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 Dec, 2025
뭔가 임팩트가 부족해요 - 클라이언트의 불명확한 피드백과 싸우기
뭔가 임팩트가 부족해요 화요일 오후 3시 회의실에 들어갔다. 클라이언트 세 명. 우리 팀 네 명. 2주 작업한 브랜드 아이덴티티 중간 발표. "컨셉은 '도시 속 자연'입니다. 유기농 카페 브랜드의 본질을 담았어요." 무드보드를 넘긴다. 로고 시안 세 개. 컬러 팔레트. 타이포그래피 시스템. 어플리케이션 목업까지. 준비는 완벽했다.대표님이 팔짱을 꼈다. 30초 침묵. 아 이거 시작이다. "좋은데요. 근데 뭔가... 임팩트가 부족한 것 같아요." 임팩트. 이 단어가 나오면 회의는 최소 1시간 더 간다. 경험상.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끼셨나요?" "음... 전체적으로요? 뭔가 확 와닿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뭐가 확인데. 마케팅 팀장이 거든다. "저도 비슷하게 느꼈어요. 임팩트가 약해요." 두 명. 경영지원실장까지. "네, 저도 그 느낌 알 것 같아요." 세 명. 만장일치. 임팩트 부족. 임팩트의 정의 회사로 돌아왔다. 팀장이 물었다. "임팩트가 뭐래?" "모르겠어요. 물어봤는데 전체적으로래요." "전체적으로가 제일 답답하지." 맞다. 10년 가까이 이 일 했다. '임팩트 부족'이라는 피드백을 최소 50번은 들었다. 그런데 매번 의미가 다르다. 어떤 클라이언트의 '임팩트'는 '더 화려하게'였다. 어떤 클라이언트의 '임팩트'는 '더 심플하게'였다. 또 어떤 클라이언트는 '임팩트'가 '고급스럽게'를 뜻했다. 같은 단어. 다른 뜻. 디자이너는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 클라이언트의 감정을 디자인 언어로 바꾸는.수요일 오전, 역질문의 기술 다시 미팅을 잡았다. 이번엔 내가 준비했다. "'임팩트'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볼까요?" 화이트보드를 꺼냈다. 질문 리스트. "지금 느끼시는 건 1) 시각적으로 약해서? 2) 메시지가 불명확해서? 3) 경쟁사 대비 차별성이 없어서?" 대표님이 생각했다. "음... 2번? 메시지가 좀." "메시지요. '도시 속 자연'이라는 컨셉이 잘 안 보인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컨셉은 좋아요. 근데 이게 우리 브랜드인지 잘 모르겠어요." 시작이다. 진짜 이슈가 나온다. "브랜드 정체성이 약하다는 거군요. 그럼 '자연'보다 '우리만의 자연'을 더 강조해야겠네요." "맞아요, 그거!" 임팩트 = 브랜드 고유성. 하나 잡았다. 마케팅 팀장은 달랐다. "저는 색이요. 너무 차분해요. 저희가 MZ 타겟인데." "MZ요? 브리프에는 3040 직장인이라고." "아 그건 1차 타겟이고요, 확장은 MZ로 가려고요." 처음 듣는 얘기다. "그럼 타겟을 두 개로 봐야 하는 거네요. 지금 컬러는 3040 직장인용이에요. MZ까지 고려하려면 톤앤매너를 조정해야 해요." "그렇게 해주세요!" 임팩트 = 타겟 확장성. 둘 잡았다. 경영지원실장의 차례. "전 솔직히 로고가 좀... 경쟁사 A랑 비슷해 보여요." "어떤 점에서요?" "둘 다 녹색에 나뭇잎 모티브잖아요." "유기농 카페 브랜드는 90%가 녹색에 나뭇잎이에요. 대신 저희는 서체와 심볼 조합으로 차별화했습니다." "그래도 임팩트가..." "경쟁사와 완전히 다른 색을 원하시나요? 예를 들어 블랙 베이스?" "오, 그거 좋을 것 같은데요?" 임팩트 = 예상 밖의 선택. 셋 잡았다.임팩트의 실체 '임팩트가 부족하다'는 피드백은 거의 항상 불명확하다. 그런데 그게 클라이언트 잘못은 아니다. 그들은 디자이너가 아니다. 자기 감정을 디자인 용어로 설명할 수 없다. 그냥 '뭔가 아니다'라는 느낌만 있다. 우리 일은 그 느낌을 해독하는 거다. 9년 하면서 발견한 것들: 임팩트 부족 = 브랜드 정체성 미약 (40%) "이게 우리 브랜드인지 모르겠어요" → 고유성 강화 필요. 임팩트 부족 = 타겟 불일치 (30%) "우리 고객이 좋아할까요?" → 타겟 재정의 필요. 