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 Dec, 2025
클라이언트가 된 친구들과의 작업
클라이언트가 된 친구들과의 작업 재현이 형이 전화했을 때 "브랜드, 나 사업 시작하는데 로고 좀 봐줘." 재현이 형. 대학 선배다. 졸업하고 광고대행사에서 만났다. 같이 야근하고, 막차 놓치고, 회식에서 토하고. 그런 사이. 형이 퇴사한 건 작년 가을이었다. "더는 못 하겠어." 그러더니 독립했다. 마케팅 컨설팅. 프리랜서에서 시작해서 이제 법인 만든다고. "당연하죠. 언제 만날래요?" 전화 끊고 나서 좀 복잡했다.형이랑 작업하면 편할 거다. 설명 안 해도 이해하고. 업계 사정 아니까 무리한 요구 없고. 디자인 보는 눈도 있고. 근데 동시에. 편하면 대충 될 수도 있다. "이 정도면 되지" 하면서 타협하게 될 수도. 그리고 만약 형이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친구니까 고쳐줘" 이렇게 되면? 아내한테 얘기했다. "그냥 정중히 거절하면 안 돼?" "그게 어떻게... 형인데." "그럼 확실하게 선 그어. 처음부터." 맞는 말이다. 근데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다음 날 만났을 때. 첫 미팅은 홍대 카페 오후 3시. 형이 먼저 와 있었다. "야, 커피 샀다."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앉았는데 이미 어색했다. 평소 같으면 "야 임마" 이랬을 텐데. 테이블 위에 노트북이랑 서류가 놓여 있으니까 자동으로 존댓말이 나왔다. 형이 회사 소개를 시작했다. 사업 모델, 타겟, 방향성. 준비 많이 했다. A4 5장짜리 기획서. "어떻게 생각해?"솔직히 좀 애매했다. 방향성이 너무 넓었다. '혁신적 마케팅 솔루션'이라는 키워드. 뭐든 될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여기서 말해야 하나. 친구로서 말해야 하나, 디자이너로서 말해야 하나. "형, 질문 하나 할게요." "어." "이 회사가 5년 후에 뭐라고 불리길 원하세요?" 형이 멈췄다. "브랜딩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게 그거거든요. 무엇이 되고 싶은가." 형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마케팅이 아니라 비즈니스 파트너. 그렇게 불리고 싶어." 좋았다. 이제 시작이다. "그럼 한 달 주세요. 제대로 잡아볼게요." "얼마야?" "...형, 그건 나중에." 돈 얘기가 제일 어렵다는 걸 그때 알았다. 견적서를 보낼 때 집에 와서 견적서를 만들었다. 브랜드 네이밍, 로고 디자인, 베이직 시스템. 일반 클라이언트면 800만원. 근데 형한테는? 아내가 옆에서 말했다. "친구 가격 주지 마." "왜?" "나중에 더 꼬여. 차라리 정가 부르고 명확하게 해." 고민했다. 친구한테 800만원을 부른다고? 근데 아내 말이 맞았다.애매하게 깎아주면 나중에 "친구니까 한 번만 더 고쳐줘" 이렇게 된다. 결국 700만원으로 견적을 보냈다. 정가에서 10% 할인. 그리고 메일에 이렇게 썼다. "형, 친구라서 깎아주는 게 아니라 스타트업이라서 깎아드립니다. 대신 수정 범위는 명확하게 정하고 가겠습니다. 서로를 위해서." 형한테 전화가 왔다. "야, 견적 받았다." "네." "...비싸긴 하네." "네, 비쌉니다." 정적. "근데 네 말이 맞다. 명확하게 가자." 계약서를 썼다. 친구인데 계약서라니. 근데 이게 맞다고 생각했다. 컨셉 발표 날 3주 뒤. 형 사무실에서 프레젠테이션. 직원 2명이랑 형이 앉아 있었다. 나는 빔 프로젝터 앞에 섰다. 긴장했다. 다른 클라이언트보다 더 긴장했다."브랜드명은 'PRTNR'로 제안드립니다." Partner에서 모음을 뺐다. 간결하고 임팩트 있게. 발음은 '파트너'. "마케팅 에이전시가 아니라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포지셔닝입니다." 로고는 두 개의 블록이 맞물리는 형태. 협업의 시너지를 시각화했다. 형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 직원들도 긍정적이었다. 분위기가 좋았다. "근데." 형이 말했다. "폰트가 좀 무겁지 않아?" 맞다. 의도적으로 볼드 웨이트를 썼다. 신뢰감을 주려고. "가볍게 가면 경쟁사랑 비슷해져요. 지금 경쟁사들 보세요. 다 산세리프에 라이트 웨이트잖아요." "그렇긴 한데..." 이 순간이 중요했다. 여기서 "형 말이 맞아, 바꿀게" 하면 안 된다. 친구라서가 아니라 디자이너라서. "일주일만 써보세요. 명함에 찍어보시고. 그래도 무거우면 그때 조정하죠." 형이 나를 봤다. 잠시 정적. "오케이. 해보자." 미팅이 끝나고 나왔는데 다리에 힘이 없었다. 수정 요청이 시작됐을 때 일주일 뒤 톡이 왔다. "브랜드, 색 좀 바꿔볼 수 있어?" 시작됐다. "어떤 색이요?" "좀 더 밝은 느낌. 지금 너무 차갑다는 피드백이 있어." 누구 피드백인가 봤더니 형 부인. 디자이너 아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나. 친구 부인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근데 브랜드 전략에 맞지 않는다. 전화했다. "형, 색 수정은 가능한데요." "어."