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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에서
- 13 Dec, 2025
컨셉 회의에서 의견이 갈릴 때
컨셉 회의에서 의견이 갈릴 때 오후 3시, 회의실 회의실에 들어갔다. 민수, 지은, 그리고 박 디렉터. 다들 모니터 앞에 앉았다. "시작할까요." 컨셉 3개를 준비했다. 클라이언트는 친환경 화장품 브랜드. 론칭 3개월 남았다. 예산은 적당하다. 기대는 크다. 첫 번째 안을 띄웠다. 미니멀. 화이트와 그린. 깔끔하다. 무난하다. "좋은데요." 민수가 말했다. "요즘 친환경 브랜드 트렌드랑 잘 맞아요." 박 디렉터는 고개를 저었다. "트렌드를 따라가면 안 되지. 우리가 만들어야지." 시작됐다.두 번째 안 다음 컨셉을 보여줬다. 아날로그 느낌. 손그림 일러스트. 내추럴 톤. 내가 밀고 싶은 안이다. "이건 좀..." 지은이 말을 아꼈다. "타깃이 2030인데 너무 감성적이지 않나요?" "감성이 문제가 아니라 차별화가 포인트야." 내가 설명했다. "경쟁사 10개가 다 미니멀인데." 박 디렉터가 화면을 가까이 봤다. "브랜드 에센스는 맞는데, 확장성이 고민이네." 확장성. 그 말이 나오면 끝이다. "패키지에는 좋은데 디지털에서 어떻게 풀지 모르겠어요." 민수가 거들었다. 셋이서 10분을 얘기했다. 결론은 보류.세 번째 안과 침묵 마지막 컨셉. 볼드하다. 타이포 중심. 컬러는 강렬하다. 실험적이다. 침묵이 흘렀다. 5초. 10초. "클라이언트가 받아들일까요?" 지은이 먼저 말했다. "받아들이게 만드는 게 우리 일이잖아." 박 디렉터가 답했다. "하지만 이번 클라이언트는 보수적이에요. 지난 미팅 때 봤잖아요." 맞는 말이다. 클라이언트는 45세 대표. 안전한 걸 좋아한다. 첫 미팅 때 레퍼런스로 가져온 게 10년 전 브랜드들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설득을 잘해야지." 박 디렉터는 물러서지 않았다. 민수는 가만히 있었다. 3년차는 끼어들기 어렵다. 아직. 나는 중간이다. 디렉터 의견도 이해한다. 팀원 현실론도 맞다. 그리고 클라이언트 성향도 안다. 중간관리자의 위치 "잠깐 정리하죠." 내가 끼어들었다. 화이트보드에 섰다. 세 안을 나열했다. 장단점을 적었다. "1안은 안전하지만 차별화가 약해요. 2안은 콘셉트는 좋은데 확장성 보완이 필요하고. 3안은 강하지만 클라이언트 설득이 관건이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디렉터님, 3안으로 가고 싶으신 이유가 뭔가요?" "이 브랜드가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목소리가 있어야 해. 1, 2안은 묻혀." "민수, 지은, 너희는?" "전 2안이요. 컨셉도 맞고 실무적으로 작업 가능해요." 지은이 답했다. "저는..." 민수가 머뭇거렸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다 장단점이 있어서." 정직한 답이다.민주적 결정의 함정 "투표할까요?" 민수가 제안했다. 박 디렉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디자인은 투표로 결정하는 게 아니야." 맞다. 하지만 틀렸다. 민주적으로 결정하면 평균값이 나온다. 무난한 안. 아무도 싫어하지 않지만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디자인. 그런데 독단으로 밀어붙이면? 팀원은 동력을 잃는다.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구나" 생각한다. 다음 프로젝트에서 수동적이 된다. 9년 하면서 배운 거다. 정답은 없다. 상황마다 다르다. "투표는 안 할게요." 내가 말했다. "대신 이렇게 하죠." 절충안이 아닌 것 "2안을 베이스로 가되, 3안의 볼드함을 일부 가져옵니다. 타이포를 좀 더 강하게 키우고, 컬러를 한 톤 올려요. 확장성은 지은이 시스템으로 잡고." "그럼 그냥 섞는 거잖아요." 박 디렉터가 말했다. "섞는 게 아니라 진화예요. 2안의 약점이 힘이 없다는 거였으니까, 3안의 장점을 이식하는 거죠." 침묵. 10초. "괜찮은데요?" 지은이 먼저 반응했다. "그럼 작업 가능해요." 민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박 디렉터는 팔짱을 꼈다. "클라이언트 반응 봐서 3안 방향으로 더 밀어보자. 프레젠테이션에서." 타협이 아니다. 단계적 설득이다. "좋습니다. 그럼 PT 자료에 3안을 레퍼런스로 넣어서, 향후 전개 방향으로 제시하죠." 박 디렉터가 일어섰다. "수요일까지 1차 시안. 금요일 내부 리뷰." 회의 끝. 복도에서 회의실을 나섰다. 민수가 따라왔다. "형, 저도 나중에 저렇게 할 수 있을까요? 의견 조율." "하게 돼." "근데 어떻게 판단해요? 누구 말이 맞는지." "다 맞아. 그게 문제지." 민수가 웃었다. "그럼 답이 뭐예요?" "맥락이야. 클라이언트 성향, 프로젝트 중요도, 팀 컨디션. 다 고려해야 돼. 같은 상황이어도 팀원 구성이 다르면 다른 결정을 해." "복잡하네요." "그래서 시니어지." 복도 끝에서 지은이 커피를 뽑고 있었다. 박 디렉터는 자기 자리에서 이미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각자의 리듬이 있다. 저녁 7시 수정 작업을 시작했다. 2안 파일을 열었다. 타이포를 키웠다. 30pt에서 48pt로. 