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Dec, 2025
크레용 빨강 vs 브랜드 레드의 미묘한 차이
크레용 빨강 vs 브랜드 레드의 미묘한 차이 클라이언트: "빨강으로 해주세요" 또 시작이다. "로고 빨간색으로 하면 어떨까요?" 회의실에 앉은 클라이언트 대표님이 말했다. 좋다. 빨강. 나쁘지 않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어떤 느낌의 빨강을 원하세요?" 내가 물었다. 대표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냥... 빨강이요. 빨간색이요."500개가 넘는다. Pantone 레드 계열만. RGB로 표현 가능한 빨강은 수십만 개다. 그중 브랜드에 쓸 수 있는 건 30개 정도. 그중 이 브랜드에 맞는 건 3개.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건 하나다. 문제는 클라이언트도 뭘 원하는지 모른다는 거다. 내가 준비한 빨강 5개 다음 회의 때 가져갔다. 빨강 5개.Pantone 185C: 코카콜라 레드. 클래식. 강렬. 대중적. Pantone 1795C: 오렌지 기운 있는 레드. 젊고 활발함. Pantone 207C: 마젠타 섞인 레드. 고급스럽고 여성적. Pantone 7621C: 다크 레드. 와인 느낌. 프리미엄. Pantone 186C: 맨유 레드. 정열적. 스포티.각각 브랜드 샘플 붙여서 무드보드 만들었다. A3 용지 5장. 인쇄비만 3만원. "음... 다 비슷한데요?" 대표님이 말했다. 비슷하지 않다. 전혀.185C와 186C는 1도 차이다. 육안으로 거의 구분 안 된다. 근데 브랜드 적용하면 완전히 다르다. 185C는 '신뢰'다. 186C는 '열정'이다. 1도가 감정을 바꾼다. 크레용 빨강의 세계 클라이언트는 크레용 세트에서 자랐다. 12색, 24색, 많아야 36색. 빨강은 하나였다. 주황 아니고 분홍 아닌 그 하나. '빨강'이라는 단어가 하나의 색을 가리켰다. 그게 문제다. 디자이너는 다른 세계에서 자랐다. Pantone 책에서. Adobe RGB에서. CMYK 색분해에서. 빨강은 스펙트럼이다. 좌표다. 맥락이다. "따뜻한 빨강요? 차가운 빨강요?" 클라이언트는 멈췄다. 빨강이 따뜻하고 차가울 수 있다는 걸 처음 들었다. "빨강은 뜨거운 거 아니에요?" 아니다. 마젠타 섞인 빨강은 차갑다. 파랑 기운 있어서. 반대로 오렌지 섞인 빨강은 따뜻하다. 노랑 기운. 같은 '뜨거움'도 다르다. 불꽃 뜨거움이냐 열기 뜨거움이냐. 이 차이가 브랜드 인상을 만든다. 코카콜라가 그 빨강인 이유 185C다. Pantone 185C. 왜 하필 185C냐고 물으면 대답은 간단하다. 100년 썼으니까. 근데 처음엔 왜 선택했을까. 1886년 코카콜라 탄생. 당시 약국에서 팔았다. 시럽 형태. 병에 담았다. 경쟁자는 Pepsi가 아니라 다른 약들이었다. 약병은 대부분 갈색, 투명, 초록이었다. 차별화가 필요했다. 빨강을 선택했다. 근데 어떤 빨강? 너무 밝으면 싸 보인다. 너무 어두우면 약 같다. 오렌지 기운 있으면 어린애 음료 같다. 정답은 '순수한 빨강'이었다. RGB(227, 6, 19). CMYK(0, 97, 92, 0). C=0이다. 시안 0%. 청록색 기운이 전혀 없다. M=97. 마젠타 거의 풀. Y=92. 노랑도 거의 풀. 이게 만드는 빨강이 '정열적이면서 신뢰할 수 있는' 빨강이다. 100년 후 사람들은 그냥 '코카콜라 빨강'이라고 부른다.브랜드 레드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전략적 선택. 100년의 일관성. 크레용 빨강은 그냥 빨강이다. "좀 더 임팩트 있게요" 4차 수정 피드백이었다. "이 빨강, 좀 더 임팩트 있게 할 수 있을까요?" 있다. 채도 올리면 된다. S+10. 근데 물었다. "어떤 방향의 임팩트요? 강렬함? 세련됨? 에너지?" "음... 다요." 안 된다. 다는 없다. 강렬함 원하면 어두운 빨강이다. Value 낮추고 Saturation 올린다. Pantone 1807C 쪽. 세련됨 원하면 차가운 빨강이다. 마젠타 믹스. 207C 방향. 에너지 원하면 따뜻한 빨강이다. 오렌지 터치. 1795C. 세 개 다 '임팩트'있다. 근데 완전히 다른 브랜드 된다. "일단 다 해볼까요?" 클라이언트가 말했다. 했다. 3개 버전. 각각 로고, 명함, 쇼핑백 목업.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첫 번째 거요." 원래 안이었다. 1mm가 만드는 브랜드 산맥 Pantone 책 펼친다. Red 섹션. 186C 옆에 185C 있다. 육안으로 거의 같다. 근데 브랜드 적용하면 다르다. 186C: Manchester United, 서울시 로고, 하이네켄 스타 185C: Coca-Cola, Supreme, Levi's 왜 각자 그 색 선택했을까. 우연일까. 아니다. 맨유는 열정이 브랜드 코어다. 186C가 185C보다 미세하게 더 따뜻하다. Y값이 2% 높다. 그 2%가 '불타는 열정' 만든다. 코카콜라는 신뢰가 필요하다. 식음료니까. 185C가 186C보다 미세하게 더 순수하다. 균형잡혀있다. 그게 '믿을 수 있는 즐거움' 된다. 1mm다. CMYK 2% 차이. RGB 5포인트 차이. 이 1mm가 브랜드 산맥 만든다. 한쪽은 열정 산맥. 한쪽은 신뢰 산맥. 소비자는 의식 못 한다. 근데 느낀다. 클라이언트가 본 건 결과뿐 문제는 이거다. 클라이언트는 결과만 본다. 완성된 로고. 적용된 간판. 찍힌 명함. 과정은 안 본다. 왜 이 빨강인지. 왜 저 빨강 아닌지. "이 빨강이랑 저 빨강 차이가 뭐예요?" 설명한다. 10분. 색상환. 색온도. 브랜드 레퍼런스. 타겟 감성. 끝나고 나면 대표님이 말한다. "그래서 뭐가 더 좋은 건데요?" 더 좋은 게 아니다. 더 맞는 거다. 근데 '맞음'을 설명하기 어렵다. 감각이니까. 맥락이니까. "일단 이걸로 가시죠. 나중에 수정 가능하니까." 가능하다. 근데 안 한다. 사람들은 익숙해진다. 처음 본 빨강이 '우리 빨강' 된다. 1년 후 리브랜딩 제안하면 대표님이 말한다. "우리 빨강 바꾸는 거예요? 이거 우리 상징인데." 