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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언트와
- 21 Dec, 2025
클라이언트와 첫 미팅, 질문이 답인 이유
클라이언트와 첫 미팅, 질문이 답인 이유 말하고 싶은 충동 첫 미팅 때마다 느낀다. 말하고 싶어 죽겠다는 걸. "저희는 이런 프로젝트 많이 했고요,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될 것 같습니다." 신입 시절엔 이렇게 시작했다. 포트폴리오 10분 동안 설명하고, 우리 작업 방식 소개하고, 예상 결과물 이야기하고. 클라이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프로젝트는 항상 삐걱거렸다. 3차 수정 들어갈 때쯤 깨달았다. 우리가 만든 건 우리가 생각한 브랜드였다는 걸. 클라이언트가 원한 브랜드가 아니라.경력 5년차에 처음 프로젝트 리드를 맡았다. 로컬 베이커리 브랜딩. 대표님은 40대 여성. "예쁘고 감각적인 거 원해요." 그때 나는 똑똑했다고 생각했다. "요즘 트렌드는 미니멀이죠. 세리프 폰트에 크림 컬러 베이스, 빈티지 무드 가미하면..." 대표님이 끊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 질문에 답을 못 했다. 트렌드는 알았는데, 이 브랜드를 몰랐다. 듣는 기술 지금은 첫 미팅에서 거의 안 말한다. 15분 소개하고, 나머지 1시간 45분은 질문한다. "왜 브랜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경쟁사 중에 부러운 브랜드가 있나요?" "10년 후 이 브랜드가 어떤 말을 듣길 원하세요?" 처음엔 클라이언트가 당황한다. "그걸 디자이너가 제안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다. 브랜드의 본질은 클라이언트 안에 있다. 우리는 그걸 끄집어내는 사람이다.작년에 스타트업 브랜딩을 했다. 헬스케어 앱. 대표는 30대 초반 개발자 출신. "타겟이 누구예요?" "2030 여성이요." "왜 여성이에요?" "건강에 관심 많잖아요." "남성은 건강에 관심 없나요?" 대표가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사실 제 와이프가 임신하면서 건강 앱을 찾았는데, 다 너무 딱딱하더라고요."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타겟은 '건강에 관심 많은 여성'이 아니라 '변화하는 몸과 마주한 사람들'이었다. 임산부, 갱년기 여성, 체력이 떨어지는 중년 남성. 브랜드 네임도 바뀌었다. 'Health Plus'에서 'With Body'로. 컬러도 민트에서 따뜻한 테라코타로. 클라이언트가 말한 15분 때문에 전체 방향이 바뀌었다. 그 질문 안 했으면? 우리는 민트색 '건강한 20대 여성' 브랜드를 만들었을 거다. 3개월 후 망하는. 침묵의 가치 질문의 핵심은 침묵이다. 질문하고 기다리는 것.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3초를 못 참는다. 클라이언트가 답을 안 하면 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거나, 본인이 답을 제시한다. "아마 이런 느낌을 원하시는 것 같은데..." 그 순간 대화는 끝난다. 클라이언트는 고개만 끄덕이게 된다.지난달 식품 브랜드 미팅. 3대째 이어온 전통 장류 회사. 대표는 60대 남성. "이 장이 특별한 이유가 뭔가요?" 대표님이 한참을 말 안 했다. 30초쯤 지났을까. 팀 막내가 다음 질문 넘기려고 하는데, 내가 손으로 제지했다. 50초쯤 지나서 대표님이 말했다. "아버지가 장 뜨는 날이면, 새벽 4시에 일어나셨어요. 그때 장맛이 가장 좋다고. 근데 과학적으론 말이 안 되죠. 온도는 똑같으니까. 그런데 저도 모르게 새벽에 장 뜨게 되더라고요." 그 이야기가 브랜드 컨셉이 됐다. '새벽의 정성'. 로고는 해 뜨기 전 하늘색. 패키지에는 시계를 넣었다. 04:00. 30초를 못 참았으면? "전통의 맛입니다" 같은 뻔한 카피였을 거다. 클라이언트는 답을 안다. 다만 정리가 안 되어 있을 뿐. 우리가 해줄 건 시간이다. 생각할 시간. 진짜 질문과 가짜 질문 모든 질문이 다 좋은 건 아니다. 가짜 질문이 있다. "어떤 느낌을 원하세요?" "선호하는 컬러가 있나요?" "레퍼런스 보내주실 수 있나요?" 이건 질문이 아니다. 답변 수집이다. 체크리스트 채우기. 진짜 질문은 '왜'를 묻는다. "왜 이 사업을 시작했어요?" "왜 지금 브랜딩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왜 저희를 선택했어요?" 