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어요. 색을 바꾸는 이유가 뭔가요?" "아까 말했잖아. 차갑다고." "그 피드백이 타겟한테서 나왔어요?" 형이 말을 멈췄다. "형수님이 디자이너세요? 아니면 마케팅 쪽이세요?" "...아니." "형, 우리 처음에 브랜드 전략 잡을 때 뭐라고 했죠? '신뢰할 수 있는 비즈니스 파트너'. 신뢰감은 따뜻함보다 안정감에서 나와요. 그래서 이 색인 거예요." 정적. "근데 정 바꾸고 싶으시면 바꿔드립니다. 형이 클라이언트니까." 형이 웃었다. "야, 너 진짜 프로페셔널하네." "제 밥벌이니까요." "알겠어. 그냥 가자." 전화 끊고 나서 한숨 쉬었다. 친구한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근데 이게 맞다. 우정을 지키는 방법이 굽히는 게 아니라 존중하는 거다. 최종 납품 날 2달 뒤. 베이직 시스템까지 완성됐다. 로고, 명함, 레터헤드, 파워포인트 템플릿, 웹사이트 가이드. 형 사무실에서 마지막 미팅. "수고했다." 형이 명함을 꺼내서 보여줬다. 인쇄된 PRTNR 로고.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다행이네요." "야, 근데 하나 물어볼게." "네." "너 나한테 작업하면서 힘들었지?" 솔직히 대답했다. "네. 힘들었어요." 형이 웃었다. "나도. 친구한테 피드백 주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어." "형도요?" "어. 괜히 눈치 보게 되더라. 너 기분 상할까 봐." 둘이 웃었다. "근데 잘 끝났네." "네." "다음엔 맥주 사줄게." "형, 그거 계약서에 있었어요. 최종 납품 후 맥주 2차례." "야 이 새끼." 농담이었다. 근데 진짜 계약서에 썼다. '성공적 마무리 시 회식 1회'라고. 3개월 뒤 형 회사가 잘 된다고 했다. 클라이언트 5개 확보. 직원 2명 더 뽑았다고. "너 덕분이야." "브랜드가 전부는 아니죠." "그래도. 명함 내밀 때 당당해져." 그 말 들으니까 뿌듯했다. 며칠 전에 형한테서 톡이 왔다. "브랜드, 내 친구가 카페 오픈하는데 너 소개해줬어." 좋다. 그리고 동시에. "형, 저 소개해주실 때 한 가지만 말씀해주세요." "뭔데?" "친구 가격 없습니다." 형이 ㅋㅋㅋ 보냈다. "알았어. 그래야 서로 편하지." 맞다. 친구랑 일하는 법. 명확하게 선 긋기. 프로페셔널하게 대하기. 타협은 전략적으로만. 그리고 끝나면 친구로 돌아가기. 어렵다. 여전히 어렵다. 근데 가능하다는 걸 이제 안다.친구를 클라이언트로 대하는 게 냉정한 게 아니다. 오히려 우정을 지키는 방법이다. 거리를 두는 게 아니라 존중하는 거다. 그걸 재현이 형과의 작업에서 배웠다. 다음 친구가 연락 오면? 이제 당당하게 견적서부터 보낼 수 있다.
- 09 Dec, 2025
무드보드 만들 때 가장 행복한 이유
월요일 오전 10시 출근했다. 노트북 켰다. 오늘부터 새 프로젝트다. 클라이언트는 신생 디저트 브랜드. 키워드는 '따뜻한', '수제', '정성'. 흔하다. 하지만 좋다. 시작할 수 있으니까. 메일함에 레퍼런스 20개. 훑어봤다. 다 비슷하다. 파스텔톤, 손글씨 느낌, 크래프트지. 예상했다. 팀장이 물었다. "언제까지 컨셉 나올 것 같아?" "이번 주 금요일이요." 속으로는 수요일에 끝낼 생각이다. 무드보드 만들 시간이 필요하니까.핀터레스트를 열 때 핀터레스트 켰다. 로그인했다. 비공개 보드 새로 만들었다. 이름은 'Dessert_Brand_241208'. 검색창에 'artisan dessert'를 쳤다. 이미지가 쏟아진다. 스크롤한다. 저장한다. 또 스크롤한다. 또 저장한다. 10분 지났다. 이미지 32개. 아직 멀었다. 'craft packaging', 'warm color palette', 'handmade aesthetic', 'cozy cafe interior'. 검색어를 바꿔가며 계속한다. 점심시간이 됐다. 배고프지 않다. 계속한다. 동료가 밥 먹자고 했다. "조금 있다가요." 대답하고 계속 스크롤한다. 이 시간이 좋다. 아무도 뭘 물어보지 않는다. 클라이언트 전화도 없다. 그냥 나와 이미지만 있다.이미지를 고르는 기준 저장한 이미지 78개. 많다. 줄여야 한다. 다시 본다. 하나씩 클릭한다. 이 이미지는 왜 골랐지? 색깔? 질감? 분위기? 답이 명확한 건 남긴다. 애매한 건 뺀다. 베이지 배경에 크림 얹은 타르트 사진. 좋다. 색이 따뜻하다. 질감이 살아있다. 남긴다. 미니멀한 흰색 패키징 사진. 깔끔하다. 하지만 차갑다. 우리 브랜드랑 안 맞는다. 뺀다. 손글씨 타이포그래피. 너무 흔하다. 하지만 '수제' 느낌은 확실하다. 일단 남긴다. 나중에 다시 볼 거다. 30분 지났다. 이미지 42개로 줄었다. 이 과정이 좋다. 내 취향이 아니라 브랜드 취향을 만드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블랙은 이번 프로젝트에 없다. 대신 따뜻한 오렌지와 크림색만 남았다. 피그마에 정리할 때 피그마 켰다. 새 파일. 이름은 'Moodboard_Dessert'. 프레임 만들었다. 1920x1080. 배경은 연한 아이보리. 저장한 이미지를 하나씩 드래그한다. 피그마 안으로. 배치한다. 크기 조절한다. 겹친다. 떨어뜨린다. 다시 모은다. 처음엔 질서 없다. 그냥 놓는다. 느낌대로. 10개 정도 놓으니까 보인다. 어떤 색이 많은지. 어떤 질감이 반복되는지. 크림색 많다. 베이지도. 오렌지는 포인트로. 