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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언트가 된 친구들과의 작업

클라이언트가 된 친구들과의 작업

클라이언트가 된 친구들과의 작업 재현이 형이 전화했을 때 "브랜드, 나 사업 시작하는데 로고 좀 봐줘." 재현이 형. 대학 선배다. 졸업하고 광고대행사에서 만났다. 같이 야근하고, 막차 놓치고, 회식에서 토하고. 그런 사이. 형이 퇴사한 건 작년 가을이었다. "더는 못 하겠어." 그러더니 독립했다. 마케팅 컨설팅. 프리랜서에서 시작해서 이제 법인 만든다고. "당연하죠. 언제 만날래요?" 전화 끊고 나서 좀 복잡했다.형이랑 작업하면 편할 거다. 설명 안 해도 이해하고. 업계 사정 아니까 무리한 요구 없고. 디자인 보는 눈도 있고. 근데 동시에. 편하면 대충 될 수도 있다. "이 정도면 되지" 하면서 타협하게 될 수도. 그리고 만약 형이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친구니까 고쳐줘" 이렇게 되면? 아내한테 얘기했다. "그냥 정중히 거절하면 안 돼?" "그게 어떻게... 형인데." "그럼 확실하게 선 그어. 처음부터." 맞는 말이다. 근데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다음 날 만났을 때. 첫 미팅은 홍대 카페 오후 3시. 형이 먼저 와 있었다. "야, 커피 샀다."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앉았는데 이미 어색했다. 평소 같으면 "야 임마" 이랬을 텐데. 테이블 위에 노트북이랑 서류가 놓여 있으니까 자동으로 존댓말이 나왔다. 형이 회사 소개를 시작했다. 사업 모델, 타겟, 방향성. 준비 많이 했다. A4 5장짜리 기획서. "어떻게 생각해?"솔직히 좀 애매했다. 방향성이 너무 넓었다. '혁신적 마케팅 솔루션'이라는 키워드. 뭐든 될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여기서 말해야 하나. 친구로서 말해야 하나, 디자이너로서 말해야 하나. "형, 질문 하나 할게요." "어." "이 회사가 5년 후에 뭐라고 불리길 원하세요?" 형이 멈췄다. "브랜딩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게 그거거든요. 무엇이 되고 싶은가." 형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마케팅이 아니라 비즈니스 파트너. 그렇게 불리고 싶어." 좋았다. 이제 시작이다. "그럼 한 달 주세요. 제대로 잡아볼게요." "얼마야?" "...형, 그건 나중에." 돈 얘기가 제일 어렵다는 걸 그때 알았다. 견적서를 보낼 때 집에 와서 견적서를 만들었다. 브랜드 네이밍, 로고 디자인, 베이직 시스템. 일반 클라이언트면 800만원. 근데 형한테는? 아내가 옆에서 말했다. "친구 가격 주지 마." "왜?" "나중에 더 꼬여. 차라리 정가 부르고 명확하게 해." 고민했다. 친구한테 800만원을 부른다고? 근데 아내 말이 맞았다.애매하게 깎아주면 나중에 "친구니까 한 번만 더 고쳐줘" 이렇게 된다. 결국 700만원으로 견적을 보냈다. 정가에서 10% 할인. 그리고 메일에 이렇게 썼다. "형, 친구라서 깎아주는 게 아니라 스타트업이라서 깎아드립니다. 대신 수정 범위는 명확하게 정하고 가겠습니다. 서로를 위해서." 형한테 전화가 왔다. "야, 견적 받았다." "네." "...비싸긴 하네." "네, 비쌉니다." 정적. "근데 네 말이 맞다. 명확하게 가자." 계약서를 썼다. 친구인데 계약서라니. 근데 이게 맞다고 생각했다. 컨셉 발표 날 3주 뒤. 형 사무실에서 프레젠테이션. 직원 2명이랑 형이 앉아 있었다. 나는 빔 프로젝터 앞에 섰다. 긴장했다. 다른 클라이언트보다 더 긴장했다."브랜드명은 'PRTNR'로 제안드립니다." Partner에서 모음을 뺐다. 간결하고 임팩트 있게. 발음은 '파트너'. "마케팅 에이전시가 아니라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포지셔닝입니다." 로고는 두 개의 블록이 맞물리는 형태. 