그래서 첫 선택이 중요하다. 빨강의 정치학 회의실 정치가 있다. "대표님은 이 빨강 좋아하세요." 마케팅 팀장이 말한다. 207C 가리키며. "근데 전 이게 낫다고 봐요." 디자인 팀장이 1795C 가리킨다. 나는 185C 밀고 있었다. 투표가 시작된다. 7명 회의. 민주적으로 결정하자고. 결과: 207C 4표, 185C 2표, 1795C 1표. 민주주의가 이겼다. 브랜드는 졌다. 207C는 이 브랜드에 안 맞는다. 타겟이 2030 남성인데 207C는 여성적이다. 마젠타 기운 강해서. 근데 대표님 딸이 좋아한다고 했다. 대학생. 딸 의견이 4표 만들었다. 설득했다. 20분. 타겟 분석. 경쟁사 색상. 적용 시뮬레이션. 결국 185C로 갔다. 대표님이 말했다. "처음부터 전문가 의견 따를 걸 그랬네요." 그럼 회의는 왜 했나. 브랜드 레드를 만드는 3시간 실제 작업 과정이다. 1시간: 브랜드 코어 분석. 핵심 가치 3개 추출. 감성 키워드 10개. 이걸 색으로 번역. 30분: 경쟁사 색상 분석. 업계 색상 트렌드. 차별화 포인트 찾기. 30분: 타겟 리서치. 이 세대가 선호하는 색온도. 문화적 맥락. 1시간: 후보 색상 10개 선정. Pantone, RGB, CMYK 좌표 정리. 각각 A4 컬러 출력. 30분: 로고 목업 제작. 10개 색상 각각 적용. 명함, 간판, 패키지 시뮬레이션. 30분: 최종 3개 선정. PT 자료 정리.3시간이다. 클라이언트는 10분 본다. "다 비슷한데요?" 비슷하지 않다. 각각 다른 전략이다. 다른 감정이다. 다른 미래다. 근데 설명 못 하면 '그냥 빨강' 된다. 색맹 테스트의 역설 재밌는 거 있다. 색맹 테스트 해보면 대부분 통과한다. 적록색맹 아니고 청황색맹 아니고. 근데 빨강 10개 놓고 구분하라면 못 한다. 훈련 안 된 눈은 2-3개로 그룹핑한다. "이건 밝은 빨강, 이건 어두운 빨강, 이건 분홍 같은 빨강." 디자이너 눈은 10개 다 구분한다. 훈련됐으니까. 역설이다. 생리적으로 정상인데 문화적으로 색맹이다. 클라이언트가 나쁜 게 아니다. 안 배웠을 뿐. 디자이너 역할이 여기 있다. 번역. 클라이언트가 느끼는 걸 색으로. 색을 전략으로. "이 빨강이 우리 브랜드를 이렇게 만들 겁니다." 3초 안에 설득 못 하면 진다. 프린터가 만드는 변수 더 복잡한 게 있다. 모니터에서 본 빨강 ≠ 프린터에서 나온 빨강 ≠ 간판에 적용된 빨강. RGB는 빛이다. 가산혼합. 섞을수록 밝아진다. CMYK는 잉크다. 감산혼합. 섞을수록 어두워진다. 같은 빨강 코드여도 출력 매체마다 다르다. 모니터 RGB(227, 6, 19) = Pantone 185C 프린터 CMYK(0, 97, 92, 0) = Pantone 185C 근데 프린터마다 다르다. HP는 약간 주황빛. Canon은 약간 자주빛. 간판은 또 다르다. LED 백라이트냐 형광등이냐에 따라. 실제 간판 달고 나면 대표님이 전화한다. "색이 다른데요?" 다르다. 당연히. 빛이니까. "그럼 이거 잘못된 거 아니에요?" 아니다. 이게 맞다. Pantone 185C 맞다. 근데 모니터에서 봤던 그 빨강 아니다. 설명한다. 10분. 가산혼합, 감산혼합, 색온도. 끝나면 대표님이 말한다. "그럼 처음에 간판 색으로 보여주시지." 불가능하다. 간판은 밤에 켜봐야 안다. 문화마다 다른 빨강 한국 빨강 ≠ 중국 빨강 ≠ 일본 빨강. 한국은 Pantone 186C 선호한다. 태극기 빨강. 익숙해서. 중국은 1788C. 더 진하고 어둡다. '중국홍' 전통. 황제 권위. 일본은 185C. 한국보다 약간 밝다. 히노마루 일장기. 글로벌 브랜드 하면 이거 고려해야 한다. 한국에서 잘 먹힌 빨강이 중국 가면 '싸 보인다'. 중국 빨강이 한국 오면 '무겁다'. 작년에 했던 프로젝트. 한중일 동시 론칭. 빨강 3개 버전 만들었다. 같은 브랜드. 다른 색상 코드.한국: 186C (C:0 M:95 Y:91 K:0) 중국: 1788C (C:0 M:100 Y:91 K:20) 일본: 185C (C:0 M:97 Y:92 K:0)육안으로 거의 구분 안 된다. 근데 각국에서 반응 달랐다. 한국: "우리 느낌이네요." 중국: "대기업 같아요." 일본: "깔끔하네요." 같은 브랜드가 다르게 읽힌다. 1mm 차이로. AI가 못 하는 것 요즘 AI 툴 많다. "브랜드 컬러 추천해드려요." 키워드 넣으면 팔레트 나온다. "혁신, 신뢰, 열정" 입력하면 빨강 3개 제시. 편하다. 빠르다. 근데 못 한다. 맥락 읽기. AI는 185C가 왜 코카콜라 빨강인지 모른다. 100년 역사 모른다. 경쟁사와의 1도 차이 전략 모른다. 키워드만 본다. "식음료 + 신뢰 = 185C" 근데 실제는 이렇다. "1886년 약국 시럽 + 경쟁자 갈색병 + 차별화 필요 + 청량감 + 100년 일관성 = 185C" 맥락이 색을 만든다. AI는 숫자 줄 수 있다. 근데 이유는 못 준다. 디자이너는 이유 판다. 클라이언트는 이유 산다. "왜 이 빨강인가요?" 3분 설명할 수 있으면 디자이너다. 못 하면 픽셀 푸셔. 10년 후에도 빨강일까 브랜드 레드는 진화한다. 코카콜라 185C, 100년 넘게 썼다. 근데 미세하게 바뀌었다. 1950년대 185C ≠ 2024년 185C. 인쇄 기술 바뀌었다. 모니터 생겼다. LED 생겼다. 같은 코드여도 구현 방식 달라지면 색 달라진다. 브랜드는 적응한다. 미세 조정한다. 소비자는 모른다. 그냥 "코카콜라 빨강" 본다. 10년 후엔 또 바뀔 것이다.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나오면. VR 보편화되면. 빨강의 정의가 바뀐다. 근데 '코카콜라 빨강'은 남는다. 브랜드 레드는 코드가 아니라 인상이니까. 크레용에서 Pantone까지 결국 이거다. 클라이언트는 크레용 12색 세계에서 산다. 빨강은 하나다. 디자이너는 Pantone 2000색 세계에서 산다. 빨강은 스펙트럼이다. 브랜드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내 역할은 번역이다. 클라이언트가 상상하는 빨강을 Pantone 좌표로. 그 좌표를 브랜드 미래로. "그냥 빨강으로 해주세요." 괜찮다. 시작점이다. "어떤 빨강일까요?" 질문이 답을 만든다.185C와 186C, 1도 차이. 그 1도가 100년 브랜드 만든다.