임팩트 부족 = 경쟁사 차별화 부족 (20%) "다른 브랜드랑 비슷해요" → 시장 분석 재검토. 임팩트 부족 = 그냥 마음에 안 듦 (10%) "뭔가 아니에요" → 이건 솔직히 답이 없다. 마지막 10%가 제일 힘들다. 감으로 가는 거라서. 수요일 오후, 역제안 질문으로 이슈를 세 개 잡았다. 이제 해결책이다. "정리하면, 세 가지 방향이 나왔어요." 화이트보드에 썼다. 방향 1: 브랜드 고유성 강화'도시 속 자연'에서 '당신만의 정원'으로 컨셉 조정 개인화 메시지 강화 타이포그래피를 더 독특하게방향 2: MZ 타겟 반영컬러 팔레트에 비비드 포인트 추가 SNS 중심 어플리케이션 개발 인포그래픽 스타일 간소화방향 3: 블랙 베이스 실험유기농 = 녹색 공식 깨기 프리미엄 도시 카페 이미지 경쟁사 대비 극단적 차별화"세 방향 다 해보시겠어요? 아니면 하나 선택하시겠어요?" 대표님이 웃었다. "다 좋은데, 일정은요?" "방향 하나면 1주. 세 개 다 하면 2주 반." "예산은요?" "방향 하나는 현재 계약 내. 세 개는 추가 견적 필요해요."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 일정과 예산 없이 '다 해보자'는 건 지옥이다. "2번으로 가죠. MZ 반영. 확장 가능성이 제일 크니까." 결정 났다. 목요일, 재작업 방향이 명확해지니까 작업이 빠르다. 컬러 팔레트에 코랄 핑크 추가. 세이지 그린 채도 올림. 포인트 옐로우 신설. 타이포그래피는 산세리프 비중 높임. 가독성보다 임팩트. MZ는 직관이다. 인스타그램 템플릿 10종 만듦. 스토리 전용 심볼 단순화. GIF 움직임 추가. 밤 11시까지 작업했다. 아내한테 미안하다고 문자 보냈다. "내일 일찍 들어갈게." 답장: "나도 야근. ㅋㅋ 내일 브런치?" 업계 부부의 장점. 서로 이해한다. 금요일 오후, 재발표 같은 회의실. 같은 사람들. "지난번 피드백 반영했습니다. MZ 타겟 확장 중심으로." 새 무드보드를 펼쳤다. 컬러가 확 달라졌다. 밝고 경쾌하다. 대표님 눈빛이 달라졌다. "오, 이거 좋은데요?" 마케팅 팀장이 폰으로 사진 찍는다. "인스타에 잘 먹히겠어요!" 경영지원실장도 고개를 끄덕인다. "임팩트 확실히 살았네요." 임팩트. 같은 단어인데 이번엔 칭찬이다. 임팩트의 진실 '임팩트'는 디자인 용어가 아니다. 감정 용어다. 클라이언트가 '임팩트 부족'이라고 할 때, 실제로는:"내 기대와 달라요" "우리 브랜드 같지 않아요" "경쟁사보다 약해 보여요" "타겟이 좋아할지 불안해요" "뭔가 아닌 것 같아요"이 중 하나다. 우리 일은 그 '뭔가'를 찾는 거다. 질문으로. 대화로. 때로는 역제안으로. 9년 차가 되어서야 안 건, 좋은 디자인보다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이 먼저라는 것. 클라이언트의 불명확한 피드백은 적이 아니다. 단서다. 그 단서를 풀어내는 게 시니어의 역할이다. 화려한 포트폴리오보다 중요한 건, 클라이언트의 말을 제대로 듣는 귀다. 그리고 그들이 진짜 원하는 걸 디자인으로 번역하는 능력. 임팩트는 클라이언트의 머릿속에 있다. 우리는 그걸 꺼내서 화면에 옮길 뿐이다. 월요일 아침 메일이 왔다. "최종안 승인합니다. 다음 주 목요일 최종 PT 일정 잡아주세요." 2주 만에 중간 발표 통과. 나쁘지 않다. 팀 단톡방에 공유했다. "고생했어요 다들." 주니어 디자이너가 물었다. "형, '임팩트 부족'이라는 피드백 오면 어떻게 대응해요?" "물어봐. 계속. 구체적으로 될 때까지." "그럼 클라이언트 기분 나빠하지 않아요?" "정중하게 물어보면 오히려 좋아해. 자기 말 들어주는 거니까." 진짜다. 클라이언트는 디자이너가 방어적으로 나오는 걸 싫어한다. "이게 정답입니다"라는 태도도 싫어한다. 대신 "당신의 생각을 이해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면 마음을 연다. 디자인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클라이언트와 함께 만드는 거다. 그들의 불명확한 피드백도, 사실은 협업의 일부다.'임팩트'라는 단어 뒤에는 항상 진짜 니즈가 숨어 있다. 찾아내는 게 우리 일이다.
