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디자인 툴이 나를 실직시킬까

AI 디자인 툴이 나를 실직시킬까

AI 디자인 툴이 나를 실직시킬까 오늘 또 봤다. 인스타그램 광고로 뜨는 AI 디자인 툴. "3분 만에 완성하는 브랜드 아이덴티티." 클릭했다. 둘러봤다. 꽤 괜찮았다. 배가 아팠다. 아침에 본 광고 출근하면서 봤다. AI 로고 생성 툴 광고. 키워드 입력하면 로고 30개가 뚝딱. 컬러 조합도, 폰트 조합도 알아서. 월 구독료 2만원. 우리 회사 한 달 프로젝트 비용이 800만원이다. 광고 댓글을 읽었다. "이거면 디자이너 필요 없는데?" "스타트업한테 완전 좋음." "이제 에이전시 안 써도 되겠네." 지하철에서 내렸다. 걸어서 회사까지 10분. 내내 생각했다. 나는 대체될까.실제로 써봤다 점심 먹고 몰래 써봤다. 동료들 모르게. 키워드 몇 개 넣었다. "친환경", "내츄럴", "프리미엄". 엔터 쳤다. 30초 만에 로고 20개가 나왔다. 솔직히 말하면. 절반은 쓸 만했다. 트렌디했다. 밸런스도 괜찮았다. 컬러도 무난했다. 내가 3일 걸려서 만드는 퀄리티를 30초 만에. 옆 자리 후배가 물었다. "형, 뭐 보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창을 껐다. 손에 땀이 났다. 오후 내내 집중이 안 됐다. 지금 하는 프로젝트. 유기농 식품 브랜드. 로고 시안 5개 작업 중. 지난주부터 시작했다. 컨셉 잡는 데 일주일 걸렸다. AI는 30초면 된다는데. 나는 뭐 하는 건가.클라이언트 미팅에서 오늘 4시. 클라이언트 미팅이 있었다. 신규 카페 브랜딩 프로젝트. 초기 컨셉 PT. 준비했다. 무드보드 30장. 레퍼런스 20개. 컨셉 방향 3개. 지난주 내내 매달렸다. 동네 카페 15곳 다녔다. 사진 찍고, 메뉴판 보고, 분위기 느꼈다. PT 시작했다. 컨셉 A 설명했다. "요즘 카페는 공간이 브랜드입니다. 로고보다 중요한 건 경험이죠." 대표님이 물었다. "그런데 로고는 언제 나와요?" "로고는... 컨셉이 확정돼야 작업이..." "제 친구가 AI 툴로 만든 로고 봤는데. 거기도 경험 키워드 넣으면 나오던데요?" 숨이 막혔다. 말했다. "AI는 키워드를 조합합니다. 하지만 브랜드는 조합이 아닙니다." 대표님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뜻이죠?" 나도 몰랐다. 그게 무슨 뜻인지. 일단 뱉은 말이었다.퇴근길에 생각했다 미팅은 어정쩡하게 끝났다. "일단 로고 시안도 같이 보고 싶어요." 결국 로고다. 항상 로고로 끝난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AI는 뭘 못 할까. 로고는 만든다. 컬러도 뽑는다. 레이아웃도 짠다. 타이포그래피도 조합한다. 무드보드도 생성한다. 그럼 나는 뭘 하는 건가. 답이 없었다. 집에 와서도 계속 생각했다. 아내가 물었다. "왜 그래?" "아니, 그냥." 맥주 마셨다. 한 캔 더 땄다. 밤 11시. 침대에 누워서도 생각했다. 새벽에 깨달은 것 잠이 안 왔다. 새벽 2시. 일어나서 노트북 켰다. 오늘 미팅 자료 다시 봤다. 무드보드를. 내가 찍은 카페 사진들을. 메뉴판 이미지들을. 그리고 AI 툴로 만든 로고들을 다시 봤다. 차이가 보였다. AI 로고는 예뻤다. 깔끔했다. 트렌디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왜 이 모양인지, 왜 이 컬러인지, 왜 이 폰트인지. 설명이 없었다. 내 무드보드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 카페가 들어설 동네의 오래된 빵집. 그 앞을 지나는 퇴근길 직장인들. 창가에 앉아 노을 보는 사람들. 브랜드는 이유다. AI는 결과물을 만든다. 나는 이유를 만든다. 그게 차이였다. 다음 날 아침 출근했다. 팀장한테 말했다. "어제 미팅, 다시 준비하고 싶어요." "뭘 바꾸게?" "컨셉이요. 로고 먼저 보여드리면 안 될 것 같아요." 팀장이 웃었다. "클라이언트는 로고 보고 싶어 하잖아." "그래서 이유를 먼저 만들려고요. 로고 전에 철학을. AI는 못 하는 거요."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해봐." 자리에 앉았다. 노트 폈다. 적었다. "이 카페는 왜 존재하는가. 이 동네에 왜 필요한가. 누구를 위한 공간인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AI는 키워드를 조합한다. 나는 철학을 만든다. 브랜딩이란 지난 9년간 배운 게 있다. 브랜딩은 예쁜 로고가 아니다. 일관된 컬러도 아니다. 세련된 폰트도 아니다. 브랜딩은 존재 이유다. 왜 이 브랜드가 필요한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무엇을 믿는가. 어떤 가치를 지키는가. 이게 먼저다. 로고는 그다음이다. AI는 이걸 못 한다. 할 수가 없다. 이건 데이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관찰해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했던 프로젝트가 생각났다. 동네 작은 책방 브랜딩. 사장님은 퇴직 교사였다. "아이들이 편하게 앉아서 책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 한마디에서 브랜드가 나왔다. 