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From

월요일

아이디어가 없는 월요일 아침

아이디어가 없는 월요일 아침

아이디어가 없는 월요일 아침 월요일 10시 15분 회의실에 들어갔다. 새 프로젝트 브리핑. 클라이언트는 화장품 스타트업. 대표는 30대 초반, 열정 가득. "자연주의인데 럭셔리한 느낌이요." 또 나왔다. 자연주의와 럭셔리. 양립 가능한가. 노트북을 켰다. 빈 Illustrator 파일. 커서만 깜빡인다. 머릿속도 깜빡인다. 주말에 성수동 전시회 세 곳 돌았다. 사진 127장 찍었다. 책방에서 디자인 매거진 네 권 샀다. 무드보드 폴더에 저장한 이미지만 52개. 그런데 지금 머릿속은 텅 비어있다. "박 디자이너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표가 물었다. 나는 웃었다. "네, 재밌는 방향이네요. 레퍼런스 좀 보고 컨셉 잡아볼게요." 재밌는 방향. 거짓말이다. 아직 아무것도 안 보인다.영감 수집의 역설 주말마다 돌아다니는 이유가 있다. 월요일 아침에 빈손으로 앉아있고 싶지 않아서. 토요일 오후 2시. 성수동 갤러리 세 곳. 첫 번째는 타이포그래피 전시. 손글씨를 3D로 변환한 작업. 사진 찍었다. 두 번째는 패키지 디자인 기획전. 친환경 소재에 미니멀 그래픽. 이것도 찍었다. 세 번째는 일러스트레이터 개인전. 자연물을 기하학으로 해석. 역시 찍었다. 책방에 갔다. 연남동 작은 곳. 신간 《브랜딩의 본질》 샀다. 일본 디자이너 인터뷰집도. 독일 포스터 아카이브도. 집에 쌓인 책만 23권인데 또 샀다. 일요일은 집에서 무드보드 정리. Figma에 폴더 만들고 이미지 분류. 색감별, 무드별, 소재별. 세 시간 걸렸다. "이번 주에 쓸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월요일 아침. 막상 프로젝트 시작하니까 그 무드보드가 안 보인다. 찾을 수가 없다. 아니, 찾았는데 맥락이 안 맞다. 영감 수집. 많이 하면 할수록 선택이 어려워진다. 역설이다.컨셉은 왜 안 나오나 회의 끝나고 자리 왔다. 오전 11시 30분. 프로젝트 폴더 만들었다. "자연주의_럭셔리_화장품_브랜딩_2024". 파일명부터 모순이다. 레퍼런스 검색 시작. Pinterest에 "natural luxury cosmetics" 쳤다. 결과 2만 개. 다 비슷하다. 베이지톤, 세리프 폰트, 미니멀 레이아웃. 클리셰다. Behance로 넘어갔다. "organic beauty branding" 검색. 역시 비슷. 초록색, 손글씨, 식물 일러스트. 이것도 클리셰. 주말에 본 전시 사진 다시 봤다. 타이포 전시. 3D 손글씨. 화장품 브랜딩이랑 무슨 연결고리가 있지? 모르겠다. 패키지 전시. 친환경 소재. 그건 알겠는데 럭셔리는 어디서 나오지? 일러스트 전시. 기하학 자연물. 흠... 이건 좀? 아니다. 억지로 끼워 맞추는 느낌. 컨셉이 안 나온다. 수집한 영감은 많은데 정작 내 것으로 만들 줄 모른다. 9년 차가 이래도 되나. 선배 디자이너가 말했다. "좋은 디자이너는 많이 보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버리는 사람이야." 맞는 말이다. 근데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모르겠다.점심시간의 발견 12시 30분. 점심 먹으러 나갔다. 회사 근처 김밥천국. 혼자 앉아서 참치김밥 먹었다. 핸드폰 봤다. 인스타그램 피드. 친구 디자이너가 올린 작업물. 로컬 베이커리 브랜딩. 단순한데 강렬하다. 댓글 달았다. "컨셉 뭐야?" 