질감은 종이 질감, 크림 질감, 나무 질감. 타이포그래피 추가한다. 세리프체 3개, 손글씨체 2개, 산세리프 1개. 폰트 이름 적어둔다. 나중에 쓸 거다. 배치 다시 한다. 색 순서대로. 왼쪽은 밝은 색, 오른쪽은 포인트 컬러. 한 시간 지났다. 보드가 모양 갖췄다.텍스처 파일을 뒤질 때 텍스처가 필요하다. 크래프트지, 린넨 천, 거친 종이. 외장하드 꺼냈다. 'Texture_Library' 폴더 열었다. 5년 치 텍스처가 있다. 스크롤한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다 좋다. 크래프트지 텍스처 12개 골랐다. 피그마에 올린다. 투명도 조절한다. 20%쯤. 배경으로 깐다. 분위기 달라진다. 따뜻해진다. 손맛 느껴진다. 동료가 지나가다 봤다. "오, 분위기 좋은데요?" 고맙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컬러칩 만든다. 이미지에서 스포이트로 색 뽑는다. 헥사코드 복사한다. 정리한다. 메인 컬러: #F4E8D8 (크림 베이지)서브 컬러: #E8B89A (따뜻한 오렌지)포인트: #D97852 (테라코타) 이 세 가지면 된다. 더 많으면 복잡하다. 처음 슬라이드 보여줄 때 금요일 됐다. 오전 11시. 팀 리뷰 시간. 피그마 화면 공유했다. 무드보드 보여줬다. 팀장이 봤다. 말없이 스크롤했다. 2분 지났다. "좋네요. 방향 맞는 것 같아요." 디자이너 두 명도 봤다. "컬러 예쁘다", "질감 살아있네". 좋다. 이렇게 시작하는 게 좋다. 무드보드 없이 로고 시안부터 보여주면 항상 싸운다. "왜 이 색이에요?", "이 폰트는 왜 선택했어요?". 설명하느라 에너지 다 쓴다. 무드보드 먼저 보여주면 다르다. 브랜드 느낌 먼저 공유된다. 로고 시안 나와도 "아, 무드보드 느낌이네요" 하고 넘어간다. 이게 중요하다. 설명 줄이는 거. 감각 공유하는 거. 클라이언트 미팅 전날 밤 화요일 저녁 9시. 내일 클라이언트 미팅이다. 무드보드 다시 본다. 뭔가 부족하다. 이미지 하나 더 추가한다. 손으로 반죽 치대는 사진. 좋다. 슬라이드 만든다. 키노트 켰다. 무드보드 이미지 복사. 붙여넣기. 첫 페이지: 무드보드 전체두 번째: 컬러칩만 크게세 번째: 텍스처 클로즈업네 번째: 타이포그래피 레퍼런스 여기에 설명 달았다. "따뜻하지만 세련된""수제이지만 촌스럽지 않은""정성스럽지만 무겁지 않은" 아내가 물었다. "또 야근?" "아니, 거의 끝났어." 사실 끝났다. 그냥 계속 보고 싶다. 내일 클라이언트가 어떤 반응 보일지 궁금하다. 미팅 당일, 오후 2시 클라이언트 오피스. 화이트보드 있는 작은 회의실. 대표님, 마케터, 외주 컨설턴트. 세 명 앉았다. 내 노트북 연결했다. 빔 프로젝터 켰다. "로고 시안 보기 전에 무드보드 먼저 보여드릴게요." 슬라이드 넘겼다. 무드보드 나왔다. 대표님 눈빛 달라졌다. "아, 이거 진짜 우리 브랜드네요." 마케터가 사진 찍었다. "이 색들 괜찮아요. 따뜻한데 고급스러워요." 컨설턴트는 말없이 끄덕였다. 15분 동안 무드보드만 얘기했다. 로고는 아직 안 봤다. "이 느낌으로 가면 될 것 같아요." 대표님 말이다. 좋다. 이게 무드보드의 힘이다. 감각을 언어로 바꾸지 않는다. 이미지로 보여준다. 색으로 보여준다. 질감으로 보여준다. 설명 필요 없다. 보면 안다. 광학 정보를 감정으로 브랜드 디자인은 번역이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건 결국 감정이다. 고객이 우리 브랜드 보고 어떻게 느꼈으면 좋겠는가. "따뜻하게", "믿음직하게", "세련되게". 이건 추상적이다. 이대로는 디자인 못 한다. 무드보드는 이걸 구체적으로 만든다. '따뜻하게' → 크림 베이지, 손글씨, 크래프트지 텍스처'믿음직하게' → 세리프체, 자연스러운 사진, 정갈한 레이아웃'세련되게' → 여백, 절제된 컬러, 밸런스 잡힌 구도 추상이 구상 된다. 감정이 이미지 된다. 이게 내가 하는 일이다. 번역자. 감정의 통역사. 클라이언트는 느낌 얘기한다. 나는 그걸 시각으로 바꾼다. 무드보드는 그 번역서다. 무드보드 만들 때만 순수하다 프로젝트 진행되면 복잡해진다. 클라이언트 의견. 팀 의견. 트렌드. 경쟁사. 예산. 일정. 다 고려해야 한다. 디자인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무드보드 만들 땐 다르다. 그냥 좋은 이미지 고른다. 어울리는 색 찾는다. 맞는 텍스처 배치한다. 정치 없다. 설득 필요 없다. 순수하게 감각만 쓴다. 이게 행복한 이유다. 디자이너로서 가장 창의적인 순간. 아무도 간섭 안 하는 순간. 내 감각 믿고 가는 순간. 무드보드 만들 때만큼은 내가 온전히 디자이너다. 저장해둔 무드보드 폴더 외장하드에 폴더 있다. 'Moodboards_Archive'. 2016년부터 쌓였다. 84개 프로젝트. 가끔 연다. 옛날 무드보드 본다. 첫 직장 때 만든 거 보면 웃긴다. 이미지 너무 많다. 정리 안 됐다. 그래도 열심히 했다. 3년 차 무드보드는 깔끔하다. 미니멀 유행이었다. 다 비슷비슷하다. 요즘 만든 건 다르다. 절제됐지만 따뜻하다. 정리됐지만 지루하지 않다. 실력 늘었다는 증거다. 무드보드는 거짓말 못 한다. 그때 내 감각이 그대로 보인다. 10년 뒤에도 이 폴더 열어볼 거다. 2024년 무드보드 보면서 뭐라 생각할까. "이때는 이런 걸 좋아했구나" 할까. "아직도 이 감각은 유효하네" 할까. 궁금하다.무드보드 만들 때가 가장 행복한 건, 디자인의 이유를 찾는 시간이니까.