- 13 Dec, 2025
컨셉 회의에서 의견이 갈릴 때
컨셉 회의에서 의견이 갈릴 때 오후 3시, 회의실 회의실에 들어갔다. 민수, 지은, 그리고 박 디렉터. 다들 모니터 앞에 앉았다. "시작할까요." 컨셉 3개를 준비했다. 클라이언트는 친환경 화장품 브랜드. 론칭 3개월 남았다. 예산은 적당하다. 기대는 크다. 첫 번째 안을 띄웠다. 미니멀. 화이트와 그린. 깔끔하다. 무난하다. "좋은데요." 민수가 말했다. "요즘 친환경 브랜드 트렌드랑 잘 맞아요." 박 디렉터는 고개를 저었다. "트렌드를 따라가면 안 되지. 우리가 만들어야지." 시작됐다.두 번째 안 다음 컨셉을 보여줬다. 아날로그 느낌. 손그림 일러스트. 내추럴 톤. 내가 밀고 싶은 안이다. "이건 좀..." 지은이 말을 아꼈다. "타깃이 2030인데 너무 감성적이지 않나요?" "감성이 문제가 아니라 차별화가 포인트야." 내가 설명했다. "경쟁사 10개가 다 미니멀인데." 박 디렉터가 화면을 가까이 봤다. "브랜드 에센스는 맞는데, 확장성이 고민이네." 확장성. 그 말이 나오면 끝이다. "패키지에는 좋은데 디지털에서 어떻게 풀지 모르겠어요." 민수가 거들었다. 셋이서 10분을 얘기했다. 결론은 보류.세 번째 안과 침묵 마지막 컨셉. 볼드하다. 타이포 중심. 컬러는 강렬하다. 실험적이다. 침묵이 흘렀다. 5초. 10초. "클라이언트가 받아들일까요?" 지은이 먼저 말했다. "받아들이게 만드는 게 우리 일이잖아." 박 디렉터가 답했다. "하지만 이번 클라이언트는 보수적이에요. 지난 미팅 때 봤잖아요." 맞는 말이다. 클라이언트는 45세 대표. 안전한 걸 좋아한다. 첫 미팅 때 레퍼런스로 가져온 게 10년 전 브랜드들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설득을 잘해야지." 박 디렉터는 물러서지 않았다. 민수는 가만히 있었다. 3년차는 끼어들기 어렵다. 아직. 나는 중간이다. 디렉터 의견도 이해한다. 팀원 현실론도 맞다. 그리고 클라이언트 성향도 안다. 중간관리자의 위치 "잠깐 정리하죠." 내가 끼어들었다. 화이트보드에 섰다. 세 안을 나열했다. 장단점을 적었다. "1안은 안전하지만 차별화가 약해요. 2안은 콘셉트는 좋은데 확장성 보완이 필요하고. 3안은 강하지만 클라이언트 설득이 관건이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디렉터님, 3안으로 가고 싶으신 이유가 뭔가요?" "이 브랜드가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목소리가 있어야 해. 1, 2안은 묻혀." "민수, 지은, 너희는?" "전 2안이요. 컨셉도 맞고 실무적으로 작업 가능해요." 지은이 답했다. "저는..." 민수가 머뭇거렸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다 장단점이 있어서." 정직한 답이다.민주적 결정의 함정 "투표할까요?" 민수가 제안했다. 박 디렉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디자인은 투표로 결정하는 게 아니야." 맞다. 하지만 틀렸다. 민주적으로 결정하면 평균값이 나온다. 무난한 안. 아무도 싫어하지 않지만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디자인. 그런데 독단으로 밀어붙이면? 팀원은 동력을 잃는다.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구나" 생각한다. 다음 프로젝트에서 수동적이 된다. 9년 하면서 배운 거다. 정답은 없다. 상황마다 다르다. "투표는 안 할게요." 내가 말했다. "대신 이렇게 하죠." 절충안이 아닌 것 "2안을 베이스로 가되, 3안의 볼드함을 일부 가져옵니다. 타이포를 좀 더 강하게 키우고, 컬러를 한 톤 올려요. 확장성은 지은이 시스템으로 잡고." "그럼 그냥 섞는 거잖아요." 박 디렉터가 말했다. "섞는 게 아니라 진화예요. 2안의 약점이 힘이 없다는 거였으니까, 3안의 장점을 이식하는 거죠." 침묵. 10초. "괜찮은데요?" 지은이 먼저 반응했다. "그럼 작업 가능해요." 민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박 디렉터는 팔짱을 꼈다. "클라이언트 반응 봐서 3안 방향으로 더 밀어보자. 프레젠테이션에서." 타협이 아니다. 단계적 설득이다. "좋습니다. 그럼 PT 자료에 3안을 레퍼런스로 넣어서, 향후 전개 방향으로 제시하죠." 박 디렉터가 일어섰다. "수요일까지 1차 시안. 금요일 내부 리뷰." 회의 끝. 복도에서 회의실을 나섰다. 민수가 따라왔다. "형, 저도 나중에 저렇게 할 수 있을까요? 의견 조율." "하게 돼." "근데 어떻게 판단해요? 누구 말이 맞는지." "다 맞아. 그게 문제지." 민수가 웃었다. "그럼 답이 뭐예요?" "맥락이야. 클라이언트 성향, 프로젝트 중요도, 팀 컨디션. 다 고려해야 돼. 같은 상황이어도 팀원 구성이 다르면 다른 결정을 해." "복잡하네요." "그래서 시니어지." 복도 끝에서 지은이 커피를 뽑고 있었다. 박 디렉터는 자기 자리에서 이미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각자의 리듬이 있다. 저녁 7시 수정 작업을 시작했다. 2안 파일을 열었다. 타이포를 키웠다. 30pt에서 48pt로. 자간을 줄였다. 타이트하게. 3안에서 쓴 컬러를 하나 가져왔다. 포인트로만. 메인은 내추럴 톤 유지. 일러스트 스타일을 조금 단순화했다. 확장성을 위해. 지은이 말이 맞았다. 디지털에서 구현하려면 이정도는 필요하다. 1시간 작업. 저장. 슬랙에 올렸다. "1차 수정본입니다. 내일 아침에 봐주세요." 박 디렉터가 바로 답했다. "오케이. 방향 괜찮네." 지은도 이모지를 눌렀다. 엄지. 민수는 아직도 자기 작업 중이다. 3년차는 바쁘다. 회의에서 배운 것들 9년 하면서 회의를 몇 번 했나. 세어보지 않았다. 수백 번. 어쩌면 천 번. 초반엔 의견 충돌이 스트레스였다. 왜 내 안을 이해 못 하지?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리지? 지금은 안다. 충돌이 나쁜 게 아니라는 걸. 의견이 갈리는 건 다들 프로젝트에 진심이라는 뜻이다. 아무도 신경 안 쓰면 회의는 10분 만에 끝난다. "네, 좋아요. 그렇게 하죠." 끝. 그게 더 무섭다. 민수가 물었다. 누구 말이 맞냐고. 답은 '다 맞다'다. 하지만 동시에 '다 틀리다'. 박 디렉터 말도 맞다. 브랜드는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안전한 디자인은 묻힌다. 지은 말도 맞다. 실무 가능성을 무시하면 프로젝트는 표류한다. 민수도 맞다. 모르겠다는 게 정직한 답일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나는 이걸 하나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다. 중간의 무게 시니어 디자이너. 프로젝트 리드. 애매한 위치다. 디렉터만큼 권한은 없다. 하지만 결정은 해야 한다. 팀원만큼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실무도 해야 한다. 클라이언트는 나를 '디렉터'로 본다. 박 디렉터는 나를 '실무 책임자'로 본다. 민수와 지은은 '팀장님'이라고 부른다. 역할이 여러 개다. 통역사 같다. 디렉터의 비전을 팀원이 이해할 수 있게. 팀원의 현실을 디렉터가 받아들일 수 있게. 우리 안을 클라이언트가 선택할 수 있게. 피곤하다. 당연하다. 하지만 이게 내 일이다. 컨셉 회의에서 의견이 갈릴 때, 누군가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 오늘은 내가 그 역할이었다. 수요일 결과 수요일 오전. 1차 시안 완성. 박 디렉터가 봤다. "좋아. PT 자료 만들어." 지은이 시스템 가이드를 정리했다. 로고 사이즈별 규정. 컬러 팔레트. 타이포 위계. 민수가 목업을 만들었다. 패키지에 적용한 모습. 쇼핑백. 웹사이트 메인. 금요일 내부 리뷰에서 통과했다. 수정 사항 몇 개. 크지 않다. 다음 주 화요일. 클라이언트 PT. 복도에서 민수를 만났다. "형, 회의 때 그 방법 배우고 싶어요." "뭐?" "의견 조율하는 거요. 형은 어떻게 판단해요?" "그냥... 많이 해봐야 돼. 경험." "경험이요?" "응. 10번 틀려봐야 11번째 맞출 수 있어." 민수가 웃었다. "위로가 안 되는데요." "위로 아니야. 사실이지." 컨셉과 현실 사이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는 건 창작과 비즈니스 사이를 걷는 거다. 예술가처럼 순수할 순 없다. 클라이언트가 있으니까. 영업사원처럼 타협할 순 없다. 디자이너니까. 회의에서 의견이 갈리는 건, 각자가 서 있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박 디렉터는 '브랜드의 미래'를 본다. 5년 뒤, 10년 뒤. 지은은 '지금 가능한 것'을 본다. 납기, 예산, 실무 공수. 민수는 '배우는 중'이다. 아직 자기 위치를 찾고 있다. 나는 '내일'을 본다. 다음 미팅, 다음 수정, 다음 PT. 다 필요하다. 한 사람 관점으로는 프로젝트가 안 된다. 그래서 회의를 한다. 싸우는 게 아니라 각도를 맞추는 거다. 오늘 회의는 성공이었다. 의견이 갈렸지만 방향을 찾았다. 아무도 불만족스럽지 않고, 누구도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은 지점. 그게 팀워크다. 퇴근길 9시에 나왔다. 야근은 아니다. 그냥 작업이 끝난 시간. 지하철에서 오늘 회의를 떠올렸다. 3년 전 같았으면 스트레스받았을 거다. "왜 내 안을 못 알아들어?" 하면서. 지금은 다르다. 의견 충돌은 프로세스다. 더 나은 결과로 가는 과정. 중요한 건 '누가 이기냐'가 아니라 '프로젝트가 이기냐'다. 박 디렉터의 3안이 최종이 될 수도 있다. 클라이언트가 의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지은의 2안 베이스가 안전할 수도 있다. 시장에서 잘 먹힐 수도 있다. 내가 제안한 절충안이 최선일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다. 화요일 PT에서 알게 된다. 그때까지는 각자 최선을 다하는 거다. 회의에서 싸우고, 작업실에서 협업하고, 복도에서 농담하고. 그게 우리 일이다. 집에 도착했다. 아내가 물었다. "오늘 어땠어?" "회의 좀 길었어. 의견이 안 맞아서." "결론은?" "냈지. 뭐." "고생했네." 씻고 맥주 한 캔 땄다. 내일도 회의다. 다른 프로젝트. 또 의견이 갈릴 거다. 괜찮다. 9년째 하는 일이다.의견이 갈리는 건 무관심보다 낫다. 싸우는 팀이 이긴다.