- 03 Dec, 2025
간판 사진을 찍는 일상 - 길 위의 리서치
간판 사진을 찍는 일상 - 길 위의 리서치 출근길 루틴 아침 9시 40분. 집 나섰다. 합정역까지 도보 12분. 이 시간이 중요하다. 폰 카메라 켰다. 습관이다. 길 위의 모든 간판이 리서치 대상이다.오늘은 세탁소 간판이 눈에 띄었다. "삼일세탁소". 1978년부터라고 써있다. 파란색 바탕에 흰색 명조체. 페인트가 벗겨졌다. 찍었다. 5장. 각도 바꿔가며. 빛 받는 부분 집중해서. 옆 건물은 신축이다. 1층에 카페. 간판은 레이저 커팅한 스테인리스. 산세리프. 자간 넓게. 미니멀하다. 두 간판이 나란히 있다. 50년 차이. 이게 재밌다. 기록하는 이유 동료들은 묻는다. "왜 그렇게 사진 찍어요?" 모르겠다. 그냥 찍는다. 리서치라고 하기엔 목적이 없다. 취미라고 하기엔 진지하다. 폴더를 봤다. 간판 사진만 3,247장. 2년 치다. 분류는 안 한다. 날짜순으로 쌓인다. 그게 좋다. 타임라인이 생긴다. 가끔 스크롤 내린다. 작년 봄에 찍은 꽃집 간판. 지금은 치킨집이다. 도시가 바뀐다. 간판으로 알 수 있다. 한글 타이포의 층위 전통시장 갔다. 망원시장. 오후 미팅 전 시간이 남았다. 현수막이 많다. "국내산 돼지고기", "할인행사 중" 손글씨다. 매직으로 썼다.이게 진짜 타이포그래피다. 글자 크기가 불규칙하다. 중심선이 흔들린다. 그런데 읽힌다. 확실하게. 기능이 먼저다. '예쁘게'는 나중이다. 우리가 하는 건 반대다. 예쁘게 만들고 기능 맞춘다. 클라이언트는 '세련됨'을 원한다. 시장 상인은 '전달'을 원한다. 목적이 다르다. 골목 안쪽. "영희네반찬". 노란 바탕에 검은 붓글씨. 20년은 됐다. 페인트 겹겹이 쌓였다. 리브랜딩하면 어떨까. 산세리프로 바꾸고, 색 정리하고. 망칠 것 같다. 이 간판은 이대로가 맞다. 힙한 것들의 법칙 주말. 성수동 갔다. 새 카페가 열었다는 연락 받았다. 간판 봤다. 예상대로다. 고딕. 자간 200%. 흰색 아크릴.요즘 카페는 다 이렇다. 미니멀. 뉴트럴 톤. 심플. 틀렸다는 게 아니다. 공식이 있다는 게 흥미롭다. '힙함'의 문법이 있다.산세리프 자간 넓게 무채색 또는 파스텔 여백 많이 영문 섞기법칙을 따르면 안전하다. 클라이언트도 좋아한다. 문제는 차별화다. 다들 똑같아진다. 옆 건물 보니까 같은 폰트다. 2개월 전 우리가 쓴 거다. 클라이언트가 다른데 말이다. 웃겼다. 트렌드의 속도가 이렇다. 낡은 것의 가치 을지로 프로젝트 있었다. 로컬 브랜딩이다. 답사 나갔다. 인쇄소 골목. 간판이 오래됐다. "대흥인쇄사", "동양제본소". 명조체. 테두리 있고. 금박 들어갔다. 50년대 스타일이다. 지금 만들면 레트로다. 그때는 그냥 간판이었다. 사장님께 물었다. "간판 바꿀 생각 없으세요?" "뭐 하러요. 잘만 나가는데." 맞다. 30년 단골들은 이 간판을 찾는다. 바꾸면 헷갈린다. 브랜딩이 꼭 새 게 아니다. 유지하는 것도 전략이다. 클라이언트한테 말했다. "이 간판들 그대로 두는 게 어때요?" "그럼 우리가 뭘 하는 건데요?" 할 말이 없었다. 시간의 축적 사진 정리했다. 같은 장소를 다른 시기에 찍은 것들. 홍대 앞 건물. 2022년 3월: 레코드샵 2022년 11월: 팝업스토어 2023년 4월: 카페 2024년 1월: 공실 간판이 4번 바뀌었다. 2년도 안 됐다. 반대 케이스도 있다. 망원동 "청춘다방". 1987년부터 지금까지. 손님이 줄었다. 그래도 문 연다. 간판은 변함없다. 어느 쪽이 맞을까. 빨리 바뀌는 게 맞나. 오래 버티는 게 맞나. 답은 없다. 도시는 둘 다 필요하다. 무드보드의 재료 스튜디오 왔다. 신규 프로젝트 킥오프다. 클라이언트: "레트로 감성이요. 근데 세련되게." 예상했다. 항상 이렇게 말한다. 무드보드 만들었다. 간판 사진 10장 넣었다. 출근길에 찍은 것들이다. "이런 느낌에서 영감 받았어요." 클라이언트 눈빛이 달라졌다. "오, 이거 어디서 찍은 거예요?" 리서치의 힘이다. 레퍼런스를 핀터레스트에서 안 찾았다. 발로 찾았다. 차별화는 여기서 시작된다. 팀 막내가 물었다. "형, 이 사진들 어떻게 찍어요?" 간단하다. "길 걷다가 그냥 찍어." 관찰의 연습 디자이너는 관찰해야 한다. 학교에서 배운 얘기다. 현실은 다르다. 마감에 치이고, 수정에 지친다. 관찰할 시간이 없다. 출근길 12분. 이게 내 관찰 시간이다. 억지로라도 본다. 간판, 포스터, 전단지. 누가 만들었을까. 왜 저 색일까. 타깃은 누굴까. 생각하며 걷는다. 그게 쌓인다. 3년 전 나는 그냥 지나쳤다. "삼일세탁소" 간판. 지금은 5장 찍는다. 시선이 바뀌었다. 디자이너의 눈이 생겼다. 회의 중에 이야기한다. "저번에 본 간판 있는데요..." 누가 물었다. "어디서 봤는데요?" "출근길이요." 다들 웃는다. 그래도 듣는다. 길 위의 리서치가 통한다. 찍고 또 찍는다 오늘도 찍었다. 신촌 "옛날통닭". 1994년. 빨간 바탕에 노란 글씨. 흔한 조합이다. 그런데 이 집만의 느낌이 있다. 글자 획이 두껍다. 붓터치가 살아있다. 8장 찍었다. 언제 쓸지 모른다. 그냥 찍는다. 3,255장. 오늘 8장 더했다. 내일도 찍을 것이다. 도시는 매일 바뀐다. 간판도 바뀐다. 기록은 계속된다. 언젠가 쓸모 있을 거다. 아니어도 괜찮다. 찍는 그 자체가 연습이다.폰 용량이 부족하다. 간판 사진 때문이다. 지울 생각은 없다.
