보여준다. 1년이 만든 거리다. 디자이너로 9년을 하면서 배운 게 있다. 성장은 누적이 아니다. 갱신이다. 작년의 나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넘어서는 거다. 포트폴리오 리뉴얼이 바로 그거다. 물리적으로 과거를 버리는 의식. 새 파일을 열고, 새 레이아웃을 잡고, 새 말을 쓴다. "나는 이제 이런 사람입니다." 클라이언트한테 하는 말이기도 하고, 나한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코드를 친다 Figma 디자인 끝났다. 이제 코딩이다. HTML, CSS, 약간의 JavaScript. 에이전시 다니지만 내 사이트는 내가 만든다. CMS 안 쓴다. WordPress 안 쓴다. Wix는 더더욱. 손으로 짠다. 한 줄 한 줄. 비효율적이다. 시간 오래 걸린다. 그래도 이게 맞다. 내 포트폴리오에 남의 템플릿 쓰면 이상하지 않나. 디자이너인데. 브랜드 만드는 사람인데. 코드 치는 건 명상이다. 논리적이고 명확하다. 디자인은 모호할 때가 많다. "이게 맞나?" 계속 고민한다. 코드는 작동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 하나다. 오전 2시. 반응형 작업 중이다. 모바일 버전. 태블릿 버전. 데스크톱 버전. 브레이크포인트 세 개. 아내가 먼저 잤다. 거실 불만 켜져 있다. 키보드 소리만 들린다. 과거를 아카이빙한다 새 사이트 올리기 전에 하는 일이 있다. 작년 사이트를 저장한다. Portfolio_Archive 폴더에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다. 2016년부터 2023년까지. 8개의 사이트. 가끔 연다. 옛날 거. 부끄러운데 재밌다. 2016년 사이트. 신입 때다. 프로젝트 3개밖에 없다. 개인 작업으로 채웠다. 가상 브랜딩, 포스터 시리즈. 지금 보면 학생 포트폴리오다. 2018년 사이트. 첫 대형 프로젝트 들어갔다. 그것만 메인에 크게 박아놨다. 나머지는 작아 보이게. 균형이 없다. 2020년 사이트. 코로나 때다. 집에서 사이트만 5번 갈아엎었다. 할 게 없었다. 과한 디테일이 보인다. 각 사이트마다 그해의 내가 담겨 있다. 걱정, 자신감, 불안, 성장. 전부. 지우지 않는다. 이게 내 히스토리니까. 디자이너로서의. 그래서 또 만든다 새 사이트 올렸다. 도메인은 그대로. 내용만 바뀌었다. 브라우저 캐시 삭제하고 접속한다. 로딩 빠르다. 이미지 최적화 잘했다. 스크롤 내린다. 깔끔하다. 작업이 잘 보인다. 나는 잘 안 보인다. 그게 의도다. 모바일로 확인한다. 문제없다. 태블릿도. 데스크톱도. Contact 페이지 메일 폼 테스트. 내 메일로 테스트 발송. 1초 만에 도착. 완료. 만족스럽다. 지금은. 1년 뒤에는 또 불만족스러울 거다. 당연하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를 테니까. 그럼 또 만든다. 열 번째 사이트를. 새 Figma 파일 열고, 새 컨셉 잡고, 새 코드 치고. 성장의 증거 포트폴리오 리뉴얼이 귀찮냐고? 솔직히 귀찮다. 시간 많이 든다. 주말 이틀은 날린다. 디자인 하루, 코딩 하루. 테스트 반나절. 돈도 안 된다. 클라이언트 프로젝트 하나 더 받으면 300만원이다. 그 시간에 내 사이트 만든다. 그래도 한다. 매년.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성장하고 있고, 그걸 확인하고 싶으니까. 작년 사이트를 볼 때 부끄럽다는 건, 내가 달라졌다는 뜻이다. 시각이 변했다. 기준이 높아졌다. 더 잘하게 됐다. 그게 증거다. 물리적인. 디자이너는 성장을 측정하기 어렵다. 매출도 아니고, 직급도 애매하고. 뭘 기준으로 봐야 하나. 나는 포트폴리오로 본다. 1년 전 내가 만든 것을 지금 내가 보고 "이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성장한 거다. 클라이언트는 모른다 재밌는 건 클라이언트는 이거 모른다는 거다. 미팅 때 포트폴리오 보여주면, "사이트 깔끔하네요" 한마디 하고 넘어간다. 작년 사이트든 올해 사이트든 똑같이. 그들한테는 차이가 안 보인다. 당연하다. 그들은 내 과거를 모르니까. 차이를 아는 건 나다. 나만. 그리고 그거면 된다. 내가 나를 갱신하는 거니까. 남을 위한 게 아니라. 클라이언트는 결과만 본다. 이 사람이 우리 프로젝트 잘할까. 그것만 판단한다. 하지만 그 "잘함"은 어디서 오는가. 끊임없이 나를 업데이트하는 태도에서 온다. 포트폴리오 리뉴얼은 그 태도의 표현이다. 내년의 나에게 2024년 사이트 완성. Portfolio_Archive 폴더에 2023년 사이트 저장. 파일명은 'Portfolio_2023_final'. 내년 이맘때쯤, 2024년 사이트를 열 거다. 그리고 생각하겠지. "이건 아닌데." 그럼 또 만들 거다. 열한 번째를.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을 거다. 새로운 작업을 했을 거고, 새로운 고민을 했을 거고, 새로운 답을 찾았을 거다. 그 답을 열한 번째 사이트에 담겠지. 지금의 나는 그걸 기대한다. 미래의 나를. 더 나은. 포트폴리오 리뉴얼은 미래의 나한테 보내는 신호다. "계속 성장해. 멈추지 마." 디자이너의 순환 다른 직업은 어떨까. 1년마다 자기를 갈아엎나. 의사는 병원 홈페이지를 매년 리뉴얼하지 않는다. 변호사는 명함을 해마다 바꾸지 않는다. 디자이너는 다르다. 우리는 변화를 다루는 사람들이니까. 트렌드를 읽고, 새로운 걸 시도하고, 본질은 유지하면서 형식은 바꾼다. 그게 우리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도 그래야 한다. 매년 리프레시. 매년 리빌드. 순환이다. 계절처럼. 봄에 기획하고, 여름에 디자인하고, 가을에 개발하고, 겨울에 론칭한다. 그리고 다시 봄. 포트폴리오는 그 순환의 결과물이자 시작점이다. 오전 3시 사이트 최종 확인 끝났다. 문제없다. 도메인 접속해서 캡처했다. 스크린샷 10장. 섹션별로. Portfolio_2024 폴더에 저장. 내년에 볼 거다. 그리고 쓴웃음 짓겠지. 맥북 덮는다. 불 끈다. 침대로 간다. 아내가 뒤척인다. "끝났어?" "응. 끝났어." 끝났다. 올해 리뉴얼은. 내년 리뉴얼까지 365일 남았다.매년 부정하고, 매년 다시 쓴다. 그게 성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