협업의 시너지를 시각화했다. 형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 직원들도 긍정적이었다. 분위기가 좋았다. "근데." 형이 말했다. "폰트가 좀 무겁지 않아?" 맞다. 의도적으로 볼드 웨이트를 썼다. 신뢰감을 주려고. "가볍게 가면 경쟁사랑 비슷해져요. 지금 경쟁사들 보세요. 다 산세리프에 라이트 웨이트잖아요." "그렇긴 한데..." 이 순간이 중요했다. 여기서 "형 말이 맞아, 바꿀게" 하면 안 된다. 친구라서가 아니라 디자이너라서. "일주일만 써보세요. 명함에 찍어보시고. 그래도 무거우면 그때 조정하죠." 형이 나를 봤다. 잠시 정적. "오케이. 해보자." 미팅이 끝나고 나왔는데 다리에 힘이 없었다. 수정 요청이 시작됐을 때 일주일 뒤 톡이 왔다. "브랜드, 색 좀 바꿔볼 수 있어?" 시작됐다. "어떤 색이요?" "좀 더 밝은 느낌. 지금 너무 차갑다는 피드백이 있어." 누구 피드백인가 봤더니 형 부인. 디자이너 아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나. 친구 부인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근데 브랜드 전략에 맞지 않는다. 전화했다. "형, 색 수정은 가능한데요." "어."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어요. 색을 바꾸는 이유가 뭔가요?" "아까 말했잖아. 차갑다고." "그 피드백이 타겟한테서 나왔어요?" 형이 말을 멈췄다. "형수님이 디자이너세요? 아니면 마케팅 쪽이세요?" "...아니." "형, 우리 처음에 브랜드 전략 잡을 때 뭐라고 했죠? '신뢰할 수 있는 비즈니스 파트너'. 신뢰감은 따뜻함보다 안정감에서 나와요. 그래서 이 색인 거예요." 정적. "근데 정 바꾸고 싶으시면 바꿔드립니다. 형이 클라이언트니까." 형이 웃었다. "야, 너 진짜 프로페셔널하네." "제 밥벌이니까요." "알겠어. 그냥 가자." 전화 끊고 나서 한숨 쉬었다. 친구한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근데 이게 맞다. 우정을 지키는 방법이 굽히는 게 아니라 존중하는 거다. 최종 납품 날 2달 뒤. 베이직 시스템까지 완성됐다. 로고, 명함, 레터헤드, 파워포인트 템플릿, 웹사이트 가이드. 형 사무실에서 마지막 미팅. "수고했다." 형이 명함을 꺼내서 보여줬다. 인쇄된 PRTNR 로고.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다행이네요." "야, 근데 하나 물어볼게." "네." "너 나한테 작업하면서 힘들었지?" 솔직히 대답했다. "네. 힘들었어요." 형이 웃었다. "나도. 친구한테 피드백 주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어." "형도요?" "어. 괜히 눈치 보게 되더라. 너 기분 상할까 봐." 둘이 웃었다. "근데 잘 끝났네." "네." "다음엔 맥주 사줄게." "형, 그거 계약서에 있었어요. 최종 납품 후 맥주 2차례." "야 이 새끼." 농담이었다. 근데 진짜 계약서에 썼다. '성공적 마무리 시 회식 1회'라고. 3개월 뒤 형 회사가 잘 된다고 했다. 클라이언트 5개 확보. 직원 2명 더 뽑았다고. "너 덕분이야." "브랜드가 전부는 아니죠." "그래도. 명함 내밀 때 당당해져." 그 말 들으니까 뿌듯했다. 며칠 전에 형한테서 톡이 왔다. "브랜드, 내 친구가 카페 오픈하는데 너 소개해줬어." 좋다. 그리고 동시에. "형, 저 소개해주실 때 한 가지만 말씀해주세요." "뭔데?" "친구 가격 없습니다." 형이 ㅋㅋㅋ 보냈다. "알았어. 그래야 서로 편하지." 맞다. 친구랑 일하는 법. 명확하게 선 긋기. 프로페셔널하게 대하기. 타협은 전략적으로만. 그리고 끝나면 친구로 돌아가기. 어렵다. 여전히 어렵다. 근데 가능하다는 걸 이제 안다.친구를 클라이언트로 대하는 게 냉정한 게 아니다. 오히려 우정을 지키는 방법이다. 거리를 두는 게 아니라 존중하는 거다. 그걸 재현이 형과의 작업에서 배웠다. 다음 친구가 연락 오면? 이제 당당하게 견적서부터 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