- 03 Dec, 2025
프레젠테이션 전날 밤, 야근실의 진실
프레젠테이션 전날 밤, 야근실의 진실 11시 30분, 시작 PT 자료 마지막 점검 시작했다. 내일 오전 10시 미팅. 클라이언트는 식음료 브랜드 런칭 준비하는 스타트업 대표. 투자 받은 돈으로 브랜딩 하는 거라 부담이 크다고 했다. 팀장이 옆에 앉았다. "로고 세 번째 안, 색상 다시 볼까?" 시작됐다. 이 시간부터가 진짜다. 오후 6시까지 완성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퇴근 전에 한 번 보자던 게 4시간째다. 슬라이드 42장. 하나씩 넘기면서 호흡 확인한다. PT는 리듬이다. 너무 빠르면 클라이언트가 못 따라온다. 너무 느리면 지루해한다. "여기 컨셉 설명 슬라이드, 레퍼런스 이미지 하나 더 넣자." 팀장 말에 레퍼런스 폴더 뒤진다. 500장 넘는다. 한 달 동안 모은 거다. 브랜드 컨셉이 '정직한 맛'. 가공 최소화, 로컬 재료. 그 느낌 살린 이미지 찾는다.자정, 디테일의 늪 폰트 크기 2pt 차이로 30분 씀. 웃긴다. 근데 중요하다. 슬라이드 14번, 브랜드 네이밍 설명 부분. 본문이 타이틀을 먹는다. 위계가 안 보인다. 18pt에서 16pt로. 행간 150%에서 160%로. 다시 본다. 낫다. 근데 뭔가 또 이상하다. 자간이다. -10 줬더니 답답하다. -5로. "박브랜드, 커피." 팀장이 캔커피 던져줬다. 세 번째다 오늘. 클라이언트가 궁금해할 질문 리스트 뽑는다. 예상 질문 15개. "로고가 너무 심플한 거 아닌가요?" "경쟁사 ㅇㅇ브랜드랑 비슷해 보이는데요?" "색상을 좀 더 밝게 하면 안 될까요?" 답변 준비한다. 심플한 이유. 경쟁사와의 차별점. 색상의 브랜드 아이덴티티 연결고리. 논리 있어야 한다. 감으로 한 거 없다. 다 이유가 있다. PT 대본 읽어본다. 소리 내서. 중얼중얼. "이 브랜드의 핵심 가치는 정직함입니다. 그래서 로고 타입은..." 어색하다. 다시. "이 브랜드는 정직함에서 시작합니다." 낫다. 1시, 이미지 교체 사건 문제 발견했다. 슬라이드 23번. 패키징 목업 이미지. 해상도 낮다. 확대하면 깨진다. 프로젝터로 쏘면 티 난다. 목업 파일 다시 연다. 일러스트레이터에서 로고 다시 배치한다. 스마트 오브젝트 업데이트. 포토샵으로 넘어간다. 그림자 다시 조정. 질감 레이어 투명도 75%에서 60%로. 30분 걸렸다. 렌더링하고 키노트에 다시 넣는다. 비교한다. 확실히 다르다. 이런 거다. 클라이언트는 못 느낄 수도 있다. 근데 우리는 안다. 프로페셔널은 디테일에 있다.팀장이 슬라이드 전환 효과 확인한다. "여기 페이드 말고 푸시로." "여기는 전환 없이 바로." 리듬 조절이다. 강조할 곳에서 멈춘다. 넘어갈 곳에서 빠르게 간다. 사운드 체크도 한다. 노트북 스피커로. 내일 회의실 스피커는 더 크다. 음악 넣은 부분 볼륨 조절. 브랜드 필름 30초짜리. BGM이 너무 크면 대사 안 들린다. 2시, 컨셉의 재확인 팀장이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보자. 우리가 전달하려는 게 뭐지?" 피곤한데 필요한 질문이다. 디테일에 빠지면 본질 잊는다. 슬라이드 1번부터 42번까지 쭉 넘긴다. 말 안 하고 그냥 본다. 브랜드 컨셉: 정직한 맛. 타겟: 건강 의식 있는 3040 여성. 핵심 메시지: 가공 없이, 있는 그대로. 비주얼 방향: 미니멀, 따뜻함, 신뢰. 맞다. 슬라이드마다 이게 보인다. 로고의 둥근 서체. 자연스러운 색상. 여백 많은 레이아웃. 다 연결된다. "좋아. 일관성 있어." 팀장이 고개 끄덕인다. 근데 또 문제 발견. 슬라이드 31번. 어플리케이션 예시 부분. 쇼핑백 목업이 너무 세련됐다. 브랜드 톤이랑 안 맞는다. 고급스러움보다 친근함이 먼저여야 한다. 이미지 교체. 폴더에서 다른 목업 찾는다. 크라프트지 느낌 나는 거. 이게 맞다. 바꾼다.2시 40분, 예상 시나리오 PT 시뮬레이션 시작한다. 팀장이 클라이언트 역할. 나는 발표자. "안녕하세요. 오늘 준비한..." "잠깐, 좀 더 편하게. 너무 격식 차리지 마." 다시. "대표님, 한 달 동안 고민한 결과 가져왔습니다. 먼저 브랜드 컨셉부터..." "좋아. 그 톤으로." 쭉 진행한다. 10분쯤 갔을 때 팀장이 끊는다. "여기서 로고 설명할 때, 왜 이 서체 선택했는지 바로 말해. 질문 나오기 전에." 맞다. 선제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대본 수정한다. "이 서체는 기하학적이지만 모서리가 둥급니다. 정직하지만 딱딱하지 않다는..." 다시 처음부터. 이번엔 20분 갔다. "색상 선택 이유 파트, 레퍼런스 이미지 먼저 보여주고 설명하자." 순서 바꾼다. 세 번째. 끝까지 갔다. 42분 걸렸다. 적당하다. 질의응답 포함하면 1시간. 클라이언트가 예약한 시간이 1시간 반. 여유 있다. 새벽 3시, 마무리 의식 마지막 체크. 파일 이름 확인. "브랜드명_PT자료_20250129_Final". 버전 관리 중요하다. 내일 아침에 급하게 수정할 수도 있다. 백업한다. 이메일로 자기 자신한테 보낸다. 클라우드에도 올린다. USB에도 복사. 노트북에 원본. 총 네 군데. 파일 날아가면 끝이다. 인쇄물 체크리스트 본다. 명함 크기로 뽑은 로고 시안 세트. 