로고는 동그란 안경 모양이었다. 컬러는 노을빛 주황이었다. 폰트는 교과서체였다. 왜냐고 물으면 다 대답할 수 있었다. 안경은 책 읽는 모습. 주황은 방과 후 석양. 교과서체는 따뜻한 선생님. AI한테 "동네 책방, 따뜻함, 아이들" 넣으면. 예쁜 로고 나온다. 하지만 퇴직 교사의 마음은 안 담긴다. 미팅 재준비 이틀 걸렸다. 로고는 안 만들었다. 대신 이야기를 만들었다. "당신의 카페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지를 만들었다. 클라이언트한테 보냈다. 직접 작성해달라고. 답변이 왔다. "퇴근 후 혼자 올 수 있는 곳. 아무도 모르는 내 아지트. 혼자여도 외롭지 않은 공간." 이게 브랜드였다. 무드보드를 다시 짰다. 혼자 앉은 사람들 사진. 창가 자리. 따뜻한 조명. 작은 테이블. 컨셉을 다시 썼다. "당신만의 섬." 이제 로고를 그릴 수 있었다. 작은 섬 모양. 한 그루 나무. 심플한 라인. PT 자료 마지막 장에 적었다. "AI는 카페 로고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카페가 왜 필요한지는 AI가 말해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미팅 어제였다. 같은 클라이언트. 같은 회의실. 이번엔 로고를 안 보여줬다. 먼저 질문지 답변을 읽었다. 대표님 목소리로. "퇴근 후 혼자 올 수 있는 곳. 아무도 모르는 내 아지트." 대표님 얼굴이 달라졌다. "제가 쓴 거네요." "네. 이게 브랜드의 시작입니다." 무드보드 넘겼다. 혼자 앉은 사람들. 창가. 조명. 대표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컨셉 설명했다. "당신만의 섬. 혼자여도 외롭지 않은 공간." 로고 보여줬다. 작은 섬. 한 그루 나무. 대표님이 한참 봤다. 말했다. "이거예요. 제가 원한 게." 미팅 끝나고. 대표님이 물었다. "AI 툴로는 이렇게 안 나오나요?" 웃었다. "예쁜 로고는 나와요. 근데 대표님 이야기는 안 담겨요." "아, 그런 차이구나." AI 시대의 디자이너 집에 와서 생각했다. 나는 대체될까. 아니, 뭐가 대체될까. 작업은 대체된다. 로고 그리기, 컬러 뽑기, 레이아웃 잡기. 이건 AI가 더 빠르다. 더 많이 만든다. 하지만 이유는 대체 안 된다. 왜 이 브랜드가 필요한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믿는지. 이건 사람만 만들 수 있다. 사람을 만나고, 관찰하고, 공감해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읽은 책이 생각났다. "디자이너의 미래". 거기 이런 문장이 있었다. "도구가 발전하면 기술자는 줄고 철학자가 남는다." 이제 이해했다. AI 시대의 디자이너는 철학자다. 브랜드의 존재 이유를 만드는 사람. 로고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 만드는 사람. 요즘 하는 일 요즘 작업 방식이 바뀌었다. 프로젝트 시작하면 일단 만난다. 클라이언트를. 직접. 사무실 가서 관찰한다. 어떤 사람들이 일하는지. 벽에 뭐가 붙어 있는지. 회의할 때 어떤 말을 자주 쓰는지. 제품 만든다면 공장에 간다. 사장님이 어떤 표정으로 제품을 보는지. 직원들이 어떤 자부심을 가지는지. 카페 브랜딩이면 동네를 걷는다. 누가 지나다니는지. 어떤 가게들이 있는지. 저녁 몇 시에 불이 켜지는지. 이게 브랜딩의 시작이다. 로고는 나중이다. AI는 이걸 못 한다. 데이터로 학습하지만 공감은 못 한다. 패턴은 찾지만 의미는 못 만든다. 동료들한테도 말했다. "우리는 로고 만드는 사람이 아니야. 브랜드의 존재 이유를 만드는 사람이야." 팀 막내가 물었다. "그럼 AI 쓰면 안 돼요?" "아니, 써. 많이 써. 대신 AI한테 철학을 만들라고 하지 마. 우리가 만든 철학을 시각화하는 데 써." 불안은 여전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불안하다. AI 툴은 계속 발전한다. 더 빨라지고, 더 똑똑해진다. 어쩌면 언젠가 AI가 철학도 만들지 모른다. 데이터만으로 사람 마음을 읽어내는 날이 올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리고 그때가 오더라도. 나는 사람이다.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느끼고,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것. 이게 내 일의 본질이다. 로고 그리는 게 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이해하는 게 일이었다. 이걸 깨달으니까. 조금 편해졌다. 마지막으로 동료한테 말했다. "AI 디자인 툴 써봤어?" "네. 신기하더라고요." "우리 일 대체할 것 같아?" 동료가 웃었다. "로고 그리는 일은요. 근데 형이 하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내가 하는 일이 뭔데?" "브랜드한테 영혼 넣는 거요." 좋은 표현이다. 영혼. AI는 몸을 만든다. 나는 영혼을 넣는다.AI는 30초 만에 로고를 만들지만, 9년차 디자이너는 한 달 동안 브랜드의 이유를 만든다. 그게 차이다.