- 12 Dec, 2025
인스타그래머를 위한 로고는 다르다
프로필 사진의 반란 클라이언트가 말했다. "우리 로고, 인스타 프로필에서 안 보여요." 명함엔 멀쩡했다. A4 제안서에도 괜찮았다. 근데 110x110픽셀 프로필 사진으로 들어가는 순간, 망했다. 디테일은 뭉개지고, 글자는 읽히지 않고, 색상은 번졌다. 2015년만 해도 이런 일 없었다. 명함, 간판, 브로슈어. 그게 브랜딩의 전부였다. 로고는 인쇄물 기준으로 만들면 됐다. CMYK 색상, 1mm 두께 선, 8pt 글자. 이게 룰이었다. 지금은? 인스타그램 프로필 사진이 첫인상이다. 110픽셀 원 안에서 브랜드가 결정된다. 네이버 블로그 썸네일, 카카오톡 채널 프로필, 유튜브 채널 아트. 전부 디지털 스크린이다. 지난주 미팅에서 한 스타트업 대표가 물었다. "로고 왜 이렇게 단순하게 만드셨어요?" 설명했다. "인스타그램에서 보세요." 핸드폰 꺼내서 프로필 사진 띄웠다. 알아봤다. 한눈에.110픽셀의 진실 실험했다. 기존 로고 50개를 인스타 프로필 사이즈로 줄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섬세한 세리프체? 뭉개졌다. 가는 라인 워크? 사라졌다. 그라데이션? 얼룩이 됐다. 심벌과 로고타입 조합? 심벌만 남고 글자는 안 읽혔다. 명품 브랜드들 봤다. 에르메스, 샤넬, 루이비통. 얘네 로고는 역사가 100년이다. 당연히 인쇄물 시대 디자인이다. 근데 인스타에선? 심벌만 쓴다. 로고타입은 버린다. 나이키 스우시, 애플 사과, 맥도날드 M. 얘넨 애초에 심벌이 강했다. 지금 시대에 완벽하다. 110픽셀에서도 또렷하다. 요즘 스타트업 로고 트렌드? 심벌 중심, 단순한 도형, 뚜렷한 색상. 이유가 있었다. 다 인스타그램 때문이다. 작년에 리브랜딩한 패션 커머스 업체. 기존 로고는 브랜드명 12글자에 장식적 심벌. 예뻤다. 근데 앱 아이콘으로 쓰니까 답 없었다. 새 로고는? 브랜드 이니셜 한 글자. 기하학적 도형 안에. 3가지 색만 사용. 모바일에서 죽였다. 클라이언트가 처음엔 너무 단순하다고 했다. 3개월 뒤엔 인스타 팔로워 30% 늘었다며 연락 왔다.가독성 vs 심미성 디자인 스쿨에서 배운 건 심미성이었다. 균형, 조화, 디테일. 교수님은 말했다. "1mm 차이가 브랜드를 만든다." 맞는 말이다. 인쇄물에선. 디지털에선? 가독성이 먼저다. 0.1초 만에 인식돼야 한다. 스크롤 속도가 그렇다. 멈춰서 자세히 보는 사람 없다. 명함 디자인과 프로필 사진 디자인은 다른 게임이다. 명함은 손에 들고 본다. 10초, 20초 본다. 디테일 보인다. 엠보싱, 박, 형압. 다 의미 있다. 프로필 사진은? 피드에서 0.5초 본다. 심벌 알아보고 넘어간다. 끝이다. 디테일은 안 본다. 못 본다. 클라이언트들한테 설명하기 제일 어려운 부분이다. "너무 단순한 거 아니에요?" 계속 듣는다. 이렇게 답한다. "브랜딩은 매체가 결정합니다." 오프라인 매장 있으면? 간판 고려해야 한다. 멀리서 봐도 보여야 한다. 야간 조명도 생각해야 한다. 온라인만 하면? 디지털 스크린이 전부다. 레티나 디스플레이, OLED, LCD. 색상 표현이 다르다. RGB로 작업해야 한다. 요즘은 다크모드도 고려한다. 흰 배경, 검은 배경 둘 다 테스트한다. 인스타 프로필은 흰 배경이다. 스토리는 다양하다. 다 달라 보인다. 지난달에 뷰티 브랜드 로고 만들었다. 심벌은 화장품 용기에 들어갈 거였다. 작았다. 2cm. 근데 인스타 프로필에도 쓴다고 했다. 두 가지 버전 만들었다. 용기용, 디지털용. 용기용은 디테일 살렸다. 섬세한 라인, 그라데이션. 디지털용은 단순화했다. 솔리드 컬러, 두꺼운 라인. 클라이언트가 물었다. "왜 두 개예요?" 설명했다. "용기는 가까이서 봅니다. 프로필은 멀리서 봅니다. 매체가 다르면 디자인도 달라야 합니다." 이해했다. 예산 15% 올려줬다.컬러의 배신 PANTONE 컬러 200개 중에서 고르던 시절이 있었다. 인쇄소랑 통화하면서 "이번엔 348C로 가주세요" 했다. 지금은? HEX 코드 6자리다. #FF6B6B. 이게 전부다. RGB 값 확인하고, 모니터마다 다르게 보이는 거 감수하고, 그냥 간다. 문제는 디바이스마다 색이 다르다는 거다. 아이폰, 갤럭시, LG그램, 맥북. 전부 다르다. 같은 HEX 코드인데 다르게 보인다. 작년에 F&B 브랜드 작업했다. 시그니처 컬러는 코랄 핑크였다. 따뜻한 느낌, 식욕 자극, 브랜드 아이덴티티. 완벽했다. 론칭하고 일주일 뒤 연락 왔다. "인스타에서 색이 이상해요." 확인했다. 갤럭시에선 주황색으로 보였다. 아이폰에선 핑크가 맞았다. 문제는 갤럭시 점유율이 한국에서 더 높다는 거였다. 결국 색 바꿨다. 조금 더 진한 핑크로. 주황색으로 안 보이는 선에서. 클라이언트는 불만이었다. "원래 색이 더 예뻤는데." 맞다. 근데 어쩌겠나. 타겟 유저 80%가 갤럭시 쓴다. 요즘은 로고 컬러 정할 때 무조건 테스트한다. 아이폰 12, 갤럭시 S23, LG그램, 맥북 프로. 4개 기기에 띄워본다. 색상은 3가지 이하로 제한한다. 복잡하면 디바이스 간 차이가 더 심하다. 단순할수록 일관성 유지된다. 그라데이션은? 웬만하면 안 쓴다. 인스타 프로필 사이즈에서 그라데이션은 얼룩이다. 쓰려면 명확한 2컬러 그라데이션. 3컬러 이상은 재앙이다. 타이포의 몰락 예전엔 로고타입이 주인공이었다. 브랜드명을 어떤 서체로 쓰느냐가 아이덴티티였다. 코카콜라 스펜서리안 스크립트, IBM 헬베티카, 구글 Product Sans. 전부 로고타입 중심이다. 근데 인스타에선? 안 보인다. 110픽셀 원 안에 10글자 브랜드명 넣으면 읽기 힘들다. 최근 5년간 만든 로고 67개 분석했다. 심벌 위주가 42개, 로고타입 위주가 25개. 근데 실제로 인스타 프로필에 쓸 때? 42개 전부 심벌만 썼다. 로고타입 25개 중 18개도 결국 이니셜 심벌 추가로 만들었다. 타이포그래피는 디테일 싸움이다. 자간, 행간, 커닝. 1픽셀 차이로 느낌 달라진다. 근데 110픽셀에선? 그런 거 안 보인다. 요즘은 로고 납품할 때 기본으로 3가지 준다. 풀 로고(심벌+로고타입), 심벌만, 이니셜 심벌. 클라이언트한테 설명한다. "풀 로고는 웹사이트 헤더, 명함, 봉투에 쓰세요. 심벌은 인스타 프로필, 앱 아이콘에 쓰세요. 이니셜은 파비콘이나 워터마크에 쓰세요." 처음엔 이해 못 한다. "왜 이렇게 복잡해요?" 설명한다. "매체가 다양해서입니다. 예전엔 명함 하나면 됐습니다. 지금은 20개 매체에 다 들어갑니다." 이해한다. 추가 비용 준다. 인플루언서의 교훈 작년에 재밌는 프로젝트 했다. 인플루언서 개인 브랜딩. 팔로워 50만. 뷰티 카테고리. 첫 미팅에서 물었다. "브랜드 방향성이 어떻게 되세요?" 답했다. "잘 모르겠는데, 일단 프로필 사진 예쁘게 만들어주세요." 웃겼다. 근데 맞는 말이었다. 인플루언서한텐 프로필 사진이 전부다. 피드에서 이름 클릭하면 프로필로 간다. 