작년에 경쟁 PT가 있었다. 패션 스타트업. 우리 포함 3개 에이전시. 다른 팀들은 30분 동안 포트폴리오 보여주고, 예상 결과물 프레젠테이션 했다. 우리는 20분 소개하고, 40분 질문했다. "기존 브랜드들이 놓치고 있는 게 뭐라고 보세요?" "당신이 만들고 싶은 건 브랜드인가요, 커뮤니티인가요?" "돈이 무한대면 어떤 브랜드를 만들고 싶으세요?" PT 끝나고 일주일 뒤. 우리가 선택됐다. 피드백은 이랬다. "솔직히 결과물은 다른 팀이 더 그럴싸했어요. 근데 박브랜드 팀은 우리 브랜드를 이해하려고 했어요.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가격은 우리가 제일 비쌌다. 그래도 선택받았다. 질문 때문에. 답을 찾는 과정 질문은 방향을 잡는다. 그 방향에서 우리는 답을 만든다. 클라이언트가 "MZ세대를 타겟으로 하고 싶다"고 하면, 대부분 디자이너는 인스타그램 감성으로 간다. 파스텔톤, 산세리프, 미니멀. 나는 다시 묻는다. "MZ세대의 뭘 사로잡고 싶어요?" "그들이 지갑 여는 순간이 언제라고 보세요?" "당신이 MZ라면 이 브랜드를 쓸 이유가 뭐예요?" 질문을 파고들면 '진짜 원하는 것'이 나온다. MZ가 아니라 '가치소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거나, '나만의 취향을 표현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그럼 디자인이 달라진다. 파스텔이 아니라 명확한 메시지. 미니멀이 아니라 스토리. 올해 초 화장품 브랜드를 했다. 대표는 "클린뷰티"를 원했다. 시장조사 해보니 클린뷰티 브랜드가 이미 87개. "왜 클린뷰티예요?" "요즘 트렌드잖아요." "그럼 88번째 클린뷰티가 되고 싶으신 거예요?" 대표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왜 화장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처음 생각은?" 대표는 아토피가 있었다. 20대 내내 화장을 못 했다. 30대에 피부과 치료 받고 나아졌는데, 화장품이 너무 무서웠다고. "또 뭐 바르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 거기서 컨셉이 나왔다. '무섭지 않은 화장품'. 클린뷰티가 아니라 'Gentle Beauty'. 성분 나열이 아니라, 사용 후기 중심. "3일째 써도 괜찮았어요"라는 리얼 보이스. 패키지도 투명하게 해서 내용물이 보이게. "숨긴 게 없다"는 메시지. 론칭 3개월 만에 재구매율 68%. 클린뷰티로 갔으면 그냥 묻혔을 거다. 클라이언트를 교육하는 질문 좋은 질문은 클라이언트를 바꾼다. 브랜드를 다르게 보게 만든다. "경쟁사가 누구예요?" 라고 물으면 대부분 같은 업종을 말한다. 카페면 카페, 의류면 의류. 나는 다르게 묻는다. "고객이 당신한테 쓸 돈을, 어디에 쓸 수도 있을까요?" 카페라면? 편의점 커피, 집에서 내리는 커피, 아예 안 마시고 주스. 진짜 경쟁자는 같은 카페가 아니다. '그 시간을 보내는 다른 방법들'이다. 이 질문 하나로 브랜드 전략이 바뀐다. 커피 맛 경쟁이 아니라, 시간을 보내고 싶은 공간이 되는 것. 인테리어가 중요해지고, 콘셉트가 명확해진다. 작년에 북카페 브랜딩 했다. 대표는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을 원했다. 근데 물어봤다. "사람들이 여기서 뭘 얻어가길 바라요?" "...책을 읽는 거 아닌가요?" "집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왜 여기 와야 해요?" 대표가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혼자만의 시간이요. 집에선 계속 뭔가 해야 하잖아요. 여기선 그냥 멍때려도 되는." 컨셉이 나왔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곳'. 메뉴는 최소화. 주문도 키오스크로. 직원이 말 걸지 않음. 심지어 브랜드 네임도 '...'(점 세 개). 말줄임표. 오픈하고 SNS 난리 났다. "여기 진짜 아무도 안 건드려줌." 그게 차별화였다. 질문이 없었으면? 그냥 "조용한 북카페" 100호점 됐을 거다. 질문이 만드는 신뢰 첫 미팅에서 말 많이 하는 디자이너는 불안해 보인다. 실력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느낌. 질문하는 디자이너는 여유로워 보인다. "나는 당신의 브랜드를 이해할 시간이 있다"는 메시지. 클라이언트는 그걸 느낀다. 누가 진짜 파트너인지. 지난 6월에 미팅 하나가 기억난다. 