경쟁 PT에서 떨어진 프로젝트, 한 달의 무게

경쟁 PT에서 떨어진 프로젝트, 한 달의 무게

경쟁 PT에서 떨어진 프로젝트, 한 달의 무게 알림은 금요일 저녁에 왔다 "고민 많이 하셨을 텐데, 아쉽게도..." 메일 첫 줄만 봐도 안다. 떨어졌다는 거. 한 달 전부터 준비한 F&B 브랜드 리뉴얼 프로젝트. 경쟁 PT 3사. 우리는 가장 먼저 제안했다. 컨셉부터 BI 시안, 패키징 목업, 공간 적용까지. 75페이지 제안서. 리허설만 다섯 번. 대표님이 "이번엔 가능성 있다"고 했다. PT 끝나고 클라이언트가 "방향성이 참신하다"고 했다. 담당자가 "내부 검토 후 연락드린다"고 했다. 2주를 기다렸다. 금요일 저녁 6시 47분에 메일이 왔다. "다른 업체로 결정했습니다.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한 달이 한 줄로 정리됐다.무료 컨설팅이라는 이름 경쟁 PT의 가장 큰 문제. 작업은 하는데 돈은 안 나온다. 이번 프로젝트. 3주 동안 들어간 시간을 계산했다.클라이언트 브리핑 및 현장 답사: 8시간 컨셉 리서치 및 무드보드: 40시간 BI 시안 작업 (3안): 60시간 패키징 목업 및 공간 시뮬레이션: 32시간 제안서 작성 및 리허설: 28시간총 168시간. 3명이 투입됐으니 실제로는 더 많다. 시급으로 계산하면 안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안 하면 프로젝트는 다른 에이전시로 간다. 딜레마다. 대표님은 "투자라고 생각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경쟁 PT로 따낸 프로젝트도 많다. 하지만 떨어지면 그냥 투자 손실이다. 클라이언트 입장도 이해는 간다. 여러 안을 보고 싶은 거. 그런데 가끔 생각한다. 우리 컨셉 참고해서 다른 데 작업 맡기는 거 아닌가. 증명할 방법은 없다.결과물을 보게 되는 순간 3개월 뒤. 그 브랜드가 론칭했다. 인스타그램에서 봤다. 업계 지인이 태그한 피드. 새로 나온 패키징 사진. 우리가 제안한 방향과 완전히 달랐다. 우리는 '로컬 정체성'을 강조했다. 한글 타이포, 지역 컬러, 수제 느낌. 클라이언트가 PT 때 "이런 느낌 좋다"고 했던 바로 그 방향. 근데 결과물은 미니멀 모던. 산세리프 영문, 블랙 앤 화이트, 고급 라인. 정반대였다. 이긴 에이전시를 찾아봤다. 우리보다 큰 곳. 포트폴리오가 화려했다. 대기업 프로젝트가 많았다. 아. 처음부터 우리 스타일이 아니었구나. 클라이언트는 로컬 정체성에 끌렸던 게 아니라 '안전한 고급화'를 원했던 거다. 우리 제안은 그냥 참고용. 트렌드 확인용. 씁쓸했다. 우리 안은 뭐가 문제였나 회사에서 복기 미팅을 했다. 대표님: "PT는 잘했어. 컨셉도 좋았고." 실장님: "근데 클라이언트가 원한 건 다른 거였나 봐." 나: "그럼 PT 전에 뭘 더 물어봤어야 했나요?" 답은 없었다. 브리핑 때 클라이언트가 한 말들."참신한 방향 원해요" "너무 흔한 건 싫어요"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뚜렷했으면"우리는 그대로 했다. 참신하게, 차별화되게, 정체성 뚜렷하게. 근데 선택받은 건 안전한 고급 디자인이었다. 클라이언트는 본인도 모른다. 정확히 뭘 원하는지. 여러 안 보고 나서야 안다. "아, 이게 아니었구나" 또는 "이게 맞네". 그래서 경쟁 PT가 존재하는 거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하나의 옵션일 뿐.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사실이다.그래도 배운 것들 경쟁 PT 떨어질 때마다 체크리스트가 늘어난다. 이번에 추가된 항목들.브리핑 때 레퍼런스 더 많이 물어볼 것"참신한 디자인"이 뭔지 구체적 이미지로 확인 좋아하는 브랜드, 싫어하는 브랜드 명확히의사결정권자 파악대표가 결정하나, 마케팅팀이 결정하나 PT 때 누가 제일 반응 좋았나예산과 타임라인 현실성우리가 제안한 방향, 그 예산으로 가능한가 클라이언트가 생각한 예산과 괴리는 없나경쟁사 스타일 사전 조사같이 경쟁하는 에이전시 포트폴리오 확인 우리 방향과 차별점 명확히완벽하게 준비해도 떨어질 수 있다. 그게 경쟁 PT다. 근데 최소한 "우리가 뭘 놓쳤나" 정도는 알 수 있다. 한 달의 무게를 견디는 법 야근한 날들. 리허설하면서 고민한 시간들. 퇴근길에 컨셉 다듬던 순간들. 떨어지면 다 의미 없어지나. 아니라고 생각하려 한다. 이번에 만든 컨셉. 다른 프로젝트에 변형해서 쓸 수 있다. 