첫인상이 거기서 결정된다. 팔로우 할지 말지 3초 안에 정한다. 분석했다. 팔로워 많은 인플루언서 200명. 프로필 사진 타입 분류했다. 얼굴 직접 나온 경우: 142명. 심플한 로고/심벌: 38명. 복잡한 디자인: 20명. 재밌는 건 성장률이었다. 심플한 로고 쓴 38명의 월평균 팔로워 증가율이 제일 높았다. 7.2%. 얼굴 나온 그룹은 5.8%. 복잡한 디자인은 3.1%. 이유? 브랜드처럼 보였다. 전문적이었다. 신뢰감 줬다. 그 인플루언서한테 심벌 만들어줬다. 이니셜 기반, 미니멀한 도형, 파스텔 핑크 1컬러. 3개월 뒤 팔로워 68만 됐다. 연락 왔다. "프로필 바꾸고 협찬 제안 2배 늘었어요." 당연하다. 브랜드처럼 보이니까. 요즘은 인플루언서가 브랜드 디자인 더 잘 이해한다. 기업 마케팅 담당자보다. 왜? 본인이 직접 인스타 운영하니까. 매일 프로필 사진 본다. 110픽셀의 중요성 안다. 대기업 마케터는? 인쇄물 시대 사고방식이다. "디테일 살려주세요", "프리미엄한 느낌으로", "고급스럽게". 묻는다. "인스타 프로필에서 보셨어요?" 안 봤다. 앱 아이콘의 역습 로고 작업하면서 제일 스트레스 받는 게 뭔지 아나? 앱 아이콘이다. iOS 앱 아이콘 기본 사이즈: 1024x1024픽셀. 근데 홈 화면에 보이는 건 60x60픽셀. 17배 축소된다. 더 문제는 라운드 처리다. 아이폰은 모서리 둥글게 깎는다. 안드로이드는 원형으로 크롭한다. 같은 디자인인데 다르게 보인다. 작년에 배달앱 리뉴얼 작업했다. 로고는 사각형 프레임에 맞춰 디자인했다. 균형 잡혔다. 예뻤다. 앱 아이콘 넣었더니? 모서리 잘려서 답답해 보였다. 안드로이드 원형으로 하니까 심벌이 너무 작아졌다. 다시 만들었다. 아이콘 전용 버전. 중앙에 집중, 여백 충분히, 라운드 처리 고려. 결과? 로고랑 달라 보였다. 클라이언트가 물었다. "이거 같은 브랜드 맞아요?" 설명했다. "매체 특성상 어쩔 수 없습니다." 이해 못 했다. 설득하는 데 2주 걸렸다. 요즘은 처음부터 앱 아이콘 고려해서 로고 만든다. 원형, 사각형, 라운드 사각형. 3가지 프레임에서 다 테스트한다. 홈 화면에서 다른 앱들이랑 나란히 놓고 본다. 띄나? 묻히나? 한눈에 알아보나? 인스타그램 앱 아이콘 봐라. 그라데이션 카메라. 완벽하다. 유튜브는 빨간 플레이 버튼. 스포티파이는 초록 원에 음파. 전부 단순하다. 전부 강하다. 복잡한 앱 아이콘? 기억 안 난다. 이름 기억하려고 폴더 열어본다. 다크모드의 복수 2019년부터 다크모드가 대세가 됐다. iOS 13, 안드로이드 10. 다 지원한다. 문제는 로고다. 흰 배경에 맞춰 만든 로고, 검은 배경에서 안 보인다. 특히 검은색 로고는 재앙이다. 다크모드에서 사라진다. 작년에 패션 브랜드 로고 작업했다. 블랙 계열 미니멀 디자인. 세련됐다. 고급스러웠다. 클라이언트 만족했다. 인스타 다크모드로 보니까? 없어졌다. 검은 배경에 검은 로고. 윤곽선만 희미하게. 해결책? 라이트 버전 추가로 만들었다. 흰색 라인, 밝은 회색 배경. 다크모드 전용. 클라이언트가 불만이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블랙인데요." 설명했다. "안 보이면 아이덴티티도 없습니다." 결국 수용했다. 가이드라인에 다크모드 버전 추가됐다. 요즘은 로고 만들 때 무조건 두 버전 만든다. 라이트 배경용, 다크 배경용. 색 반전만으로 해결 안 된다. 따로 조정해야 한다. 네이버, 카카오, 토스 봐라. 다 다크모드 버전 따로 있다. 디테일 다르다. 색상 다르다. 두께 다르다. 이제 브랜드 가이드라인에 다크모드 챕터가 필수다. "어두운 배경에서 브랜드 색상이 어떻게 보이나", "가독성 확보 방법", "대체 색상 팔레트". 추가 작업이다. 추가 비용이다. 근데 안 하면? 유저 절반은 안 보는 브랜드 된다. 정사각형의 독재 인스타그램 피드는 정사각형이다. 1:1 비율. 절대 권력이다. 로고는? 대부분 가로형이다. 3:1, 4:1. 브랜드명이 옆으로 길다. 피드에 올리면? 위아래 여백 생긴다. 답답하다. 로고가 작아 보인다. 해결책은 정사각형 버전이다. 심벌 위에 로고타입. 세로 구조. 1:1 비율에 최적화. 근데 이것도 문제다. 가로형이랑 느낌 다르다. 같은 브랜드 같지 않다. 지난달에 홈퍼니싱 브랜드 작업했다. 로고는 가로로 길었다. 제품 사진 위에 올리면 예뻤다. 웹사이트 헤더에도 잘 맞았다. 인스타 피드에선? 끔찍했다. 여백 투성이. 로고 졸라 작았다. 정사각형 버전 만들었다. 심벌 중심, 브랜드명 아래, 1:1 비율. 피드에 완벽했다. 클라이언트가 걱정했다. "버전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세어봤다. 풀 로고 가로형, 풀 로고 세로형, 심벌, 이니셜, 다크모드 버전, 앱 아이콘. 6개. 많다. 근데 어쩌겠나. 매체가 그렇다. 설명했다. "코카콜라도 버전 10개 넘습니다. 글로벌 브랜드 평균 15개입니다." 이해했다. 납득했다. 요즘은 로고 디자인보다 로고 시스템 디자인이다. 하나 만들고 끝이 아니다. 매체별로 최적화한 버전 만든다. 브랜딩은 일관성이다. 근데 일관성은 같은 모양이 아니다. 같은 느낌이다. 매체마다 다르게 생겼어도 같은 브랜드로 느껴지게. 그게 진짜 일관성이다. 애니메이션의 시대 정적인 로고는 끝났다. 움직이는 로고가 대세다. 인스타 스토리, 릴스, 틱톡. 전부 영상이다. 거기 들어갈 로고는 움직여야 한다. 2초짜리 로고 애니메이션. 브랜드 영상 처음과 끝에 들어간다. 이게 요즘 기본이다. 문제는 정적 로고 디자인할 때 애니메이션 생각 안 한다는 거다. 나중에 움직이려니까 안 된다. 요소가 너무 복잡하다. 움직일 게 없다. 요즘은 처음부터 애니메이션 염두에 두고 디자인한다. 어느 부분이 움직일까? 어떤 순서로 나타날까? 2초 안에 완성될까? After Effects 켜고 실시간으로 테스트한다. 안 되면 디자인 수정한다. 지난달에 테크 스타트업 로고 만들었다. 기하학적 도형 조합. 정적으로도 괜찮았다. 근데 애니메이션 넣으니까 살았다. 도형들이 따로 날아와서 조합된다. 2초. 클라이언트가 환호했다. "이거 영상 오프닝에 완벽하네요." 당연하다.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요즘 클라이언트들한테 묻는다. "영상 콘텐츠 만드세요?" 대부분 만든다. 그럼 애니메이션 버전 기본으로 포함한다. 추가 비용? 받는다. 애니메이션은 다른 작업이다. 시간 더 든다. 전문성 다르다. 근데 안 만들 수 없다. 영상 시대니까. 로고가 안 움직이면? 시대에 뒤처진 브랜드처럼 보인다. 브랜딩의 새로운 기준 인쇄물 시대의 로고는 명함 크기가 기준이었다. 가로 9cm. 거기 들어가면 됐다. 디지털 시대의 로고는? 110픽셀 원이 기준이다. 거기서 안 보이면 실패다. 이게 변화의 본질이다. 매체가 바뀌면 디자인 기준도 바뀐다. 명함에서 간판으로 갈 땐? 크기만 키우면 됐다. 비율 유지하면서. 간판에서 프로필 사진으로 갈 땐? 단순화해야 한다. 디테일 버려야 한다. 본질만 남겨야 한다. 이게 어렵다. 클라이언트 설득이 제일 어렵다. "너무 심플한 거 아니에요?" 계속 듣는다. 보여준다. 인스타 프로필 목업. 경쟁사 로고들이랑 나란히. 한눈에 티 나나? 납득한다. 대부분. 안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브랜드는 전통이 중요해요. 디테일이 중요해요." 존중한다. 근데 말해준다. "전통은 매체를 가리지 않습니다. 본질을 지키면서 형태는 바뀔 수 있습니다." 듣는다. 가끔. 브랜딩은 집착이 아니다. 고정이 아니다. 본질을 지키면서 형태는 유연하게. 매체에 맞춰서. 유저 경험에 맞춰서. 인스타그래머를 위한 로고? 다르다. 당연히 다르다. 매체가 다르니까. 기준이 다르니까.프로필 사진 110픽셀이 브랜딩의 새 기준이 된 시대다. 디테일보다 인식성이다.
