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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 잡는 데 한 달, 디자인은 사흘의 역설

컨셉 잡는 데 한 달, 디자인은 사흘의 역설

클라이언트는 모른다 "로고 작업 기간이 한 달이요?" 클라이언트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로고 하나 그리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리냐는 표정이다. 설명한다. 컨셉 작업에 3주, 실제 디자인은 사흘이라고. 더 의아해한다. 이해한다. 그들에게 디자인은 '그리는 것'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켜고 펜툴로 선 그으면 끝나는 것. 한 달이면 로고 30개는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사흘의 작업이 가능하려면, 앞의 3주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첫 주: 질문만 한다 프로젝트 시작. 첫 주는 디자인 파일을 안 연다. 질문만 한다. 브랜드가 지향하는 가치는 뭔가. 타겟은 누구인가. 경쟁사는 어떤 톤인가. 5년 후 이 브랜드는 어떤 이미지여야 하나. 클라이언트는 답한다. "젊고 세련되고 신뢰감 있으면서도 친근한 느낌이요." 다 원한다. 모든 걸. 불가능한 조합을. 내 일은 그 모호함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젊음"이 20대 대학생의 젊음인지, 30대 직장인의 젊음인지 구분한다. "신뢰감"이 은행의 신뢰감인지, 동네 빵집의 신뢰감인지 나눈다. 이 과정에 일주일. 디자인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클라이언트는 묻는다. "로고 시안은 언제 나오나요?" 참는다. 설명한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이게 틀어지면 나중에 로고 100개 그려도 다 헛것이라고. 둘째 주: 세상을 뒤진다 레퍼런스 수집. 핀터레스트를 뒤진다. 비핸스를 훑는다. 인스타그램을 스크롤한다. 길거리 간판을 찍는다. 잡지 광고를 오려낸다. 해외 브랜딩 사이트를 북마크한다. 500개 모은다. 그중 50개를 추린다. 다시 10개로 줄인다. 무드보드 만든다. 색감, 형태, 분위기, 질감. 이 브랜드가 살아갈 세계를 구축한다. 물리적 형태를 갖기 전에, 감각적 방향성을 잡는다. 아내가 묻는다. "아직도 로고 안 그려?" 한숨 쉰다. "이게 로고 그리는 거야." 그녀는 카피라이터라 이해한다. 글 쓰기 전에 자료 조사하는 시간. 키보드 두드리는 건 마지막 10%라는 걸.셋째 주: 말로 만든다 컨셉 정의. 이제 단어를 만든다. 이 브랜드를 설명할 3개의 키워드. 핵심 메시지 한 문장. 브랜드 에센스 정의. "혁신적"이라는 단어를 쓸까 고민한다. 너무 흔하다. "진보적"? 너무 무겁다. "전향적"? 발음이 어렵다. "새로운"? 너무 평범하다. 하루 종일 시소러스를 뒤진다. 단어 하나 정하는 데 6시간. 팀원이 묻는다. "그냥 깔끔하고 모던하게 가면 안 돼요?" 설명한다. "깔끔"과 "모던"은 컨셉이 아니라고. 그건 스타일이라고. 컨셉은 이유이고, 스타일은 결과라고. 톤앤매너 문서 작성한다. A4 15장. 색상 팔레트, 타이포그래피 방향성, 그래픽 모티브, 커뮤니케이션 톤. 로고가 태어날 환경을 세팅한다. 3주 지났다. 일러스트레이터는 아직 안 켰다. 사흘: 손이 움직인다 이제 그린다. 펜툴 잡는다. 선을 긋는다. 도형을 그린다. 변형한다. 회전한다. 조합한다. 놀랍게도 빠르다. 첫 시안이 2시간 만에 나온다. 변형안 3개가 그날 오후에 완성된다. 다음 날 컬러 조합 테스트. 그다음 날 최종 정리. 사흘. 로고 완성. 팀원들이 신기해한다. "와, 진짜 빠르시네요." 웃는다. 빠른 게 아니라고. 이미 3주 동안 머릿속으로 수백 번 그렸다고. 무드보드 만들면서 형태감을 익혔다. 컨셉 정의하면서 구조를 잡았다. 톤앤매너 쓰면서 디테일을 구상했다. 일러스트레이터를 켜는 순간, 이미 70%는 완성되어 있었다. 손은 머리를 따라갈 뿐이다.클라이언트는 또 모른다 발표 날. "한 달 작업하셨는데 시안이 3개뿐이에요?" 심호흡한다. 