무드보드 리서치하면서 찾은 레퍼런스들. 포트폴리오 업데이트 소스로 쓸 수 있다. PT 준비하면서 연습한 프레젠테이션. 다음 미팅에서 더 잘할 수 있다. 손해는 손해다. 근데 완전히 버려지는 건 아니다. 에이전시 일이 원래 그렇다. 10개 제안하면 3개 붙는다. 나머지 7개는 경험치가 된다. 레벨업하는 데 필요한 과정.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 위로는 안 된다. 떨어진 건 떨어진 거다. 그래도 다음 프로젝트는 준비한다. 또 경쟁 PT일 거다. 경쟁사 결과물을 보는 태도 같은 업계 사람들끼리 하는 말이 있다. "저 프로젝트 우리도 PT 들어갔었는데." 서로 안다. 누가 어떤 프로젝트 경쟁했는지. 누가 이겼는지. 결과물 나오면 평가한다. 당연하다. 디자이너니까. "우리 안이 더 나았는데"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저게 나은 것 같다"고 인정할 때도 있다. 중요한 건 감정 섞지 않기.저건 왜 저렇게 했지? (호기심) 클라이언트는 왜 저걸 선택했을까? (분석) 우리 안과 뭐가 달랐나? (비교)질투나 자괴감은 도움 안 된다. 배우려는 태도만 필요하다. 가끔 놀랄 때도 있다. "어, 우리 컨셉이랑 비슷한데?" 싶을 때. 물론 증거는 없다. 그냥 비슷할 수도 있다. 트렌드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니까. 그래도 씁쓸하긴 하다. 결국 남는 것 프로젝트 파일 폴더를 정리했다. "2024_F&B브랜드리뉴얼_경쟁PT_미선정" 폴더명부터 서글프다. 안에 들어있는 파일들.컨셉 키워드 100개 무드보드 15장 BI 시안 AI 파일 3개 패키징 목업 PSD 8개 제안서 최종본 PDF용량 2.3GB. 한 달의 무게. 당장은 안 쓸 거다. 근데 언젠가 비슷한 프로젝트 오면 꺼내볼 거다. "아, 이때 이런 거 했었지." 하면서. 디자이너의 하드 드라이브에는 이런 폴더가 쌓인다. 빛을 못 본 작업들. 클라이언트 앞에 한 번 서고 사라진 컨셉들. 버리진 않는다. 언젠가 쓸 날이 온다. 다른 형태로든. 그게 위로가 될까. 잘 모르겠다. 그래도 지우진 않는다.경쟁 PT는 복권이 아니다. 실력과 운이 섞인 게임이다. 떨어져도 경험은 남는다. 그걸로 만족해야 한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5차 수정 끝에 1차안으로 돌아가기

5차 수정 끝에 1차안으로 돌아가기

월요일 오전, 메일 한 통 "박실장님, 고민 많이 했는데요. 1차안으로 가면 안 될까요?" 커피 뱉을 뻔했다. 지난 3주간 뭐 한 거지.1차안, 그때는 몰랐다 4월 12일. 첫 미팅. 클라이언트는 화장품 브랜드. 론칭 3년차. 리브랜딩. "감성적이면서 모던하게요." 알겠다는 대답. 속으로는 '또 그 말이네'. 일주일 뒤 PT. 3개 방향 준비했다. A안: 미니멀 세리프. 여백 많이. 고급스러운 느낌. B안: 손글씨 느낌. 따뜻한 컬러. 친근한 방향. C안: 기하학 산세리프. 심플. 깔끔한 타입. 발표 시작했다. A안부터. "이건 브랜드 에센스를 시각적으로 정제한 거예요. 여백이 곧 여유고, 세리프가 전통과 신뢰를 담았죠." 대표 표정이 좋았다. 팀장도 고개 끄덕였다. B안 넘어갔다. 반응 미지근. C안은 "너무 흔하다"는 코멘트. "1차는 A안 베이스로 가겠습니다." 그날 저녁, 아내한테 말했다. "이번 클라는 센스 있어. 한 방에 갔어." 착각이었다.2차부터 5차까지 2차 피드백. "좋은데요, 세리프가 좀 부담스러워요. 젊은 고객들이 어려워하지 않을까요?" 그래. 산세리프로 바꿨다. A안의 뼈대에 C안의 타입. 3차 피드백. "뭔가 너무 딱딱해요. 감성이 빠진 것 같아요." 손글씨 느낌 추가했다. B안 요소 섞었다. 4차 피드백. "컬러가 너무 화려해요. 고급스러움이 사라졌어요." 팔레트 전면 수정. A안의 베이지 톤으로 회귀. 5차 피드백. "전체적으로 애매해요. 방향성이 흐려진 느낌?" 그날 야근했다. 밤 11시까지. 아내 전화 왔다. "저녁 먹었어?" "아직. 좀 이따 먹을게." 끊고 모니터 봤다. A, B, C가 다 섞인 괴물. 정체성 없는 로고. 컨셉 없는 디자인. 이게 뭐지. 돌아보기 토요일 아침. 출근 안 했다.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클라이언트 탓? 아니다. 내 탓이다. 1차 PT 때, 나는 A안을 제대로 설명 못 했다. "세리프가 전통과 신뢰를 담았다"는 말. 그게 다였다. 왜 세리프인지. 왜 이 여백인지. 왜 이 컬러인지. 