내일 아침 9시에 출력소 가서 찾는다. 실물로 보여줘야 한다. 화면이랑 다르다. 팀장이 일어났다. "고생했다. 내일 잘하자." "네. 고생하셨습니다." 사무실 불 끈다. 비상등만 남는다. 컴퓨터 슬립 모드. 내일 아침 9시 출근. 6시간 남았다. 집 가는 길. 택시 탄다. 야근비 나온다. 창밖 본다. 새벽 3시 서울. 불 꺼진 건물들. 어디선가 누군가 또 PT 준비하고 있겠지. 의식의 의미 PT 전날 밤 야근. 힘들다. 근데 필요하다. 낮에는 못 보는 게 보인다. 집중도가 다르다. 전화 안 온다. 메일 안 온다. 방해 없다. 오롯이 PT 자료에만 집중한다. 디테일 잡는 시간이다. 폰트 2pt, 여백 5px, 색상 투명도 10%. 이런 거 신경 쓴다. 클라이언트는 모를 수도 있다. 근데 우리는 안다. 이 디테일이 쌓여서 완성도가 된다. 브랜드 컨셉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다. 우리가 왜 이 디자인을 했는지. 어떤 의도인지. 무엇을 전달하려는지. 본질로 돌아간다. 팀 호흡 맞추는 시간이다. 발표는 내가 하지만 결과는 팀이 만든다. 서로 체크하고 피드백하고 조율한다. 같은 방향 본다. 그리고 각오 다지는 시간이다. 내일 PT 잘해야 한다. 클라이언트 설득해야 한다. 한 달 작업이 한 시간에 달렸다. 긴장된다. 근데 준비했다. 할 수 있다. 새벽 3시까지 하는 이유. 완벽을 위해서가 아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확신을 위해서다. 내일 PT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경쟁사가 이길 수도 있다. 클라이언트 취향이 다를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이 시간이 단순한 야근이 아니다. 브랜드 디자이너의 의식이다. 컨셉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프로페셔널의 자세를 확인하는 순간이다.내일 10시 PT. 준비됐다.
- 03 Dec, 2025
컨셉 잡는 데 한 달, 디자인은 사흘의 역설
클라이언트는 모른다 "로고 작업 기간이 한 달이요?" 클라이언트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로고 하나 그리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리냐는 표정이다. 설명한다. 컨셉 작업에 3주, 실제 디자인은 사흘이라고. 더 의아해한다. 이해한다. 그들에게 디자인은 '그리는 것'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켜고 펜툴로 선 그으면 끝나는 것. 한 달이면 로고 30개는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사흘의 작업이 가능하려면, 앞의 3주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첫 주: 질문만 한다 프로젝트 시작. 첫 주는 디자인 파일을 안 연다. 질문만 한다. 브랜드가 지향하는 가치는 뭔가. 타겟은 누구인가. 경쟁사는 어떤 톤인가. 5년 후 이 브랜드는 어떤 이미지여야 하나. 클라이언트는 답한다. "젊고 세련되고 신뢰감 있으면서도 친근한 느낌이요." 다 원한다. 모든 걸. 불가능한 조합을. 내 일은 그 모호함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젊음"이 20대 대학생의 젊음인지, 30대 직장인의 젊음인지 구분한다. "신뢰감"이 은행의 신뢰감인지, 동네 빵집의 신뢰감인지 나눈다. 이 과정에 일주일. 디자인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클라이언트는 묻는다. "로고 시안은 언제 나오나요?" 참는다. 설명한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이게 틀어지면 나중에 로고 100개 그려도 다 헛것이라고. 둘째 주: 세상을 뒤진다 레퍼런스 수집. 핀터레스트를 뒤진다. 비핸스를 훑는다. 인스타그램을 스크롤한다. 길거리 간판을 찍는다. 잡지 광고를 오려낸다. 해외 브랜딩 사이트를 북마크한다. 500개 모은다. 그중 50개를 추린다. 다시 10개로 줄인다. 무드보드 만든다. 색감, 형태, 분위기, 질감. 이 브랜드가 살아갈 세계를 구축한다. 물리적 형태를 갖기 전에, 감각적 방향성을 잡는다. 아내가 묻는다. "아직도 로고 안 그려?" 한숨 쉰다. "이게 로고 그리는 거야." 그녀는 카피라이터라 이해한다. 글 쓰기 전에 자료 조사하는 시간. 키보드 두드리는 건 마지막 10%라는 걸.셋째 주: 말로 만든다 컨셉 정의. 이제 단어를 만든다. 이 브랜드를 설명할 3개의 키워드. 핵심 메시지 한 문장. 브랜드 에센스 정의. "혁신적"이라는 단어를 쓸까 고민한다. 너무 흔하다. "진보적"? 너무 무겁다. "전향적"? 발음이 어렵다. "새로운"? 너무 평범하다. 하루 종일 시소러스를 뒤진다. 단어 하나 정하는 데 6시간. 팀원이 묻는다. "그냥 깔끔하고 모던하게 가면 안 돼요?" 설명한다. "깔끔"과 "모던"은 컨셉이 아니라고. 그건 스타일이라고. 컨셉은 이유이고, 스타일은 결과라고. 