- 09 Dec, 2025
폰트 이름만 보고 톤앤매너를 아는 법
폰트 이름만 보고 톤앤매너를 아는 법 어제 클라이언트한테 메일이 왔다. "폰트는 Montserrat로 가주세요." 본문 읽기도 전에 안다. 세련되고 싶은데 돈은 없는 스타트업. 글로벌 느낌 내고 싶은데 영어 잘 못하는 대표. "우리도 구글처럼 보이게 해주세요" 할 그림이 그려진다. 틀리지 않았다. 내용 확인하니 핀테크 스타트업. 시리즈 A 투자 받고 브랜딩하는 곳. 9년 하니까 이런 게 보인다.Montserrat는 가난한 디자이너의 친구 구글 폰트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무료 폰트. Helvetica 못 사는 사람들의 대안. "산세리프로 깔끔하게 가고 싶어요" 하면 등장한다. 나쁜 폰트 아니다. 오히려 잘 만들어졌다. 문제는 너무 흔하다는 것. Montserrat 쓰는 브랜드의 공통점.예산이 빡빡하다 디지털 중심이다 글로벌 진출을 꿈꾼다 실제론 한국 시장만 본다 "미니멀하게" 주문한다초반에는 나도 많이 썼다. 경력 2~3년차 때. 클라이언트한테 폰트 라이선스 설득하기 어려웠다. "폰트에 왜 돈을 내요? 그냥 쓰면 안 돼요?" 그래서 Montserrat. 무료고 괜찮으니까. 클라이언트도 만족한다. 처음엔. 6개월 지나면 연락 온다. "우리랑 비슷한 로고가 너무 많아요." 그때 설명한다. 폰트 라이선스의 의미를. 차별화의 시작이 타이포그래피라는 것을. 요즘은 Montserrat 제안 안 한다. 클라이언트가 먼저 말하면 말린다. "다른 거 보여드릴게요. 한 번만 믿어보세요." 대부분 설득된다. 프레젠테이션 잘하면. Noto Sans는 안전빵 구글이 만든 범용 폰트. 모든 언어를 지원한다는 목표. 한글도 깔끔하게 나온다. 공공기관이 좋아한다. 관공서 홈페이지 10개 중 7개. "누구나 읽을 수 있어야 해요" 하면 Noto Sans. Noto Sans 프로젝트의 특징.클라이언트가 보수적이다 의사결정권자가 여러 명이다 "무난하게" 가 핵심 키워드다 브랜딩보다 정보 전달이 우선이다 논란 만들기 싫어한다작년에 지자체 브랜딩 PT 갔었다. 담당 공무원이 첫 마디로 했다. "폰트는 Noto Sans 써주세요. 우리 기본 서체라서요." PT 준비한 게 물거품. Graphik 써서 컨셉 잡았는데. 그날 배웠다. 공공기관은 클라이언트 이해가 먼저라는 것. 그들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것. 결국 Noto Sans로 갔다. 대신 웨이트 믹스로 변화를 줬다. Light와 Bold 조합. 행간 넓게 잡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제약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도 디자인이다.Didot은 럭셔리의 상징 세리프의 끝판왕. 가늘고 날카로운 선. 클래식하면서 모던하다. 패션 브랜드가 사랑한다. Vogue 로고가 Didot 베이스. 명품 브랜드 절반이 Didot 계열. Didot 쓰는 클라이언트의 공통점.예산이 넉넉하다 타겟이 명확하다 프리미엄 포지셔닝한다 디테일에 집착한다 "고급스럽게" 주문한다3년 전 화장품 브랜드 작업. 대표가 Didot 지정했다. "샤넬 같은 느낌으로요." 첫 PT에서 말했다. "Didot은 영문에선 좋은데 한글 조합이 어렵습니다." 대표가 단호했다. "그럼 영문 로고만 가죠. 한글은 서브로." 그게 답이었다. 영문 Didot, 한글 명조 커스텀. 조합의 밸런스가 관건. 6개월 작업했다. 한글 명조 커스텀에만 2개월. Didot 느낌 살리면서 한글 가독성 확보.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론칭 후 매출 30% 상승. 리브랜딩 성공 사례로 업계에 회자됐다. Didot은 까다롭다. 잘못 쓰면 촌스럽다. 너무 많이 쓰면 과하다. 적재적소가 중요하다. 폰트로 보는 클라이언트 심리 9년 하면서 발견한 패턴. 폰트 선택엔 심리가 담긴다. "Helvetica 써주세요" - 애플 따라하고 싶다 "Gothic 계열로요" - 한국적이면서 모던하게 "손글씨 느낌으로" - 친근하게 보이고 싶다 "두껍게 써주세요" - 강하게 어필하고 싶다 폰트는 브랜드의 목소리다. 말투가 곧 성격인 것처럼. 작년에 재밌는 케이스. 카페 브랜딩 의뢰. 대표가 "Futura 써주세요" 했다. 궁금했다. "왜 Futura세요?"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들이 다 Futura더라고요." 솔직해서 좋았다. 그 솔직함이 브랜드 컨셉이 됐다. '정직한 커피' Futura로 로고 작업. 기하학적 형태가 정직함과 맞아떨어졌다. 대표도 만족했다. 클라이언트의 폰트 선호도. 그게 곧 브랜드 방향성이다. 타이포 감각은 시간의 축적 처음엔 몰랐다. Helvetica와 Arial의 차이. 다 비슷해 보였다. 3년차쯤 보이기 시작했다. 'e'의 각도 차이. 'a'의 꼬리 모양. 미세한 디테일.5년차엔 이름만 봐도 알았다. Gotham - 오바마 캠페인 느낌 Proxima Nova - 스타트업 감성 Avenir - 깔끔한데 따뜻함 Brandon Grotesque - 힙한 브랜드 지금은 자동이다. 