브랜드 에센스를 어떻게 시각화했는지. 타깃 고객이 왜 이 디자인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지. 경쟁사와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3년 뒤 이 브랜드가 어떤 이미지로 자리 잡을지. 30분 발표에서 5분밖에 안 썼다. 나머지 25분은 B안, C안 설명. 사실 그 둘은 없어도 됐다. 비교용이었다. 근데 나는 3개 방향을 다 똑같이 취급했다. 클라이언트는 혼란스러웠을 거다. "셋 다 좋은데요?" 그럼 그때부터다. 섞어달라는 요청. "A안의 고급스러움에 B안의 감성을 더하면 어떨까요?" 나는 "네" 했다. 왜? 클라이언트니까. 돈 내는 사람이니까. 틀렸다.프로세스가 아니라 확신 월요일 오전. 그 메일 받았다. "1차안으로 가면 안 될까요?" 답장 쓰기 전에 폴더 열었다. 1차안 파일. 4월 17일. 다시 봤다. 좋았다. 지금 봐도 제일 좋았다. 왜 이걸 지키지 못했을까. 답은 간단했다. 나한테 확신이 없었으니까. "이게 답입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으니까. 클라이언트 요청에 "그건 방향이 다릅니다"라고 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디자이너가 뭐 하는 사람인가. 예쁜 거 만드는 사람? 아니다. 문제 해결하는 사람이다. 브랜드의 본질을 시각화하는 사람이다. 클라이언트보다 브랜드를 더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근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리서치는 했다. 경쟁사 분석도 했다. 무드보드도 만들었다. 근데 확신은 없었다. "혹시 틀리면 어쩌지"라는 생각. "클라이언트가 싫어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 그래서 타협했다. 결과는 시간 낭비. 3주. 클라이언트도 지쳤을 거다. 나도 지쳤다. 답장 썼다. "네, 그게 맞습니다. 1차안이 가장 브랜드 에센스에 부합합니다. 제가 제대로 설명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내일 오전에 다시 한번 PT 드리겠습니다." 화요일, 두 번째 PT 같은 회의실. 같은 사람들. 다른 건 나. 이번엔 1차안만 들고 갔다. "오늘은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프로젝터 켰다. A안 떴다. "이 로고는 단순히 예쁜 게 아닙니다." 45분 발표했다. 왜 이 서체인지. 11가지 후보 중 이걸 선택한 이유. 왜 이 여백인지. 타깃 고객의 시선 흐름 데이터. 왜 이 컬러인지. 화장품 업계 트렌드와 차별화 전략. 경쟁사 5곳 로고 비교. 우리 브랜드만의 아이덴티티. 3년 뒤 브랜드 확장 시 응용 가능성. 패키지, 웹, 매장. 끝나고 대표가 말했다. "진작 이렇게 설명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맞는 말이다. "처음부터 이게 답이었네요." 그것도 맞는 말이다. 계약서 썼다. 최종안 확정. 그날 저녁 퇴근길. 합정역. 편의점 들렀다. 맥주 2캔. 집 와서 아내한테 말했다. "확정됐어. 1차안으로." "처음 거? 그럼 수정은 왜 한 거야?" "내가 제대로 못 설명해서." 맥주 땄다. 한 모금. "다음부턴 다르게 할 거야." "뭘?" "확신 있으면 밀어붙일 거야. 안 섞을 거야." 아내가 웃었다. "그래, 브랜드 디자이너답게." 배운 것 프로세스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수정 5차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내 태도였다. 디자이너는 서비스업이 맞다. 근데 단순 주문 받는 사람은 아니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걸 주는 게 아니라. 클라이언트에게 필요한 걸 제안하는 사람이다. 그 차이를 이제 안다. 다음 프로젝트. 1차안에 확신 있으면 그것만 들고 간다. "이게 답입니다." 그렇게 말할 거다. 틀릴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적어도 시간은 낭비 안 한다. 적어도 방향은 흔들리지 않는다.5차 수정 끝에 돌아온 1차안. 3주가 알려준 건 프로세스가 아니라 확신의 중요성이었다.