톤앤매너 문서 작성한다. A4 15장. 색상 팔레트, 타이포그래피 방향성, 그래픽 모티브, 커뮤니케이션 톤. 로고가 태어날 환경을 세팅한다. 3주 지났다. 일러스트레이터는 아직 안 켰다. 사흘: 손이 움직인다 이제 그린다. 펜툴 잡는다. 선을 긋는다. 도형을 그린다. 변형한다. 회전한다. 조합한다. 놀랍게도 빠르다. 첫 시안이 2시간 만에 나온다. 변형안 3개가 그날 오후에 완성된다. 다음 날 컬러 조합 테스트. 그다음 날 최종 정리. 사흘. 로고 완성. 팀원들이 신기해한다. "와, 진짜 빠르시네요." 웃는다. 빠른 게 아니라고. 이미 3주 동안 머릿속으로 수백 번 그렸다고. 무드보드 만들면서 형태감을 익혔다. 컨셉 정의하면서 구조를 잡았다. 톤앤매너 쓰면서 디테일을 구상했다. 일러스트레이터를 켜는 순간, 이미 70%는 완성되어 있었다. 손은 머리를 따라갈 뿐이다.클라이언트는 또 모른다 발표 날. "한 달 작업하셨는데 시안이 3개뿐이에요?" 심호흡한다. 설명한다. 이 3개가 나오기까지 500개의 레퍼런스를 봤다고. 100가지 방향성을 고민했다고. 30개의 키워드를 검토했다고. "그래도 좀 더 다양한 스타일은 없나요?" 참는다. 다양함은 혼란이라고. 우리는 명확함을 판다고. 브랜딩은 선택이라고. 가능한 모든 걸 보여주는 게 아니라, 가장 맞는 하나를 제시하는 거라고. 설득한다. 30분 프레젠테이션. 15장 슬라이드. 컨셉부터 차근차근. 왜 이 색인지, 왜 이 형태인지, 왜 이 비율인지. "아,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클라이언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안다. 로고가 아니라 과정을 산다는 걸. 역설의 본질 디자인은 결과가 아니라 여정이다. 한 달 중 3주는 보이지 않는 작업. 클라이언트는 산출물을 못 본다. 파일이 늘지 않는다. 진척률을 측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시간이 없으면, 마지막 사흘도 없다. 컨셉 없이 그린 로고는 예쁜 그림이다. 브랜드가 아니다. 무드보드 없이 정한 색은 취향이다. 전략이 아니다. 톤앤매너 없이 만든 디자인은 일회성이다. 시스템이 아니다. 사흘의 작업이 빛나려면, 3주의 고민이 필요하다. 빙산의 원리다. 수면 위 10%가 아름다우려면, 수면 아래 90%가 단단해야 한다. 이 균형이 무너질 때 가끔 프로젝트가 틀어진다. 클라이언트가 급하다고 한다. "컨셉은 나중에 하고, 일단 로고부터 볼 수 있나요?" 거절 못 한다. 일감이 필요하니까. 그린다. 이틀 만에 시안 5개. 발표한다. 클라이언트가 말한다. "음... 뭔가 임팩트가 부족한데요?" 당연하다. 임팩트는 형태에서 오지 않는다. 맥락에서 온다. 이 로고가 왜 이래야 하는지 설명할 이유가 없으니, 설득력이 없다. 수정 들어간다. 2차, 3차, 4차. 방향성이 없으니 수정도 갈팡질팡. "좀 더 강렬하게요", "아니 너무 강한데 부드럽게요". 결국 한 달 걸린다. 컨셉 먼저 잡았으면 2주 끝날 프로젝트. 효율성의 역설이다. 빠르게 가려고 과정을 생략하면, 결국 더 오래 걸린다. 후배에게 하는 말 신입 디자이너가 묻는다. "실력을 어떻게 늘리나요?" 대답한다. "일러스트레이터 단축키 외우지 마. 브랜드 케이스 스터디해." 그는 의아해한다. 디자이너인데 툴을 배우지 말라니. 설명한다. 툴은 수단이라고. 1년이면 마스터한다고. 하지만 컨셉 잡는 법은 10년 걸린다고. 클라이언트의 모호한 요구를 구체적 방향성으로 바꾸는 능력. 그게 진짜 실력이라고. "디자인 3일, 컨셉 3주. 이 비율 익혀." 그가 메모한다.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5년차 때는 몰랐으니까. 로고 예쁘게 그리는 게 실력인 줄 알았다. 빨리 그리는 게 효율인 줄 알았다. 시안 많이 뽑는 게 성실함인 줄 알았다. 다 아니었다. 한 방향으로 깊게 파는 것. 그게 프로였다. 내가 파는 것 결국 깨달았다. 나는 로고를 파는 게 아니다. 확신을 판다. 클라이언트는 불안하다. 이 선택이 맞는지, 이 방향이 맞는지, 시장이 받아줄지. 내 일은 그 불안을 지우는 것이다. 한 달 과정의 90%는 설득이다.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고, 팀을 설득하고, 나 자신을 설득한다. "이게 맞다"는 확신을 만든다. 그 확신이 서면, 손은 자동으로 움직인다. 사흘이면 충분하다. 역으로 확신 없이 그린 로고는 석 달 걸려도 불안하다. 클라이언트도 느낀다. "뭔가 아쉬운데"라는 말이 나온다. 다시 처음부터. 결국 시간은 같다. 제대로 가면 한 달. 헤매면 석 달. 처음부터 제대로 가는 게 빠르다. 오늘도 똑같다 월요일 아침. 새 프로젝트 킥오프. 일러스트레이터는 안 연다. 노션 켠다. 무드보드 페이지 만든다. 레퍼런스 폴더 생성한다. 클라이언트가 메시지 보낸다. "중간 산출물 언제 볼 수 있을까요?" 답장 친다. "2주 후 컨셉 발표 먼저 하겠습니다." 한숨. 또 설명해야 한다. 과정의 가치를. 하지만 괜찮다. 이게 내 일이니까. 보이지 않는 90%를 만드는 것. 수면 아래를 단단히 하는 것. 그래야 수면 위 10%가 빛난다.컨셉은 시간을 먹고, 디자인은 순간에 태어난다. 그게 이 일이다.