클라이언트 첫 미팅. 업종, 타겟, 예산 들으면. 머릿속에 폰트 3개가 떠오른다. 이게 9년의 축적이다. 작년에 신입 디자이너가 물었다. "선배님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폰트 고르세요?"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냥 안다. 경험이 쌓이면. 대신 이렇게 말했다. "일주일에 폰트 10개씩 공부해봐. 히스토리랑 쓰임새. 1년만 해도 달라져." 그 친구 진짜 했다. 노션에 폰트 데이터베이스 만들고. 브랜드별로 정리하고. 6개월 지나니 눈에 띄게 성장했다. 폰트 제안이 정확해졌다. 클라이언트 설득력도 올라갔다. 타이포그래피는 언어다. 많이 읽고 많이 써야 는다. 폰트 라이선스, 이제는 설득 가능 초반엔 어려웠다. "폰트에 200만원요?" 클라이언트가 이해 못 했다. 지금은 달라졌다. 시장이 성숙했다. 클라이언트도 안다. 무료 폰트의 한계를. 요즘 프레젠테이션 방식.무료 폰트안 1개 유료 폰트안 2개 커스텀 폰트안 1개선택지를 주면 설득이 쉽다. 비교하면서 차이가 보인다. 작년 화장품 브랜드. 초반엔 무료 고집했다. 세 가지 안 보여주니까 바뀌었다. "이게 우리 브랜드 같아요." 유료 폰트안 선택. 라이선스 200만원 결제. 론칭 후 만족도 높았다. "확실히 차별화되네요." 폰트 라이선스는 투자다. 브랜드 정체성에 대한. 그걸 이해시키는 게 디자이너 역할. 한글 폰트의 어려움 영문은 쉽다. 26자 디자인하면 끝. 한글은 11,172자. 그래서 한글 폰트가 비싸다. 작업량이 다르다. 한글 폰트 선택의 기준.완성도 - 받침 조합 자연스러운가 웨이트 - 굵기 선택지 충분한가 확장성 - 영문 조합 매끄러운가국산 폰트 회사들 많이 좋아졌다. 산돌, 윤디자인, 어도비. 퀄리티 높다. 작년에 식품 브랜드 작업. 한글 중심 네이밍. '정성가득' 영문 폰트론 느낌 안 났다. 한글 서예 베이스 폰트 찾았다. 산돌 격동고딕. 대표가 첫 반응. "이거다!" 한글의 맛이 살아났다. 브랜드 정체성도 명확해졌다. 한글 타이포그래피. 아직 갈 길 멀다. 하지만 가능성은 크다. 트렌드와 본질 사이 요즘 트렌드. 베리어블 폰트. 두께 자유자유 조절. 재밌다. 기술적으로 진보했다. 하지만 본질은 같다. 폰트는 읽히기 위한 것. 브랜드를 전달하기 위한 것. 기술은 도구일 뿐. 작년 PT에서 베리어블 폰트 제안했다. 클라이언트가 물었다. "그래서 우리한테 뭐가 좋은데요?" 답 못 했다. 멋있어 보여서 제안한 것. 브랜드 본질과 무관했다. 떨어졌다. 당연하다. 그 후로 배웠다. 트렌드는 수단이라는 것. 목적이 아니라는 것. 지금은 트렌드 따라가지 않는다. 클라이언트에게 맞는 걸 찾는다. 그게 10년 전 폰트여도 상관없다. Garamond 500년 됐다. 여전히 아름답다. 여전히 쓰인다. 좋은 타이포그래피는 시대를 넘는다. 폰트 하나로 브랜드가 바뀐다 3년 전 리브랜딩 프로젝트. 로컬 베이커리. 15년 된 곳. 기존 로고는 Comic Sans 비슷한 거. 친근한데 촌스러웠다. 대표가 고민했다. "단골들이 익숙해하는데 바꿔도 될까요?" 제안했다. "폰트만 바꿔보시죠. 로고 형태는 유지하고." 기존 손글씨 느낌 살리면서. 세련된 스크립트 폰트로. Playlist Script. 론칭 후 반응이 갈렸다. 단골: "뭔가 달라졌는데 여전히 우리 가게네요" 신규: "여기 새로 생긴 데예요?" 둘 다 잡았다. 정체성 유지와 쇄신. 폰트 하나의 힘. 브랜드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9년차의 폰트 선택 기준 지금 내 기준.클라이언트 이해도 70% 타겟 분석 20% 개인 취향 10%초반엔 반대였다. 개인 취향 70% 클라이언트 이해 30% 당연히 안 맞았다. 프로젝트마다 갈등. "이게 더 예쁜데 왜 안 돼요?" 경력 쌓이면서 바뀌었다. 클라이언트가 먼저. 그들의 브랜드니까. 하지만 10%는 남겨둔다. 내 철학을. 그게 없으면 기계다. 작년 한 프로젝트. 클라이언트 요구사항 다 맞췄다. 근데 10%를 못 넣었다. 결과물이 밋밋했다. 클라이언트도 느꼈다. "뭔가... 2% 부족한데요?" 그 2%가 디자이너의 10%다. 클라이언트는 모른다. 우리가 넣어줘야 한다. 폰트는 브랜드의 목소리 결국 타이포그래피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브랜드가 세상에 말 거는 방식. Didot으로 말하는 브랜드. "우리는 클래식합니다. 하지만 모던합니다." Futura로 말하는 브랜드. "우리는 기하학적입니다. 합리적입니다." Montserrat로 말하는 브랜드. "우리는 세련됩니다. 접근 가능합니다." 폰트 이름만 들어도 톤앤매너가 보이는 이유. 그 폰트를 선택한 수많은 브랜드들의 목소리가 쌓여서. 9년간 수백 개 프로젝트. 폰트 고르는 시간이 제일 오래 걸린다. 컨셉의 시작이니까. 폰트가 정해지면 모든 게 따라온다. 컬러, 레이아웃, 톤앤매너. 거꾸로 안 된다. 디자인 다 하고 폰트 바꾸면. 전부 다시 해야 한다. 그래서 폰트가 먼저다. 항상.내일 클라이언트 미팅. Garamond 제안할 생각이다. 500년 된 폰트가 그들의 브랜드 스토리와 맞아떨어진다. 클래식이 때론 가장 모던한 법이다.