뭔가 임팩트가 부족해요 - 클라이언트의 불명확한 피드백과 싸우기

뭔가 임팩트가 부족해요 - 클라이언트의 불명확한 피드백과 싸우기

뭔가 임팩트가 부족해요 화요일 오후 3시 회의실에 들어갔다. 클라이언트 세 명. 우리 팀 네 명. 2주 작업한 브랜드 아이덴티티 중간 발표. "컨셉은 '도시 속 자연'입니다. 유기농 카페 브랜드의 본질을 담았어요." 무드보드를 넘긴다. 로고 시안 세 개. 컬러 팔레트. 타이포그래피 시스템. 어플리케이션 목업까지. 준비는 완벽했다.대표님이 팔짱을 꼈다. 30초 침묵. 아 이거 시작이다. "좋은데요. 근데 뭔가... 임팩트가 부족한 것 같아요." 임팩트. 이 단어가 나오면 회의는 최소 1시간 더 간다. 경험상.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끼셨나요?" "음... 전체적으로요? 뭔가 확 와닿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뭐가 확인데. 마케팅 팀장이 거든다. "저도 비슷하게 느꼈어요. 임팩트가 약해요." 두 명. 경영지원실장까지. "네, 저도 그 느낌 알 것 같아요." 세 명. 만장일치. 임팩트 부족. 임팩트의 정의 회사로 돌아왔다. 팀장이 물었다. "임팩트가 뭐래?" "모르겠어요. 물어봤는데 전체적으로래요." "전체적으로가 제일 답답하지." 맞다. 10년 가까이 이 일 했다. '임팩트 부족'이라는 피드백을 최소 50번은 들었다. 그런데 매번 의미가 다르다. 어떤 클라이언트의 '임팩트'는 '더 화려하게'였다. 어떤 클라이언트의 '임팩트'는 '더 심플하게'였다. 또 어떤 클라이언트는 '임팩트'가 '고급스럽게'를 뜻했다. 같은 단어. 다른 뜻. 디자이너는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 클라이언트의 감정을 디자인 언어로 바꾸는.수요일 오전, 역질문의 기술 다시 미팅을 잡았다. 이번엔 내가 준비했다. "'임팩트'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볼까요?" 화이트보드를 꺼냈다. 질문 리스트. "지금 느끼시는 건 1) 시각적으로 약해서? 2) 메시지가 불명확해서? 3) 경쟁사 대비 차별성이 없어서?" 대표님이 생각했다. "음... 2번? 메시지가 좀." "메시지요. '도시 속 자연'이라는 컨셉이 잘 안 보인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컨셉은 좋아요. 근데 이게 우리 브랜드인지 잘 모르겠어요." 시작이다. 진짜 이슈가 나온다. "브랜드 정체성이 약하다는 거군요. 그럼 '자연'보다 '우리만의 자연'을 더 강조해야겠네요." "맞아요, 그거!" 임팩트 = 브랜드 고유성. 하나 잡았다. 마케팅 팀장은 달랐다. "저는 색이요. 너무 차분해요. 저희가 MZ 타겟인데." "MZ요? 브리프에는 3040 직장인이라고." "아 그건 1차 타겟이고요, 확장은 MZ로 가려고요." 처음 듣는 얘기다. "그럼 타겟을 두 개로 봐야 하는 거네요. 지금 컬러는 3040 직장인용이에요. MZ까지 고려하려면 톤앤매너를 조정해야 해요." "그렇게 해주세요!" 임팩트 = 타겟 확장성. 둘 잡았다. 경영지원실장의 차례. "전 솔직히 로고가 좀... 경쟁사 A랑 비슷해 보여요." "어떤 점에서요?" "둘 다 녹색에 나뭇잎 모티브잖아요." "유기농 카페 브랜드는 90%가 녹색에 나뭇잎이에요. 대신 저희는 서체와 심볼 조합으로 차별화했습니다." "그래도 임팩트가..." "경쟁사와 완전히 다른 색을 원하시나요? 예를 들어 블랙 베이스?" "오, 그거 좋을 것 같은데요?" 임팩트 = 예상 밖의 선택. 셋 잡았다.임팩트의 실체 '임팩트가 부족하다'는 피드백은 거의 항상 불명확하다. 그런데 그게 클라이언트 잘못은 아니다. 그들은 디자이너가 아니다. 자기 감정을 디자인 용어로 설명할 수 없다. 그냥 '뭔가 아니다'라는 느낌만 있다. 우리 일은 그 느낌을 해독하는 거다. 9년 하면서 발견한 것들: 임팩트 부족 = 브랜드 정체성 미약 (40%) "이게 우리 브랜드인지 모르겠어요" → 고유성 강화 필요. 임팩트 부족 = 타겟 불일치 (30%) "우리 고객이 좋아할까요?" → 타겟 재정의 필요. 임팩트 부족 = 경쟁사 차별화 부족 (20%) "다른 브랜드랑 비슷해요" → 시장 분석 재검토. 임팩트 부족 = 그냥 마음에 안 듦 (10%) "뭔가 아니에요" → 이건 솔직히 답이 없다. 마지막 10%가 제일 힘들다. 감으로 가는 거라서. 수요일 오후, 역제안 질문으로 이슈를 세 개 잡았다. 이제 해결책이다. "정리하면, 세 가지 방향이 나왔어요." 