설명한다. 이 3개가 나오기까지 500개의 레퍼런스를 봤다고. 100가지 방향성을 고민했다고. 30개의 키워드를 검토했다고. "그래도 좀 더 다양한 스타일은 없나요?" 참는다. 다양함은 혼란이라고. 우리는 명확함을 판다고. 브랜딩은 선택이라고. 가능한 모든 걸 보여주는 게 아니라, 가장 맞는 하나를 제시하는 거라고. 설득한다. 30분 프레젠테이션. 15장 슬라이드. 컨셉부터 차근차근. 왜 이 색인지, 왜 이 형태인지, 왜 이 비율인지. "아,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클라이언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안다. 로고가 아니라 과정을 산다는 걸. 역설의 본질 디자인은 결과가 아니라 여정이다. 한 달 중 3주는 보이지 않는 작업. 클라이언트는 산출물을 못 본다. 파일이 늘지 않는다. 진척률을 측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시간이 없으면, 마지막 사흘도 없다. 컨셉 없이 그린 로고는 예쁜 그림이다. 브랜드가 아니다. 무드보드 없이 정한 색은 취향이다. 전략이 아니다. 톤앤매너 없이 만든 디자인은 일회성이다. 시스템이 아니다. 사흘의 작업이 빛나려면, 3주의 고민이 필요하다. 빙산의 원리다. 수면 위 10%가 아름다우려면, 수면 아래 90%가 단단해야 한다. 이 균형이 무너질 때 가끔 프로젝트가 틀어진다. 클라이언트가 급하다고 한다. "컨셉은 나중에 하고, 일단 로고부터 볼 수 있나요?" 거절 못 한다. 일감이 필요하니까. 그린다. 이틀 만에 시안 5개. 발표한다. 클라이언트가 말한다. "음... 뭔가 임팩트가 부족한데요?" 당연하다. 임팩트는 형태에서 오지 않는다. 맥락에서 온다. 이 로고가 왜 이래야 하는지 설명할 이유가 없으니, 설득력이 없다. 수정 들어간다. 2차, 3차, 4차. 방향성이 없으니 수정도 갈팡질팡. "좀 더 강렬하게요", "아니 너무 강한데 부드럽게요". 결국 한 달 걸린다. 컨셉 먼저 잡았으면 2주 끝날 프로젝트. 효율성의 역설이다. 빠르게 가려고 과정을 생략하면, 결국 더 오래 걸린다. 후배에게 하는 말 신입 디자이너가 묻는다. "실력을 어떻게 늘리나요?" 대답한다. "일러스트레이터 단축키 외우지 마. 브랜드 케이스 스터디해." 그는 의아해한다. 디자이너인데 툴을 배우지 말라니. 설명한다. 툴은 수단이라고. 1년이면 마스터한다고. 하지만 컨셉 잡는 법은 10년 걸린다고. 클라이언트의 모호한 요구를 구체적 방향성으로 바꾸는 능력. 그게 진짜 실력이라고. "디자인 3일, 컨셉 3주. 이 비율 익혀." 그가 메모한다.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5년차 때는 몰랐으니까. 로고 예쁘게 그리는 게 실력인 줄 알았다. 빨리 그리는 게 효율인 줄 알았다. 시안 많이 뽑는 게 성실함인 줄 알았다. 다 아니었다. 한 방향으로 깊게 파는 것. 그게 프로였다. 내가 파는 것 결국 깨달았다. 나는 로고를 파는 게 아니다. 확신을 판다. 클라이언트는 불안하다. 이 선택이 맞는지, 이 방향이 맞는지, 시장이 받아줄지. 내 일은 그 불안을 지우는 것이다. 한 달 과정의 90%는 설득이다.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고, 팀을 설득하고, 나 자신을 설득한다. "이게 맞다"는 확신을 만든다. 그 확신이 서면, 손은 자동으로 움직인다. 사흘이면 충분하다. 역으로 확신 없이 그린 로고는 석 달 걸려도 불안하다. 클라이언트도 느낀다. "뭔가 아쉬운데"라는 말이 나온다. 다시 처음부터. 결국 시간은 같다. 제대로 가면 한 달. 헤매면 석 달. 처음부터 제대로 가는 게 빠르다. 오늘도 똑같다 월요일 아침. 새 프로젝트 킥오프. 일러스트레이터는 안 연다. 노션 켠다. 무드보드 페이지 만든다. 레퍼런스 폴더 생성한다. 클라이언트가 메시지 보낸다. "중간 산출물 언제 볼 수 있을까요?" 답장 친다. "2주 후 컨셉 발표 먼저 하겠습니다." 한숨. 또 설명해야 한다. 과정의 가치를. 하지만 괜찮다. 이게 내 일이니까. 보이지 않는 90%를 만드는 것. 수면 아래를 단단히 하는 것. 그래야 수면 위 10%가 빛난다.컨셉은 시간을 먹고, 디자인은 순간에 태어난다. 그게 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