답장 왔다. "빵 먹는 순간의 행복. 그것만 생각했어." 빵 먹는 순간의 행복. 그것만. 그렇다. 나는 너무 많이 생각한다. 자연주의와 럭셔리를 양립시키려고. 트렌드를 반영하려고. 참신하려고. 차별화하려고. 정작 중요한 질문을 안 했다. "이 화장품을 쓰는 순간, 사람들이 뭘 느끼길 원하나?" 대표 말 다시 떠올렸다. "피부에 바르면서 자연이 느껴지는 건데, 동시에 나를 가꾸는 특별한 시간이었으면 좋겠어요." 자연이 느껴지는 특별한 시간. 여기다. 컨셉이 보인다. '일상 속 의식(ritual)'. 자연스러운데 신성한. 매일 하는 건데 특별한. 모순이 아니라 공존이다. 김밥 다 먹었다. 1시 10분. 회사 돌아갔다. 오후의 작업 자리에 앉았다. Illustrator 새 파일. 이번엔 커서가 움직인다. 키워드 정리. "ritual", "daily sacred", "natural ceremony". 무드보드 다시 봤다. 이번엔 보인다. 타이포 전시의 3D 손글씨. 일상적인 글씨에 차원을 더한 것. 여기서 로고 방향. 패키지 전시의 친환경 소재. 자연. 일러스트 전시의 기하학. 의식의 형식감. 연결된다. 퍼즐 맞춰지는 느낌. 레퍼런스 새로 검색. "ritual design", "sacred geometry nature". 결과가 다르다. 아까 본 것들과 다르다. 맥락이 있으니까. 스케치 시작. A4 용지 다섯 장. 로고 러프 30개. 대부분 쓰레기지만 세 개는 가능성 있다. 그중 하나는 확신 있다. 오후 4시. 팀장한테 보여줬다. "오, 방향 좋은데? 이거 더 밀어봐." 오후 6시. 컬러 팔레트 세 가지. 타이포 조합 다섯 가지. 목업에 적용. 화면 캡처. 오후 7시 30분. 초안 완성. 물론 아직 멀었다. 디테일 수정할 게 산더미. 그래도 방향은 잡혔다. 주말에 본 것들이 헛되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의 공백이 의미 있었다. 퇴근길의 생각 9시 퇴근. 지하철 탔다. 합정역까지 30분. 창밖 봤다. 반대편 플랫폼 광고판. 새 음료 브랜딩. 누가 했을까. 컨셉이 뭘까. 궁금하다. 오늘 깨달은 것. 영감 수집은 필요하다. 근데 충분하지 않다. 수집한 것을 '번역'해야 한다. 내 프로젝트의 언어로. 월요일 아침 빈 머리. 무서웠다. 9년 차인데 아직도 이렇다. 근데 생각해보니 매번 이렇다. 새 프로젝트마다 백지 상태. 그게 정상이다. 중요한 건 백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채우려고 서두르지 않는 것. 질문부터 제대로 하는 것. '뭘 보여줄까'가 아니라 '왜 보여줘야 하나'. '어떻게 만들까'가 아니라 '왜 만들어야 하나'. 합정역 도착. 10시. 집 가서 샤워하고 맥주 한 캔 마셨다. 아내는 야근. 혼자 소파에 앉았다. 내일은 화요일. 오늘 잡은 컨셉 정리해서 내부 리뷰. 수요일에 클라이언트 1차 PT. 또 수정 피드백 올 거다. "뭔가 임팩트가..." 벌써 들린다. 괜찮다. 방향은 맞았으니까. 나머지는 디테일이다. 그건 익숙하다. 핸드폰 봤다. 인스타그램. 어제 성수동에서 찍은 전시 사진. 올릴까 말까. 안 올렸다. 내 작업으로 소화할 때 의미 있는 거지. 사진만으로는 그냥 사진이다. 내일 또 백지로 시작할 거다. 새로운 브랜드, 새로운 질문. 괜찮다. 백지가 무서운 게 아니라, 백지를 채울 이유를 못 찾는 게 무섭다. 토요일 되면 또 전시회 갈 거다. 책방도. 사진 찍고 책 사고. 그게 내 루틴이다. 그게 나를 디자이너로 만든다.월요일 아침은 항상 비어있다. 그래서 채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