화이트보드에 썼다. 방향 1: 브랜드 고유성 강화'도시 속 자연'에서 '당신만의 정원'으로 컨셉 조정 개인화 메시지 강화 타이포그래피를 더 독특하게방향 2: MZ 타겟 반영컬러 팔레트에 비비드 포인트 추가 SNS 중심 어플리케이션 개발 인포그래픽 스타일 간소화방향 3: 블랙 베이스 실험유기농 = 녹색 공식 깨기 프리미엄 도시 카페 이미지 경쟁사 대비 극단적 차별화"세 방향 다 해보시겠어요? 아니면 하나 선택하시겠어요?" 대표님이 웃었다. "다 좋은데, 일정은요?" "방향 하나면 1주. 세 개 다 하면 2주 반." "예산은요?" "방향 하나는 현재 계약 내. 세 개는 추가 견적 필요해요."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 일정과 예산 없이 '다 해보자'는 건 지옥이다. "2번으로 가죠. MZ 반영. 확장 가능성이 제일 크니까." 결정 났다. 목요일, 재작업 방향이 명확해지니까 작업이 빠르다. 컬러 팔레트에 코랄 핑크 추가. 세이지 그린 채도 올림. 포인트 옐로우 신설. 타이포그래피는 산세리프 비중 높임. 가독성보다 임팩트. MZ는 직관이다. 인스타그램 템플릿 10종 만듦. 스토리 전용 심볼 단순화. GIF 움직임 추가. 밤 11시까지 작업했다. 아내한테 미안하다고 문자 보냈다. "내일 일찍 들어갈게." 답장: "나도 야근. ㅋㅋ 내일 브런치?" 업계 부부의 장점. 서로 이해한다. 금요일 오후, 재발표 같은 회의실. 같은 사람들. "지난번 피드백 반영했습니다. MZ 타겟 확장 중심으로." 새 무드보드를 펼쳤다. 컬러가 확 달라졌다. 밝고 경쾌하다. 대표님 눈빛이 달라졌다. "오, 이거 좋은데요?" 마케팅 팀장이 폰으로 사진 찍는다. "인스타에 잘 먹히겠어요!" 경영지원실장도 고개를 끄덕인다. "임팩트 확실히 살았네요." 임팩트. 같은 단어인데 이번엔 칭찬이다. 임팩트의 진실 '임팩트'는 디자인 용어가 아니다. 감정 용어다. 클라이언트가 '임팩트 부족'이라고 할 때, 실제로는:"내 기대와 달라요" "우리 브랜드 같지 않아요" "경쟁사보다 약해 보여요" "타겟이 좋아할지 불안해요" "뭔가 아닌 것 같아요"이 중 하나다. 우리 일은 그 '뭔가'를 찾는 거다. 질문으로. 대화로. 때로는 역제안으로. 9년 차가 되어서야 안 건, 좋은 디자인보다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이 먼저라는 것. 클라이언트의 불명확한 피드백은 적이 아니다. 단서다. 그 단서를 풀어내는 게 시니어의 역할이다. 화려한 포트폴리오보다 중요한 건, 클라이언트의 말을 제대로 듣는 귀다. 그리고 그들이 진짜 원하는 걸 디자인으로 번역하는 능력. 임팩트는 클라이언트의 머릿속에 있다. 우리는 그걸 꺼내서 화면에 옮길 뿐이다. 월요일 아침 메일이 왔다. "최종안 승인합니다. 다음 주 목요일 최종 PT 일정 잡아주세요." 2주 만에 중간 발표 통과. 나쁘지 않다. 팀 단톡방에 공유했다. "고생했어요 다들." 주니어 디자이너가 물었다. "형, '임팩트 부족'이라는 피드백 오면 어떻게 대응해요?" "물어봐. 계속. 구체적으로 될 때까지." "그럼 클라이언트 기분 나빠하지 않아요?" "정중하게 물어보면 오히려 좋아해. 자기 말 들어주는 거니까." 진짜다. 클라이언트는 디자이너가 방어적으로 나오는 걸 싫어한다. "이게 정답입니다"라는 태도도 싫어한다. 대신 "당신의 생각을 이해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면 마음을 연다. 디자인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클라이언트와 함께 만드는 거다. 그들의 불명확한 피드백도, 사실은 협업의 일부다.'임팩트'라는 단어 뒤에는 항상 진짜 니즈가 숨어 있다. 찾아내는 게 우리 일이다.

간판 사진을 찍는 일상 - 길 위의 리서치

간판 사진을 찍는 일상 - 길 위의 리서치

간판 사진을 찍는 일상 - 길 위의 리서치 출근길 루틴 아침 9시 40분. 집 나섰다. 합정역까지 도보 12분. 이 시간이 중요하다. 폰 카메라 켰다. 습관이다. 길 위의 모든 간판이 리서치 대상이다.오늘은 세탁소 간판이 눈에 띄었다. "삼일세탁소". 1978년부터라고 써있다. 파란색 바탕에 흰색 명조체. 페인트가 벗겨졌다. 찍었다. 5장. 각도 바꿔가며. 빛 받는 부분 집중해서. 옆 건물은 신축이다. 1층에 카페. 간판은 레이저 커팅한 스테인리스. 산세리프. 자간 넓게. 미니멀하다. 두 간판이 나란히 있다. 50년 차이. 이게 재밌다. 기록하는 이유 동료들은 묻는다. "왜 그렇게 사진 찍어요?" 모르겠다. 