자간을 줄였다. 타이트하게. 3안에서 쓴 컬러를 하나 가져왔다. 포인트로만. 메인은 내추럴 톤 유지. 일러스트 스타일을 조금 단순화했다. 확장성을 위해. 지은이 말이 맞았다. 디지털에서 구현하려면 이정도는 필요하다. 1시간 작업. 저장. 슬랙에 올렸다. "1차 수정본입니다. 내일 아침에 봐주세요." 박 디렉터가 바로 답했다. "오케이. 방향 괜찮네." 지은도 이모지를 눌렀다. 엄지. 민수는 아직도 자기 작업 중이다. 3년차는 바쁘다. 회의에서 배운 것들 9년 하면서 회의를 몇 번 했나. 세어보지 않았다. 수백 번. 어쩌면 천 번. 초반엔 의견 충돌이 스트레스였다. 왜 내 안을 이해 못 하지?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리지? 지금은 안다. 충돌이 나쁜 게 아니라는 걸. 의견이 갈리는 건 다들 프로젝트에 진심이라는 뜻이다. 아무도 신경 안 쓰면 회의는 10분 만에 끝난다. "네, 좋아요. 그렇게 하죠." 끝. 그게 더 무섭다. 민수가 물었다. 누구 말이 맞냐고. 답은 '다 맞다'다. 하지만 동시에 '다 틀리다'. 박 디렉터 말도 맞다. 브랜드는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안전한 디자인은 묻힌다. 지은 말도 맞다. 실무 가능성을 무시하면 프로젝트는 표류한다. 민수도 맞다. 모르겠다는 게 정직한 답일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나는 이걸 하나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다. 중간의 무게 시니어 디자이너. 프로젝트 리드. 애매한 위치다. 디렉터만큼 권한은 없다. 하지만 결정은 해야 한다. 팀원만큼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실무도 해야 한다. 클라이언트는 나를 '디렉터'로 본다. 박 디렉터는 나를 '실무 책임자'로 본다. 민수와 지은은 '팀장님'이라고 부른다. 역할이 여러 개다. 통역사 같다. 디렉터의 비전을 팀원이 이해할 수 있게. 팀원의 현실을 디렉터가 받아들일 수 있게. 우리 안을 클라이언트가 선택할 수 있게. 피곤하다. 당연하다. 하지만 이게 내 일이다. 컨셉 회의에서 의견이 갈릴 때, 누군가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 오늘은 내가 그 역할이었다. 수요일 결과 수요일 오전. 1차 시안 완성. 박 디렉터가 봤다. "좋아. PT 자료 만들어." 지은이 시스템 가이드를 정리했다. 로고 사이즈별 규정. 컬러 팔레트. 타이포 위계. 민수가 목업을 만들었다. 패키지에 적용한 모습. 쇼핑백. 웹사이트 메인. 금요일 내부 리뷰에서 통과했다. 수정 사항 몇 개. 크지 않다. 다음 주 화요일. 클라이언트 PT. 복도에서 민수를 만났다. "형, 회의 때 그 방법 배우고 싶어요." "뭐?" "의견 조율하는 거요. 형은 어떻게 판단해요?" "그냥... 많이 해봐야 돼. 경험." "경험이요?" "응. 10번 틀려봐야 11번째 맞출 수 있어." 민수가 웃었다. "위로가 안 되는데요." "위로 아니야. 사실이지." 컨셉과 현실 사이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는 건 창작과 비즈니스 사이를 걷는 거다. 예술가처럼 순수할 순 없다. 클라이언트가 있으니까. 영업사원처럼 타협할 순 없다. 디자이너니까. 회의에서 의견이 갈리는 건, 각자가 서 있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박 디렉터는 '브랜드의 미래'를 본다. 5년 뒤, 10년 뒤. 지은은 '지금 가능한 것'을 본다. 납기, 예산, 실무 공수. 민수는 '배우는 중'이다. 아직 자기 위치를 찾고 있다. 나는 '내일'을 본다. 다음 미팅, 다음 수정, 다음 PT. 다 필요하다. 한 사람 관점으로는 프로젝트가 안 된다. 그래서 회의를 한다. 싸우는 게 아니라 각도를 맞추는 거다. 오늘 회의는 성공이었다. 의견이 갈렸지만 방향을 찾았다. 아무도 불만족스럽지 않고, 누구도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은 지점. 그게 팀워크다. 퇴근길 9시에 나왔다. 야근은 아니다. 그냥 작업이 끝난 시간. 지하철에서 오늘 회의를 떠올렸다. 3년 전 같았으면 스트레스받았을 거다. "왜 내 안을 못 알아들어?" 하면서. 지금은 다르다. 의견 충돌은 프로세스다. 더 나은 결과로 가는 과정. 중요한 건 '누가 이기냐'가 아니라 '프로젝트가 이기냐'다. 박 디렉터의 3안이 최종이 될 수도 있다. 클라이언트가 의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지은의 2안 베이스가 안전할 수도 있다. 시장에서 잘 먹힐 수도 있다. 내가 제안한 절충안이 최선일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다. 화요일 PT에서 알게 된다. 그때까지는 각자 최선을 다하는 거다. 회의에서 싸우고, 작업실에서 협업하고, 복도에서 농담하고. 그게 우리 일이다. 집에 도착했다. 아내가 물었다. "오늘 어땠어?" "회의 좀 길었어. 의견이 안 맞아서." "결론은?" "냈지. 뭐." "고생했네." 씻고 맥주 한 캔 땄다. 내일도 회의다. 다른 프로젝트. 또 의견이 갈릴 거다. 괜찮다. 9년째 하는 일이다.의견이 갈리는 건 무관심보다 낫다. 싸우는 팀이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