- 11 Dec, 2025
브랜드 에센스를 설명하는 10분의 프레젠테이션
브랜드 에센스를 설명하는 10분의 프레젠테이션 오전 10시 37분 미팅룸 앞이다. 노트북 켰다. 빔프로젝터 연결 확인. 무드보드 파일 열었다. 3주 작업했다. 브랜드 에센스 한 문장. "일상의 틈새를 채우는 따뜻함." 클라이언트한테 이 한 줄 설명하는 데 10분 쓴다. 말이 안 된다. 근데 이게 내 일이다. 무드보드 17장. 컬러칩 8개. 폰트 샘플 5개. 레퍼런스 이미지 32장. 다 넣으면 60분 분량이다. 10분에 욱여넣어야 한다. 대표님이 들어왔다. "준비됐어요?" 됐다고 했다. 거짓말이다. 프레젠테이션은 항상 준비 안 된 채로 시작한다.첫 3분이 전부다 클라이언트 3명 앉았다. 대표, 마케팅 팀장, 디자인 담당자. 표정 읽는다. 대표는 회의적. 팀장은 기대 반. 담당자는 긴장. "안녕하세요. 시작하겠습니다." 첫 슬라이드. 브랜드명만 크게. 아무 설명 없다. 3초 멈췄다. 숨 쉴 시간이다. 내 숨이 아니라 그들의 숨. "3주 동안 이 브랜드가 뭔지 고민했습니다." 두 번째 슬라이드. "브랜드는 제품이 아니다." 큰 글씨. 또 3초. 팀장이 고개 끄덕였다. 좋은 신호다. "브랜드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의 총합입니다. 우리는 그 감정을 디자인합니다." 클라이언트는 이론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근데 이론 없이 시작하면 나중에 '왜 이렇게 했냐'는 질문에 답 못 한다. 첫 3분은 명분 쌓는 시간이다. 세 번째 슬라이드. 경쟁사 로고 5개 나열. "시장은 이미 포화입니다." 대표가 앞으로 기울었다. 관심 생겼다. "그래서 우리는 다르게 말해야 합니다." 3분 지났다. 이제 본론이다.에센스라는 이름의 추상 "일상의 틈새를 채우는 따뜻함." 이 문장 만드는 데 일주일 걸렸다. 클라이언트 인터뷰 3시간. 타깃 리서치 2일. 동료들이랑 브레인스토밍 5시간. 퇴근길에 혼자 중얼거리며 수정한 횟수 20번. 근데 클라이언트한테는 10초 만에 던진다. "무슨 뜻이냐고요?" 예상한 질문이다. 항상 나온다. 다음 슬라이드. 사진 하나. 카페 창가에 앉은 사람. 햇살 한 줌. 커피 한 잔. 아무 설명 없다. "이 순간입니다." 5초 멈췄다. 이미지가 말하게 둔다. "바쁜 하루 중 10분. 혼자만의 시간. 따뜻한 음료 하나. 이게 당신들 브랜드가 파는 겁니다." 담당자가 메모했다. 좋은 신호다. 다음 슬라이드. 사진 3장. 출근길 지하철. 점심시간 공원 벤치. 퇴근 후 집 소파. 전부 '틈새'다. "제품은 텀블러입니다. 근데 우리가 파는 건 '나만의 시간'이에요." 팀장이 웃었다. "아, 그렇구나." 에센스는 추상이다. 근데 추상으로 설명하면 안 된다. 구체적 이미지로 번역해야 한다. 이게 프레젠테이션의 핵심이다. 6분 지났다. 이제 시각화다.컬러는 감정이다 "이 에센스를 색으로 만들었습니다." 컬러칩 3개. 따뜻한 베이지. 부드러운 테라코타. 깊은 카키. "베이지는 안정감입니다. 누구나 편한 색. 테라코타는 온기예요. 따뜻하지만 강렬하지 않은. 카키는 신뢰. 자연스러움." 대표가 물었다. "왜 파란색은 없어요?" 예상한 질문 2번. 클라이언트는 파랑 좋아한다. 신뢰의 색이니까. "파란색은 차갑습니다. 시원하죠. 근데 따뜻하진 않아요." 화면 넘겼다. 경쟁사 브랜드들. 전부 파랑, 초록, 회색. "시장은 이미 차가워요. 우리는 따뜻해야 합니다." 팀장이 고개 끄덕였다. 대표는 아직 확신 없다. 괜찮다. 컬러는 나중에 바뀐다. 항상 그렇다. 다음 슬라이드. 컬러 조합 예시. 베이지 바탕에 테라코타 포인트. 카키 텍스트. "이렇게 쓰면 따뜻하면서 세련됩니다." 담당자가 폰으로 찍었다. 마음에 든다는 뜻이다. "폰트 보시죠." 8분 지났다. 시간 없다. 빠르게 간다. 산세리프 2개. 둥근 느낌. 너무 딱딱하지 않게. "제목용, 본문용. 전부 가독성 높습니다. 근데 친근해요." 대표가 물었다. "이거 외국 폰트예요?" "네. 한글 폰트는 조합 제안서에 넣었습니다." 9분. "마지막입니다." 10분의 마법 마지막 슬라이드. 목업 3개. 텀블러에 로고. 쇼핑백에 패턴. 명함에 컬러. "이게 완성된 브랜드입니다." 말 안 했다. 보여줬다. 이미지가 설명한다. 5초 멈췄다. 호흡이다. "일상의 틈새를 채우는 따뜻함. 이 한 문장을 시각화했습니다." 10분 됐다. 딱 맞췄다. 대표가 먼저 박수쳤다. 팀장이 따라했다. 담당자는 웃었다. "질문 있으세요?" 항상 있다. 근데 이미 답은 프레젠테이션 안에 다 넣었다. "로고 시안은 언제 나와요?" "다음 주 월요일입니다. 오늘은 방향 공유였어요." 대표가 말했다. "좋습니다. 이 방향으로 가죠." 끝났다. 미팅룸을 나오며 복도에서 동료가 물었다. "어땠어?" "통과." "역시. 프레젠테이션 잘하더라." 잘하는 게 아니다. 많이 했을 뿐이다. 10분 프레젠테이션 준비 시간. 실제로는 3주다. 리서치 1주. 컨셉 개발 1주. 자료 정리 3일. 리허설 2일. 슬라이드 수정 10번. 근데 클라이언트는 10분만 본다. 자리 돌아왔다. 노트북 열었다. 다음 프로젝트 폴더. "브랜드 에센스 도출" 파일 새로 만들었다. 또 시작이다. 동료가 말했다. "커피 갈래?" "응." 복도 걸으면서 생각했다. 브랜드 에센스. 한 문장으로 만드는 마법. 10분으로 설명하는 기술. 이게 내 일이다. 추상을 구체로. 감정을 시각으로. 3주를 10분으로. 힘들다. 근데 재밌다.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주문했다. 오늘 세 번째다. "고생했어." 동료가 말했다. "아직 로고 작업 남았어." "그래도 오늘은 잘했잖아." 맞다. 오늘은 잘했다.3주를 10분에 우겨넣는 게 브랜드 디자이너의 일이다. 근데 그 10분이 통하는 순간, 3주가 아깝지 않다.