- 08 Dec, 2025
포트폴리오 사이트 리뉴얼 - 1년마다 나를 갈아내기
또 시작이다 포트폴리오 사이트 리뉴얼. 올해로 9년차니까 아홉 번째다. 매년 이맘때쯤 되면 내 사이트가 눈에 안 들어온다. 작년에 만든 건데 이미 낡아 보인다. 폰트도, 레이아웃도, 심지어 올린 작업들도. 아내가 물었다. "또 만들어? 작년 거 괜찮았는데." 괜찮았다. 그때는. 지금은 아니다. 금요일 밤 11시. 커피 내리고 맥북 켰다. Figma 새 파일. 이름은 'Portfolio_2024_v1'. 내년에는 'Portfolio_2025_v1'을 만들겠지. 그렇게 계속.작년의 나는 틀렸다 2023년 사이트를 연다. 메인 화면에 굵은 고딕체로 "BRAND IDENTITY DESIGNER". 크게 박아놨다. 지금 보니까 너무 직설적이다. 왜 이렇게 증명하려고 했을까. 스크롤 내린다. 케이스 스터디 5개. 설명이 길다. 컨셉 과정을 3단계로 나눠서 보여주고, 무드보드 이미지가 8장씩 들어가 있다. 클라이언트한테 설명하듯 써놨다. 문제는 이거다. 누가 다 읽어? 나도 안 읽는다. 작년의 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전문성이라고 믿었다. 틀렸다. 지금 생각은 다르다. 결과물 하나가 열 장의 과정 설명보다 강하다. About 페이지를 본다. "브랜드의 본질을 찾아 시각화하는 디자이너입니다." 이런 말 쓰는 디자이너 천 명은 된다. 나만의 말이 아니다. 복사 붙여넣기다. 사이트를 끈다. 부끄럽다. 동시에 다행이다. 부끄러워할 수 있다는 건 성장했다는 뜻이니까.매년 버리는 것들 2020년 사이트. 검은 배경에 흰 글씨. 너무 힙하고 싶었다. 지금 보면 가독성이 바닥이다. 2021년 사이트. 반응형 안 만들었다. 모바일에서 깨진다. 그해에는 데스크톱만 생각했다. 2022년 사이트. 애니메이션을 20개 넣었다. 로딩이 느리다. 인터랙션에 취해 있었다. 매년 버린다. 작년에 집착했던 것들을. 폰트, 컬러, 구조, 말투. 전부 다시 쓴다. 이게 낭비냐고? 아니다. 이게 기록이다. 포트폴리오는 나의 현재를 보여주는 도구다. 과거가 아니라. 작년의 나는 작년 사이트에 담겨 있다. 올해의 나는 다르다. 다른 사람한테 다른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클라이언트는 과거의 나를 고용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를 본다. 그러니까 사이트도 지금이어야 한다.올해는 덜어낸다 새 사이트 컨셉. 한 줄로 정했다. "작업만 보여준다." 메인 화면에 프로젝트 썸네일 9개. 그리드로. 텍스트는 프로젝트 이름 하나. 그게 끝이다. 클릭하면 결과물만. 로고, 패키지, 어플리케이션. 큰 이미지로. 설명은 세 줄. 클라이언트, 연도, 한 줄 컨셉. 과정은 뺀다. 무드보드도 뺀다. 나는 나한테만 의미 있다. 보는 사람한테는 결과가 전부다. About 페이지도 바꾼다. "9년차 브랜드 디자이너. 서울에서 일한다. 이메일 주세요." 끝. 간단하다. 간단한 게 어렵다. 덜어내는 게 더하는 것보다 힘들다. 폰트는 산세리프 하나. 컬러는 검정, 흰색, 회색. 그게 다다. 작업이 색이다. 사이트는 배경이다. Figma에서 목업을 본다. 깔끔하다. 작년보다 훨씬. 5년 전보다는 비교도 안 된다.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는 작업이 아니다 여기서 착각하면 안 된다. 포트폴리오 사이트는 작업 모음집이 아니다. 나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어떤 프로젝트를 선택하는가. 어떤 순서로 보여주는가. 어떤 말로 설명하는가. 그게 나다. 올해는 9개를 선택했다. 작년에는 12개였다. 줄였다. 평범한 건 뺐다. 클라이언트가 유명해서 넣었던 것도 뺐다. 내가 자랑스러운 것만 남겼다. 순서도 바꿨다. 예전에는 최신 순이었다. 이제는 임팩트 순이다. 첫 번째에 가장 강한 걸 놓는다. 마지막에 두 번째로 강한 걸 놓는다. 시작과 끝이 기억에 남으니까. 설명도 줄였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같은 말 안 쓴다. 대신 "100년 된 한복 브랜드, 20대가 입게 만들기"라고 쓴다.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포트폴리오는 디자인 결과물의 모음이 아니다. 나라는 디자이너를 디자인하는 작업이다. 메타 디자인이다. 1년의 거리 작년 사이트와 올해 사이트를 나란히 놓는다. 달라 보인다. 많이. 작년 나는 증명하려고 했다. "나 잘해요, 과정도 체계적이에요, 전문가예요." 그래서 많이 보여줬다. 올해 나는 확신한다. "내 작업을 보세요." 그래서 적게 보여준다. 1년이 만든 거리다. 디자이너로 9년을 하면서 배운 게 있다. 성장은 누적이 아니다. 갱신이다. 작년의 나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넘어서는 거다. 포트폴리오 리뉴얼이 바로 그거다. 물리적으로 과거를 버리는 의식. 새 파일을 열고, 새 레이아웃을 잡고, 새 말을 쓴다. "나는 이제 이런 사람입니다." 클라이언트한테 하는 말이기도 하고, 나한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코드를 친다 Figma 디자인 끝났다. 이제 코딩이다. HTML, CSS, 약간의 JavaScript. 에이전시 다니지만 내 사이트는 내가 만든다. CMS 안 쓴다. WordPress 안 쓴다. Wix는 더더욱. 