리빙 브랜드. 창업자는 20대 후반 여성. 첫 사업이라 긴장한 게 보였다. 30분 동안 우리 포트폴리오 보여줬는데, 계속 "네네" 하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멈췄다. "혹시 궁금한 거 있어요?" "아... 아니요. 다 좋은 것 같아요." "진짜요? 불안한 거 없어요?" 그때 대표가 처음 제대로 말했다. "솔직히... 제 브랜드가 될까 걱정이에요. 포트폴리오 보니까 다 세련된데, 제 브랜드는 좀 투박하거든요." 거기서부터 진짜 대화가 시작됐다. 세련됨이 아니라 진정성. 투박함이 아니라 손맛. 그런 이야기들. 결국 그 대표는 우리를 선택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다른 에이전시는 "트렌디하게 만들어드릴게요"라고 했대. 우리는 "당신의 브랜드를 찾아드릴게요"라고 했고. 프로젝트는 5개월 걸렸다. 중간에 방향 회의만 여섯 번. 힘들었다. 근데 론칭하고 대표가 문자 보냈다. "이게 제 브랜드 맞아요. 고마워요." 그게 우리 일이다. 클라이언트 안에 있는 브랜드를 끄집어내는 것. 질문 없이는 불가능하다. 말하지 않는 용기 요즘 후배들한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미팅에서 말 좀 줄여." 다들 잘하고 싶어서 말을 많이 한다. 레퍼런스 준비하고, 시장조사하고, 트렌드 분석하고. 그걸 다 보여주고 싶어한다. 근데 첫 미팅은 시험이 아니다. 관계의 시작이다. 관계는 듣기에서 시작한다. "당신이 중요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거. 말이 아니라 태도로. 이번 달 초 미팅에서도 느꼈다. 식음료 프랜차이즈 브랜딩. 팀 막내가 30분짜리 PT 준비해왔다. 시장 분석, 경쟁사 리서치, 컨셉 방향 3가지. 발표 5분 만에 끊었다. "죄송한데, 질문부터 해도 될까요?" 막내는 당황했지만, 클라이언트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관심 생긴 거다. "왜 프랜차이즈를 하려고 해요?" "어떤 점주를 만나고 싶어요?" "10호점이 아니라 100호점을 상상하면, 뭐가 보여요?" 1시간 동안 대화했다. 준비한 PT는 10분도 안 썼다. 근데 미팅 끝나고 클라이언트가 말했다. "다음 미팅 때 계약서 가져올게요." 그 자리에서 결정났다. 막내는 나중에 물었다. "준비한 거 왜 안 썼어요?" 답했다. "필요 없었으니까. 클라이언트가 이미 다 말했잖아." 준비는 중요하다. 근데 준비를 다 보여주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준비는 질문을 위한 거다.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기 위해. 9년 차에 깨달은 것 경력이 쌓일수록 말이 줄어든다. 신기하게. 신입 때는 1시간 미팅에서 40분을 내가 말했다. 5년 차엔 반반. 지금은 15분 말하고 45분 듣는다.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실력이 생겨서 그렇다. 브랜드의 본질이 어디 있는지 아니까. 디자이너 머릿속이 아니라, 클라이언트 안에. 우리는 아티스트가 아니다. 브랜드 닥터에 가깝다. 환자 말 안 듣고 처방하는 의사는 돌팔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작년에 대형 프로젝트 하나를 놓쳤다. 경쟁 PT에서 떨어졌다. 이유를 물어봤더니 "너무 질문만 하셔서..." 라고 했다. 처음엔 억울했다. 제대로 하려고 했는데. 근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해됐다. 그 클라이언트는 질문을 원한 게 아니었다. 화려한 결과물을 원했던 거다. 그런 클라이언트랑은 안 맞는다. 3개월 후 들어보니 그 프로젝트 수정만 15차 들어갔다고. 결국 처음 제안한 거랑 완전히 달라졌대. 우리 방식이 맞는 클라이언트가 있다. 브랜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 그들은 질문을 좋아한다. 같이 고민하고 싶어하니까. 프로젝트 선택도 그렇게 한다. 첫 미팅에서 우리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는 클라이언트. 그런 분들하고만 일한다. 그래야 좋은 브랜드가 나온다.첫 미팅은 시험이 아니라 대화다. 말이 아니라 질문으로. 거기서 브랜드가 시작된다. 클라이언트 안에 이미 답이 있다. 우리는 그걸 듣기만 하면 된다. 말하고 싶은 걸 참는 게 디자이너의 진짜 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