- 10 Dec, 2025
출근 후 가장 먼저 하는 일 - 클라이언트 메일 확인의 심리학
출근 후 가장 먼저 하는 일 - 클라이언트 메일 확인의 심리학 10시, 회사 앞 출근했다. 10시 2분. 늦은 건 아니다. 에이전시는 자유롭다. 9시 출근 강요 안 한다. 대신 야근도 자유다. 어제 밤 11시에 퇴근했으니 10시면 양심적이다. 엘리베이터 안. 휴대폰 확인 안 했다. 일부러. 사무실 도착 전까지는 현실 유예 시간이다. 커피 들고 있으면 출근한 것 같지 않다. 착각이지만 필요한 착각이다. 5층 도착. 문 열고 들어간다. 직원들 반 정도 왔다. 10시 30분까지는 다 온다. 내 자리로 간다. 맥북 켠다. 부팅 소리. 이제부터가 진짜 출근이다.메일함을 여는 순간 아웃룩 실행. 로딩 중. 심호흡 한 번. 매일 하는 의식이다. 메일함이 열린다. 읽지 않은 메일 14개. 어제 저녁 이후 쌓인 것들이다. 제목만 훑는다. 발신자 확인한다. 누가 보냈는지가 중요하다. 김대리(클라이언트) - "Re: 로고 시안 검토 결과" 박부장(클라이언트) - "브랜드북 수정 요청 건" 이실장(내부) - "오늘 회의 안건" 정대표(클라이언트) - "좋았습니다!" 마지막 메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좋았습니다!" 이 한 줄. 오늘 하루 색깔이 정해진다. 정대표 메일부터 연다. 역순이다. 좋은 것부터 보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어제 보내주신 컨셉 방향 좋았습니다. 팀 내부에서도 반응 좋고요. 1안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에 뵙죠." 54자. 짧지만 충분하다. 가슴이 뜨겁다는 게 이런 거다. 한 달 동안 리서치하고 컨셉 잡았다. 무드보드 세 번 갈아엎었다. 어제 PT 전날 밤 12시까지 키노트 다듬었다. 그 모든 게 "좋았습니다" 네 글자로 보상받는다.수정 요청의 온도 기분 좋을 때 나쁜 소식 봐야 한다. 감정 관리. 김대리 메일. "Re: 로고 시안 검토 결과". Re가 붙었다는 건 대화가 이어진다는 뜻이다. 클릭. "안녕하세요. 검토했습니다. 전체적으로 괜찮은데 몇 가지 수정 부탁드립니다." 몇 가지. 이 단어가 무섭다. 경험상 '몇 가지'는 최소 다섯 가지다. 스크롤 내린다. "1. 로고 컬러를 좀 더 밝게 해주세요. 지금은 너무 무겁습니다. 2. 폰트를 고딕으로 바꿔주세요. 명조는 올드해 보입니다. 3. 심볼 크기를 키워주세요. 임팩트가 약합니다. 4. 전체적으로 모던하게 가능할까요? 5. 아, 그리고 후보안 3개 더 보고 싶습니다." 다섯 개. 예상 적중. 한숨 나온다. 입 밖으로는 안 나온다. 사무실에서 한숨 쉬면 옆자리가 묻는다. "무슨 일 있어?" 설명하기 귀찮다. 4번이 문제다. "모던하게". 이 단어만큼 추상적인 주문이 없다. 사람마다 모던의 정의가 다르다. 김대리 머릿속 모던과 내 머릿속 모던이 같을 확률은 30%다. 그래도 괜찮다. 수정 요청은 일의 일부다. 피드백 없는 프로젝트는 없다. 중요한 건 톤이다. 김대리 메일은 정중하다. '부탁드립니다'가 두 번 나온다. 존중받는 느낌. 이 정도면 할 만하다.박부장의 메일 다음. 박부장 메일. 제목만 봐도 안다. 이 사람은 다르다. 클릭. "브랜드북 봤는데요. 솔직히 기대 이하네요. 이게 3주 작업물입니까? 전체적으로 다시 해주세요. 컨셉부터 이해가 안 갑니다." 마침표가 칼이다. 물음표는 비수다. '솔직히'라는 단어. 이건 방패다. '솔직히'를 앞세우면 뭘 말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예의는 없어진다. '이게 3주 작업물입니까?' 반말 의문문. 존중 제로. '전체적으로 다시'. 이 네 글자가 제일 무섭다. 부분 수정이 아니다. 전체 리셋이다. 3주가 증발한다. 키보드 위에 손 올린다. 답장 버튼 누르지 않는다. 지금 쓰면 안 된다. 감정이 들어간다. 창 닫는다. 일단 묵힌다. 오후에 쓴다. 그때도 화나면 내일 쓴다. 박부장 같은 클라이언트가 있다. 항상 있다. 프로젝트 10개 중 2개는 박부장을 만난다. 확률의 문제다. 이런 메일이 아침에 오면 하루가 무너진다. 점심 입맛 없다. 오후 작업 집중 안 된다. 퇴근 후에도 생각난다. 그래서 순서가 중요하다. 정대표 메일을 먼저 본 게 신의 한 수다. 긍정 에너지가 충전됐다. 박부장 메일을 받아낼 힘이 생겼다. 메일의 심리학 9년 했다. 메일 읽는 순서에 법칙이 생겼다. 1. 제목으로 분류한다 긍정(칭찬, 승인, 계약), 중립(회의, 공지, 일정), 부정(수정, 거절, 컴플레인). 2. 긍정부터 읽는다 기분 좋을 때 나쁜 소식 소화된다. 반대는 안 된다. 아침에 박부장 메일 먼저 보면 하루 망한다. 3. 부정은 천천히 바로 답장 안 한다. 최소 2시간 묵힌다. 감정 가라앉힌다. 프로페셔널하게 응대한다. 4. 중립은 나중에 회의 안건, 공지는 급하지 않다. 업무 시작하고 처리한다. 이 순서 지키면 멘탈 관리된다. 아침 메일이 하루 톤을 정한다. 첫 메일이 긍정이면 오후까지 간다. 첫 메일이 부정이면 점심 전에 무너진다. 메일은 텍스트지만 감정이다. 53자가 기쁨이 되고, 127자가 분노가 된다. 같은 내용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다. "수정 부탁드립니다" vs "다시 해주세요". 의미는 같다. 받는 기분은 다르다. 클라이언트는 모른다. 자기 메일 한 통이 디자이너 하루를 좌우한다는 걸. 아침 10시에 보낸 메일이 오후 6시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걸. 답장을 쓰는 시간 정대표에게 먼저 답장한다. "감사합니다. 좋은 방향으로 함께 만들어가요. 화요일 뵙겠습니다." 34자. 짧게. 감사 표현하고 끝. 길게 쓸 필요 없다. 좋은 관계는 간결하다. 김대리 메일. 수정 요청 다섯 개. "검토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방향으로 수정해서 목요일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추가 후보안 3개 함께 준비하겠습니다." 존중받았으니 존중한다. '~겠습니다'를 세 번 썼다. 프로페셔널한 거리 유지. 박부장 메일은 안 연다. 오후 3시에 쓴다. 지금은 아니다. 내부 메일 확인한다. 이실장. "오늘 회의 안건". "오전 11시 - 신규 클라이언트 브리핑 오후 2시 - A프로젝트 중간 점검 오후 4시 - 디자인 리뷰" 회의 세 개. 표준적인 화요일이다. 메일 확인 끝. 시간 확인. 10시 47분. 45분 걸렸다. 아침 메일 확인은 루틴이다. 커피 한 잔 하면서 천천히. 급하게 하면 놓친다. 