손으로 짠다. 한 줄 한 줄. 비효율적이다. 시간 오래 걸린다. 그래도 이게 맞다. 내 포트폴리오에 남의 템플릿 쓰면 이상하지 않나. 디자이너인데. 브랜드 만드는 사람인데. 코드 치는 건 명상이다. 논리적이고 명확하다. 디자인은 모호할 때가 많다. "이게 맞나?" 계속 고민한다. 코드는 작동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 하나다. 오전 2시. 반응형 작업 중이다. 모바일 버전. 태블릿 버전. 데스크톱 버전. 브레이크포인트 세 개. 아내가 먼저 잤다. 거실 불만 켜져 있다. 키보드 소리만 들린다. 과거를 아카이빙한다 새 사이트 올리기 전에 하는 일이 있다. 작년 사이트를 저장한다. Portfolio_Archive 폴더에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다. 2016년부터 2023년까지. 8개의 사이트. 가끔 연다. 옛날 거. 부끄러운데 재밌다. 2016년 사이트. 신입 때다. 프로젝트 3개밖에 없다. 개인 작업으로 채웠다. 가상 브랜딩, 포스터 시리즈. 지금 보면 학생 포트폴리오다. 2018년 사이트. 첫 대형 프로젝트 들어갔다. 그것만 메인에 크게 박아놨다. 나머지는 작아 보이게. 균형이 없다. 2020년 사이트. 코로나 때다. 집에서 사이트만 5번 갈아엎었다. 할 게 없었다. 과한 디테일이 보인다. 각 사이트마다 그해의 내가 담겨 있다. 걱정, 자신감, 불안, 성장. 전부. 지우지 않는다. 이게 내 히스토리니까. 디자이너로서의. 그래서 또 만든다 새 사이트 올렸다. 도메인은 그대로. 내용만 바뀌었다. 브라우저 캐시 삭제하고 접속한다. 로딩 빠르다. 이미지 최적화 잘했다. 스크롤 내린다. 깔끔하다. 작업이 잘 보인다. 나는 잘 안 보인다. 그게 의도다. 모바일로 확인한다. 문제없다. 태블릿도. 데스크톱도. Contact 페이지 메일 폼 테스트. 내 메일로 테스트 발송. 1초 만에 도착. 완료. 만족스럽다. 지금은. 1년 뒤에는 또 불만족스러울 거다. 당연하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를 테니까. 그럼 또 만든다. 열 번째 사이트를. 새 Figma 파일 열고, 새 컨셉 잡고, 새 코드 치고. 성장의 증거 포트폴리오 리뉴얼이 귀찮냐고? 솔직히 귀찮다. 시간 많이 든다. 주말 이틀은 날린다. 디자인 하루, 코딩 하루. 테스트 반나절. 돈도 안 된다. 클라이언트 프로젝트 하나 더 받으면 300만원이다. 그 시간에 내 사이트 만든다. 그래도 한다. 매년.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성장하고 있고, 그걸 확인하고 싶으니까. 작년 사이트를 볼 때 부끄럽다는 건, 내가 달라졌다는 뜻이다. 시각이 변했다. 기준이 높아졌다. 더 잘하게 됐다. 그게 증거다. 물리적인. 디자이너는 성장을 측정하기 어렵다. 매출도 아니고, 직급도 애매하고. 뭘 기준으로 봐야 하나. 나는 포트폴리오로 본다. 1년 전 내가 만든 것을 지금 내가 보고 "이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성장한 거다. 클라이언트는 모른다 재밌는 건 클라이언트는 이거 모른다는 거다. 미팅 때 포트폴리오 보여주면, "사이트 깔끔하네요" 한마디 하고 넘어간다. 작년 사이트든 올해 사이트든 똑같이. 그들한테는 차이가 안 보인다. 당연하다. 그들은 내 과거를 모르니까. 차이를 아는 건 나다. 나만. 그리고 그거면 된다. 내가 나를 갱신하는 거니까. 남을 위한 게 아니라. 클라이언트는 결과만 본다. 이 사람이 우리 프로젝트 잘할까. 그것만 판단한다. 하지만 그 "잘함"은 어디서 오는가. 끊임없이 나를 업데이트하는 태도에서 온다. 포트폴리오 리뉴얼은 그 태도의 표현이다. 내년의 나에게 2024년 사이트 완성. Portfolio_Archive 폴더에 2023년 사이트 저장. 파일명은 'Portfolio_2023_final'. 내년 이맘때쯤, 2024년 사이트를 열 거다. 그리고 생각하겠지. "이건 아닌데." 그럼 또 만들 거다. 열한 번째를.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을 거다. 새로운 작업을 했을 거고, 새로운 고민을 했을 거고, 새로운 답을 찾았을 거다. 그 답을 열한 번째 사이트에 담겠지. 지금의 나는 그걸 기대한다. 미래의 나를. 더 나은. 포트폴리오 리뉴얼은 미래의 나한테 보내는 신호다. "계속 성장해. 멈추지 마." 디자이너의 순환 다른 직업은 어떨까. 1년마다 자기를 갈아엎나. 의사는 병원 홈페이지를 매년 리뉴얼하지 않는다. 변호사는 명함을 해마다 바꾸지 않는다. 디자이너는 다르다. 우리는 변화를 다루는 사람들이니까. 트렌드를 읽고, 새로운 걸 시도하고, 본질은 유지하면서 형식은 바꾼다. 그게 우리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도 그래야 한다. 매년 리프레시. 매년 리빌드. 순환이다. 계절처럼. 봄에 기획하고, 여름에 디자인하고, 가을에 개발하고, 겨울에 론칭한다. 그리고 다시 봄. 포트폴리오는 그 순환의 결과물이자 시작점이다. 오전 3시 사이트 최종 확인 끝났다. 문제없다. 도메인 접속해서 캡처했다. 스크린샷 10장. 섹션별로. Portfolio_2024 폴더에 저장. 내년에 볼 거다. 그리고 쓴웃음 짓겠지. 맥북 덮는다. 불 끈다. 침대로 간다. 아내가 뒤척인다. "끝났어?" "응. 끝났어." 끝났다. 올해 리뉴얼은. 내년 리뉴얼까지 365일 남았다.매년 부정하고, 매년 다시 쓴다. 그게 성장이다.