- 02 Dec, 2025
로고 10개 보여달라는 클라이언트와의 첫 미팅
로고 10개, 10개의 철학 오늘 오전 10시. 새 클라이언트 미팅. 여성 의류 브랜드. 창업 3년차. 리브랜딩 프로젝트. 예산은 괜찮은 편. 팀은 3명. 좋은 출발이다. 미팅 하루 전에 메일이 왔다. "디자이너님, 로고 후보는 10개 정도 봐도 될까요?" 그 문장을 읽고 한숨을 쉬었다. 에이전시 일 9년. 그 문장을 5000번은 받은 것 같다. 로고 10개. 말 그대로 10개가 아니라는 걸 안다. 클라이언트는 "선택지가 많으면 마음에 드는 게 나올 거다"라고 생각한다. 확률 게임. 복권처럼. 내가 하는 일을 복권 판매기처럼 본다. 그런데 내가 만드는 건 복권이 아니다.준비 과정 지난주부터 4일을 썼다. 첫날: 클라이언트 자료 정독. 기존 브랜드 스토리. 타겟 고객. 경쟁사 분석. 설립자 인터뷰 영상. SNS 피드. 쇼룸 사진. 왜 이렇게까지 하나. "그냥 로고잖아"라고 하면 웃긴다. 로고는 브랜드 철학이 요약된 거다. 한 줄짜리 시. 이 브랜드는 뭐였나. "자연에서 얻은 소재로 만드는 옷. 지속가능성. 근데 럭셔리한 느낌. 윤리적이지만 세련된." 흔한 요구사항. 그런데 이게 로고에 들어가려면? 단순함과 복잡함의 균형. 자연스러움과 정교함. 친근함과 프리미엄감. 이 모든 게 한 심볼에. 둘째 날: 무드보드. 30개 이미지. 컬러. 타이포그래피. 질감. 기존 로고들 분석. 뭐가 작동하고 뭐가 안 하는지. 셋째 날: 아이디어 스케치. 손으로 그렸다. 50개. 100개. 구분이 안 날 때까지. 넷째 날: 그 중에 10개를 고르는 작업. 여기가 진짜 고민이었다.10개를 고르는 철학 그냥 10개를 고르는 게 아니었다. 1번: 도형 기반. 기하학적. 모던. 미니멀. "심플할 거면 이거다" 카테고리. 2번: 문자 기반. 브랜드 이니셜을 심벌화. 개성 강함. 타이포 강조. "개성 있을 거면 이거다" 카테고리. 3번: 자연 모티프. 풀. 생장. 오르가닉. "지속가능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줄 거면 이거다" 카테고리. 4번: 추상 기하. 위 1번보다 좀 더 따뜻함. 손으로 그린 느낌. "미니멀하지만 감정있을 거면 이거다" 카테고리. 5, 6, 7, 8, 9, 10번: 그 조합들. 변형들. 톤 다른 버전들. 하나하나가 다른 브랜드 철학을 담고 있었다. "선택의 폭을 넓혀드리는 거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정반대다. 각각 다른 방향을 제시해서 클라이언트가 "아, 우리는 이 방향이구나"를 깨달으라고 한 거다. 10개 모두에서 선택하라는 게 아니라, 10개 중에서 우리 브랜드의 진짜 방향이 뭔지 발견하라는 거다. 근데 그걸 설명해야 하는데. 그게 문제다.미팅룸에서 오전 10시 40분. 회의실. 내가 벽에 10개를 붙였다. A4 사이즈로 확대해서. 클라이언트 3명이 들어왔다. 설립자 여성, 마케팅 담당, 운영 담당. "먼저, 왜 10개를 드렸는지 설명하고 싶어요." 나는 1번부터 시작했다. "1번은 도형 기반입니다. 가장 미니멀한 방향. 경쟁사 보니까 이 톤의 브랜드가 없었어요. 프리미엄 마켓에서 심플함은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설립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2번은 좀 다릅니다. 타이포 기반. 브랜드의 이니셜을 디자인 요소로 썼어요. 브랜드 이름을 강하게 드러내야 한다면 이 방향." 마케팅 담당이 "오, 이건 좀 임팩트 있네"라고 했다. "3번은 자연 모티프예요. 풀의 생장 이미지를 추상화했습니다. 브랜드의 핵심 메시지인 지속가능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면 이 쪽이..." 여기서 끊겼다. 설립자가 물었다. "근데 어떤 게 제일 좋으세요?"그 질문 다시 "어떤 게 제일 좋으세요?" 에이전시에서 가장 자주 받는 질문. 동시에 가장 답하기 힘든 질문. "제일 좋은 건 없어요."라고 답할 수는 없다. 프로페셔널하지 않다. 그러면 너희가 뽑아라, 라는 식인데, 클라이언트는 그걸 원하는 게 아니다. 보험이 필요하다. 반대로 "3번이 제일 좋습니다"라고 단정하면 어떻게 되나. 클라이언트는 3번을 안 고르는 방향으로 간다. 항상 그렇다. 디자이너가 추천한 게 오히려 거리감을 만든다. 마치 정답을 주는 느낌이라 압박감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다르게 답했다. "각 방향이 다른 브랜드 철학을 담고 있어요. 어떤 게 제일 중요한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1번은 '심플한 프리미엄'이 중요하면. 자신감 있고 세련된 브랜드." "2번은 '브랜드 네임 강화'가 중요하면. 기억에 남고 개성 있는 브랜드." "3번은 '가치관 표현'이 중요하면. 메시지가 명확하고 신뢰감 있는 브랜드." 