중요한 건 놓치고 급한 것만 본다. 메일은 업무의 시작이다. 오늘 뭘 해야 하는지 정리된다. 우선순위가 보인다. 클라이언트 심리가 읽힌다. 메일 너머의 관계 박부장 메일 다시 생각한다. 화가 나지만 이해는 된다. 박부장도 위에서 받는다. 임원한테 보고했다가 털렸을 거다. "이게 뭐야?" 들었을 거다. 그 스트레스가 내게 온다. 폭포수다. 임원 → 박부장 → 나. 박부장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못된 메일 쓰는 사람일 뿐이다. 대면하면 괜찮다. 미팅 때는 웃는다. 메일에서만 칼 같다. 텍스트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다. 얼굴 안 보면 예의 잊는다. 목소리 안 들리면 감정 못 읽는다. "전체적으로 다시 해주세요" 이 문장. 대면에서는 못 한다. 미팅에서 내 눈 보면서 "3주치 다시 하세요" 못 말한다. 메일은 방패다. 화면 뒤에 숨어서 쏜다. 상처 안 보인다. 표정 확인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전화 건다. 메일로 주고받다가 꼬이면 전화한다. 5분 통화가 10통 메일을 대체한다. "박부장님, 메일 확인했습니다. 어떤 부분이 기대와 달랐는지 통화로 여쭤봐도 될까요?" 이렇게 시작한다. 목소리 들으면 달라진다. 톤 부드러워진다. "아 그게 아니고요..." 설명 시작한다. 결국 사람이다. 텍스트 아니고 사람이다. 메일 너머에 누군가 있다. 그 사람도 스트레스받고 피곤하고 실수한다. 메일이 정하는 하루 11시 회의 시작. 신규 클라이언트 브리핑. 화장품 브랜드다. 런칭 준비 중이다. 로고, 패키지, 브랜드북 전체. 대표님이 설명한다. "자연주의 콘셉트입니다. 타겟은 30대 여성이고요..." 듣는다. 메모한다. 그런데 집중이 안 된다. 머릿속에 박부장 메일이 맴돈다. "전체적으로 다시". 이 네 글자가 뇌를 점령했다. 고개 끄덕인다. 알아듣는 척한다. 실제로는 50%만 들린다. 회의 끝. 1시간 걸렸다. 나온다. 점심시간. 식당 간다. 동료 셋이서. 파스타 먹는다. "요즘 어때?" 후배가 묻는다. "그냥. 할 만해." 대답한다. 거짓말이다. 할 만하지 않다. 박부장 프로젝트가 발목 잡는다. 3주치 다시 하려면 밤샘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말 안 한다. 말하면 현실이 된다. 불평하면 에너지 빠진다. 파스타가 안 넘어간다. 입맛 없다. 역시 아침 메일이 영향을 미친다. 오후 2시. A프로젝트 중간 점검. 순조롭다. 클라이언트 만족도 높다. 수정 요청 적다. 왜 이렇게 차이 나나. 같은 우리 팀이 작업했다. 프로젝트 난이도도 비슷하다. 클라이언트다. 결국 사람이다. 박부장과 A사 담당자는 다르다.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이 다르다. 존중의 유무가 다르다.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일이 즐겁다. 디자인 퀄리티도 올라간다. 서로 신뢰하면 모험할 수 있다. 시도하고 실험하고 깨뜨린다. 나쁜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일이 지옥이다. 움츠러든다. 안전한 것만 제안한다. 거절당할까 봐 평범하게 간다. 메일 한 통이 관계를 만든다. 관계가 결과물을 만든다. 오후 4시, 디자인 리뷰 팀 내부 리뷰 시간. 각자 작업물 공유한다. 피드백 주고받는다. 내 차례. 박부장 프로젝트 브랜드북 보여준다. "클라이언트가 전체 수정 요청했어요. 컨셉부터 다시 잡으래요." 팀장이 본다. 스크롤 내린다. "왜? 이거 괜찮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클라이언트 생각은 달라요." "어떤 피드백 받았어?" 박부장 메일 보여준다. 팀장이 읽는다. "아... 이분이구나." 팀장도 안다. 박부장 타입을. 이런 클라이언트 있다는 걸. "통화해봤어?" "아직이요." "전화해. 메일로 하지 말고. 정확히 뭘 원하는지 확인해." 조언이다. 좋은 조언이다. 리뷰 끝. 자리 돌아온다. 박부장한테 전화한다. 두 번 신호음. 받는다. "네, 박부장입니다." "안녕하세요, 박브랜드입니다. 오전에 보내주신 메일 확인했습니다. 통화 가능하신가요?" "네, 말씀하세요." 목소리 듣는다. 메일이랑 다르다. 덜 날카롭다. "어떤 부분이 기대와 다르셨는지 구체적으로 여쭤봐도 될까요? 정확히 수정해드리고 싶어서요." "아... 그게 말이죠." 설명 시작한다. 10분 동안. 들으면서 메모한다. 구체적인 포인트들 나온다. '전체 수정'이 아니었다. 세 가지 섹션이 문제였다. 나머지는 괜찮다고 한다. "컨셉 자체는 좋았어요. 근데 표현 방식이 저희 타겟이랑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이해된다. 메일에선 안 보였던 게 통화에서 보인다. "알겠습니다. 그럼 컨셉은 유지하되 표현 방식을 타겟에 맞춰서 조정하면 되겠네요." "네, 그렇게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목소리 밝아진다. 메일 쓸 때랑 다른 사람이다. 전화 끊는다. 가슴이 편해진다. '전체 수정'이 '부분 조정'으로 바뀌었다. 3주가 3일로 줄었다. 메일의 무게 퇴근 시간. 7시. 오늘은 일찍 간다. 야근 없다. 맥북 정리한다. 내일 할 일 리스트 작성한다.김대리 로고 수정안 3종 박부장 브랜드북 부분 조정 신규 클라이언트 컨셉 리서치 시작할 만하다. 집 가는 길. 지하철 탄다. 휴대폰 본다. 메일 알림 두 개. 심장 빨리 뛴다. 조건반사다. 확인한다. 하나는 뉴스레터. 하나는 내부 공지. 안심한다. 클라이언트 아니다. 메일이 주는 긴장감. 이게 일상이 됐다. 알림 뜰 때마다 조금씩 떨린다. 좋은 소식일까, 나쁜 소식일까. 9년 했지만 익숙하지 않다. 매번 열 때마다 심장 뛴다. 메일은 가볍지 않다. 텍스트는 무게가 없지만 내용은 무겁다. 53자가 하루를 바꾼다. 127자가 일주일을 바꾼다. 클라이언트는 모른다. 자기가 보낸 메일의 무게를. 디자이너는 안다. 매일 아침 10시에 체감한다. 출근 후 첫 번째 일. 클라이언트 메일 확인. 이게 하루의 톤을 정한다. 기분을 좌우한다. 에너지를 충전하거나 소진한다. 그래서 나는 순서를 지킨다. 좋은 것부터 본다. 나쁜 것은 천천히. 중립은 나중에. 심리학이다. 감정 관리다. 생존 전략이다. 9년의 노하우다.오늘도 메일 14개 확인했다. 내일도 똑같을 거다. 하지만 괜찮다. 정대표 메일 같은 게 하나씩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