그냥 찍는다. 리서치라고 하기엔 목적이 없다. 취미라고 하기엔 진지하다. 폴더를 봤다. 간판 사진만 3,247장. 2년 치다. 분류는 안 한다. 날짜순으로 쌓인다. 그게 좋다. 타임라인이 생긴다. 가끔 스크롤 내린다. 작년 봄에 찍은 꽃집 간판. 지금은 치킨집이다. 도시가 바뀐다. 간판으로 알 수 있다. 한글 타이포의 층위 전통시장 갔다. 망원시장. 오후 미팅 전 시간이 남았다. 현수막이 많다. "국내산 돼지고기", "할인행사 중" 손글씨다. 매직으로 썼다.이게 진짜 타이포그래피다. 글자 크기가 불규칙하다. 중심선이 흔들린다. 그런데 읽힌다. 확실하게. 기능이 먼저다. '예쁘게'는 나중이다. 우리가 하는 건 반대다. 예쁘게 만들고 기능 맞춘다. 클라이언트는 '세련됨'을 원한다. 시장 상인은 '전달'을 원한다. 목적이 다르다. 골목 안쪽. "영희네반찬". 노란 바탕에 검은 붓글씨. 20년은 됐다. 페인트 겹겹이 쌓였다. 리브랜딩하면 어떨까. 산세리프로 바꾸고, 색 정리하고. 망칠 것 같다. 이 간판은 이대로가 맞다. 힙한 것들의 법칙 주말. 성수동 갔다. 새 카페가 열었다는 연락 받았다. 간판 봤다. 예상대로다. 고딕. 자간 200%. 흰색 아크릴.요즘 카페는 다 이렇다. 미니멀. 뉴트럴 톤. 심플. 틀렸다는 게 아니다. 공식이 있다는 게 흥미롭다. '힙함'의 문법이 있다.산세리프 자간 넓게 무채색 또는 파스텔 여백 많이 영문 섞기법칙을 따르면 안전하다. 클라이언트도 좋아한다. 문제는 차별화다. 다들 똑같아진다. 옆 건물 보니까 같은 폰트다. 2개월 전 우리가 쓴 거다. 클라이언트가 다른데 말이다. 웃겼다. 트렌드의 속도가 이렇다. 낡은 것의 가치 을지로 프로젝트 있었다. 로컬 브랜딩이다. 답사 나갔다. 인쇄소 골목. 간판이 오래됐다. "대흥인쇄사", "동양제본소". 명조체. 테두리 있고. 금박 들어갔다. 50년대 스타일이다. 지금 만들면 레트로다. 그때는 그냥 간판이었다. 사장님께 물었다. "간판 바꿀 생각 없으세요?" "뭐 하러요. 잘만 나가는데." 맞다. 30년 단골들은 이 간판을 찾는다. 바꾸면 헷갈린다. 브랜딩이 꼭 새 게 아니다. 유지하는 것도 전략이다. 클라이언트한테 말했다. "이 간판들 그대로 두는 게 어때요?" "그럼 우리가 뭘 하는 건데요?" 할 말이 없었다. 시간의 축적 사진 정리했다. 같은 장소를 다른 시기에 찍은 것들. 홍대 앞 건물. 2022년 3월: 레코드샵 2022년 11월: 팝업스토어 2023년 4월: 카페 2024년 1월: 공실 간판이 4번 바뀌었다. 2년도 안 됐다. 반대 케이스도 있다. 망원동 "청춘다방". 1987년부터 지금까지. 손님이 줄었다. 그래도 문 연다. 간판은 변함없다. 어느 쪽이 맞을까. 빨리 바뀌는 게 맞나. 오래 버티는 게 맞나. 답은 없다. 도시는 둘 다 필요하다. 무드보드의 재료 스튜디오 왔다. 신규 프로젝트 킥오프다. 클라이언트: "레트로 감성이요. 근데 세련되게." 예상했다. 항상 이렇게 말한다. 무드보드 만들었다. 간판 사진 10장 넣었다. 출근길에 찍은 것들이다. "이런 느낌에서 영감 받았어요." 클라이언트 눈빛이 달라졌다. "오, 이거 어디서 찍은 거예요?" 리서치의 힘이다. 레퍼런스를 핀터레스트에서 안 찾았다. 발로 찾았다. 차별화는 여기서 시작된다. 팀 막내가 물었다. "형, 이 사진들 어떻게 찍어요?" 간단하다. "길 걷다가 그냥 찍어." 관찰의 연습 디자이너는 관찰해야 한다. 학교에서 배운 얘기다. 현실은 다르다. 마감에 치이고, 수정에 지친다. 관찰할 시간이 없다. 출근길 12분. 이게 내 관찰 시간이다. 억지로라도 본다. 간판, 포스터, 전단지. 누가 만들었을까. 왜 저 색일까. 타깃은 누굴까. 생각하며 걷는다. 그게 쌓인다. 3년 전 나는 그냥 지나쳤다. "삼일세탁소" 간판. 지금은 5장 찍는다. 시선이 바뀌었다. 디자이너의 눈이 생겼다. 회의 중에 이야기한다. "저번에 본 간판 있는데요..." 누가 물었다. "어디서 봤는데요?" "출근길이요." 다들 웃는다. 그래도 듣는다. 길 위의 리서치가 통한다. 찍고 또 찍는다 오늘도 찍었다. 신촌 "옛날통닭". 1994년. 빨간 바탕에 노란 글씨. 흔한 조합이다. 그런데 이 집만의 느낌이 있다. 글자 획이 두껍다. 붓터치가 살아있다. 8장 찍었다. 언제 쓸지 모른다. 그냥 찍는다. 3,255장. 오늘 8장 더했다. 내일도 찍을 것이다. 도시는 매일 바뀐다. 간판도 바뀐다. 기록은 계속된다. 언젠가 쓸모 있을 거다. 아니어도 괜찮다. 찍는 그 자체가 연습이다.폰 용량이 부족하다. 간판 사진 때문이다. 지울 생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