설립자가 생각에 잠겼다. 10초. 20초. 30초. "음... 우리가 3개 중에 고르면 되나요?"선택지의 함정 좋은 질문이었다. "네, 그 3개 중에서 고르시고. 혹은 조합도 가능해요." 내가 말했다. 그런데 심장이 철렁했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면서 느낀 거다. "이 10개는 사실 선택지가 아니다." 선택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방향 가이드인데.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는 "10개 중에 고르라"는 다중선택 문제다. 타이틀이 부족했다. "로고 후보 10개"라고 하니까 후보처럼 느껴진다. 후보 중 하나를 "고르는" 느낌. 마치 회의실에 옷 10벌을 놔두고 "어떤 거 입을래?"라고 하는 느낌. 내가 하려던 건 다른 거였다. "브랜드 방향 10개"라고 했어야 한다. 다중선택이 아니라 "너희 브랜드는 이 10개 중 어느 쪽인가"를 질문하는 거다. 그러려면 설명이 달라져야 한다. "여기 10개는 10개의 다른 브랜드입니다. 1번을 고르면 그 브랜드는 이래요. 2번을 고르면 저래요." 근데 나는 뭐를 했나. "이렇게도 가능하고 저렇게도 가능하고..." 선택을 위한 선택지를 10개 제시했다. 그 결과는? 클라이언트의 머리는 좀 더 복잡해진다. 선택권은 많아진다. 근데 브랜드는 더 약해진다.많은 선택지의 대가 심리학자들이 말한다. 너무 많은 선택지는 선택 자체를 방해한다. "선택 마비(choice paralysis)" 아이스크림 30가지보다 7가지일 때 더 빨리 고르고 더 만족한다. 같은 원리다. 로고 10개를 보면, 클라이언트의 뇌는 다음을 한다. 1단계: "다 괜찮은데?" 2단계: "근데 뭐가 다른데?" 3단계: "아, 이건 이 느낌이고 저건 저 느낌이구나" 4단계: "그럼 뭐가 우리 브랜드지?" 5단계: "모르겠다. 일단 투표하자" 결국 민주주의다. 회의실 3명이 각각 고르는 로고가 다르다. "1번이 좋아요" "3번이 낫지 않나요?" "2번은?" 그리고 타협의 산물이 나온다. "1번의 심플함에 3번의 자연감을 담으면?" 그게 맞나? 아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타협의 산물이 아니다. 결정이다. "우리 브랜드는 이것이다." 그런 명확함이 나와야 한다.다시 생각해볼 것들 퇴근하고 집에 가면서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가. 클라이언트가 "로고 10개"를 요청했을 때, 나는 뭘 해야 했나. 1번 선택: 그냥 10개를 다 만든다. (나는 이걸 했다) 2번 선택: "로고는 3개만 보여드리는 게 낫습니다. 각각 다른 브랜드 철학이거든요. 10개면 브랜드가 약해져요"라고 설득한다. 차이가 뭔가. 1번은 "클라이언트 요청 수용". 2번은 "디자인 전문성 발휘". 두 개가 다르다. 9년을 일했는데, 내가 많이 한 건 1번이다. 에이전시다. 클라이언트 말을 듣는 게 직업이다. "일을 크게 벌려라"라고 배운다. 그래야 비용도 많이 나오고 프로젝트도 크다. 근데 거기서 뭔가를 잃는다. 설득력. 메시지. 명확함. 3개의 뚜렷한 방향보다, 10개의 애매한 방향이 더 "안전"하게 느껴진다. 선택권이 많으니까. 하나 떨어져도 9개가 남으니까.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게 더 위험하다. 클라이언트는 선택 아래서 갈팡질팡한다. 디자이너는 피드백을 예측할 수 없다. 누군가는 1번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3번을 좋아하니까. 수정 사이클이 길어진다. "1번의 심플함 + 3번의 느낌 + 5번의 컬러"를 섞으라는 식의 피드백. 그건 10번을 해봐도 안 나온다. "선택지를 줄여야 한다." 그게 결론이다.내일의 이메일 내일 아침, 나는 메일을 보낼 거다. 클라이언트에게. "미팅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니, 로고는 3개 방향으로 집중하는 게 낫겠습니다." "각각 다른 브랜드 철학을 명확하게 담아서, 3개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훨씬 강한 브랜드를 만듭니다." "10개 중 골라주세요보다, 이 3개 중 '너희 브랜드는 이거다'라고 결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클라이언트가 거부할 수도 있다. "아니, 10개는 어디 갔어요?" 그럼 설명한다. "로고 개수가 아니라 브랜드 철학이 중요하거든요." 이게 9년 후 배운 거다. 선택지를 많이 주는 게 아니라, 선택을 쉽게 해주는 게 디자이너의 일이다.[IMAGE_4]미팅룸 출입 횟수만 9년. 로고 "10개" 요청은 이제 웃길 일이다.너무 많은 선택지는 선택 자체를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