- 07 Dec, 2025
아내도 야근, 나도 야근 - 업계 부부의 저녁 식탁
아내도 야근, 나도 야근 - 업계 부부의 저녁 식탁 오늘도 각자 먹는다 저녁 7시 42분. 아내한테 카톡 왔다. "오빠 저녁 뭐 먹어?" "아직. 미팅 끝나고." "나도 수정 들어와서 못 먹을듯" "ㅇㅋ 각자" 이게 우리 부부의 일상이다. 결혼 2년차. 같은 업계 부부. 나는 브랜드 디자이너, 아내는 카피라이터. 둘 다 에이전시에서 일한다. 저녁을 함께 먹는 날이 일주일에 두세 번이면 많은 편이다. 나머지는 각자 편의점, 배달, 아니면 굶는다. 클라이언트 피드백은 오후 5시쯤 오고, 수정 요청은 칼퇴 10분 전에 온다. 그게 이 업계다. 오늘은 나도 미팅이 길어졌다. 클라이언트가 로고 시안 15개 중에 고민한다며 커피를 세 잔 더 시켰다. 결국 2시간 반. 결론은 "일단 내부 검토 후 연락드릴게요"였다.냉장고에 남은 반찬 집에 도착한 건 9시 20분. 아내는 아직 회사다. 현관 불 꺼져 있다. 혼자다. 냉장고 연다. 김치, 계란, 햄, 우유. 어제 아내가 싸온 도시락 반찬 조금. 밥은 있다. 아내가 아침에 해놓고 간 거다. 전자레인지 돌린다. 2분 30초. 돌아가는 소리 듣고 있으면 왠지 쓸쓸하다. 결혼하면 따뜻한 밥상 차려주는 사람 있을 줄 알았는데, 우리 둘 다 차려줄 시간이 없다. 밥 먹으면서 폰 본다. 인스타그램에 친구들이 저녁 사진 올렸다. 예쁜 파스타, 와인, 분위기 있는 식당. 좋아요 누른다. 부럽진 않다. 그냥 다른 삶이다. 아내한테 메시지 보낸다. "밥 먹었어. 맛있었어. 고마워." 읽씹이다. 바쁜가보다. 나도 미팅 중엔 못 봤으니까. 이해한다.같은 언어로 싸운다 10시 반쯤 아내 들어왔다. 문 여는 소리, 한숨 소리. "진짜 미치겠다." 신발 벗으면서 하는 말이다. 나도 안다. 뭔지. "수정?" "응. 5차." "컨셉 바뀐 거야?" "아니, 톤앤매너 바뀜. 갑자기 MZ 타겟 아니래." "미친." 우리 대화는 이렇다. 설명 필요 없다. 업계 용어로 다 통한다. 컨셉, 톤앤매너, 타겟, 레퍼런스, 무드보드. 이 단어들이면 충분하다. 아내가 냉장고 열었다. 똑같은 반찬 본다. 밥 덥힌다. 나랑 똑같이. "오빠도 야근?" "미팅 길었어. 로고 15개 보여줬는데 다 애매하대." "ㅋㅋㅋ 그럼 20개 만들래?" "진짜 그러라 할 것 같아." 아내 웃는다. 나도 웃는다. 이게 우리 위로다. 서로의 빡침을 이해한다. 다른 사람한테 설명하면 "그래도 돈 받잖아" 이런 말 듣는다. 하지만 우리끼린 안 그런다. 같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동료 같은 느낌이다. 부부이기도 하지만.주말에도 각자 일한다 주말이다. 토요일 오전 11시. 아내는 노트북 켰다. 나도 태블릿 켰다. "오빠, 나 일 좀 해야 돼." "나도." "미안." "괜찮아. 나도 미안." 우리 주말은 이렇다. 침대에 누워서 각자 일한다. 아내는 카피 수정하고, 나는 로고 작업한다. 옆에 있지만 각자 집중한다. 가끔 아내가 묻는다. "오빠, 이거 어때? '새로운 일상을 브랜딩하다'랑 '일상을 새롭게 브랜딩하다' 중에 뭐가 나아?" "후자. 더 액티브해."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나도 묻는다. "이 컬러 톤, 너무 무겁나? 좀 더 밝게 가야 하나?" "타겟이 누군데?" "30대 초반, 여성." "그럼 한 톤 올려." 서로 피드백 준다. 정확하다. 군더더기 없다. 이게 업계 부부의 장점이다. 설명 안 해도 안다. 타겟, 컨셉, 브랜드 톤 이런 거 설명 안 해도 바로 이해한다. 오후 3시쯤 아내가 노트북 덮는다. "배고파. 나가 먹을까?" "응." 근처 국밥집 간다. 줄 서 있는 동안 아내 손 잡는다. 아내가 웃는다. "오빠, 우리 이상한 부부지?" "왜?" "주말에 일하고, 저녁도 각자 먹고." "그래도 괜찮은데." "응. 나도." 국밥 먹으면서 각자 폰 본다. 레퍼런스 찾는다. 아내는 카피 레퍼런스, 나는 디자인 레퍼런스. 식사 중에도 일 얘기한다. 하지만 불편하지 않다. 다른 부부들은 데이트 코스 짜고, 여행 계획 세우고 그러는데, 우리는 프로젝트 일정 맞춘다. 이상하긴 하다. 근데 우리한텐 맞다. 새벽 2시의 공감 어제 새벽 2시. 아내가 안 잔다. 노트북 불빛이 침실까지 샌다. 일어나서 나간다. 거실에 아내가 앉아 있다. 화면 보고 있다. 표정이 안 좋다. "왜 안 자?" "내일 PT인데 카피가 맘에 안 들어." "다 만들었잖아." "근데 뭔가... 임팩트가 약한 것 같아." 안다. 그 느낌. 나도 맨날 그렇다. 로고 다 만들어놓고 새벽에 다시 본다. 뭔가 2%가 부족한 느낌. 설명 못 하는 그 느낌. "어디 보자." 옆에 앉는다. 화면 본다. 카피 10개 있다. 다 괜찮다. 근데 아내는 만족 못 한다. "이거, 톤이 너무 딱딱하지 않아?" "타겟이 기업이잖아." "그래도 요즘은 조금 더 친근하게 가는 추세잖아." "그럼 이거. '함께 만드는' 대신 '우리가 만드는'으로 바꿔봐." 아내가 쳐본다. 읽는다. 고민한다. "좀 나은 것 같은데?" "응. 주어가 명확해져." "고마워." 다시 작업한다. 나도 옆에서 본다. 30분쯤 지나니까 아내가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이제 됐다." "잘했어." "오빠도 새벽에 이러지?" "맨날." 둘이 웃는다. 새벽 2시에 일 얘기하면서 웃고 있다. 이상한 부부 맞다. 침대 돌아온다. 누운다. 아내가 내 손 잡는다. "오빠." "응." "우리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뭐가?" "이렇게 일만 하고, 저녁도 못 먹고, 주말에도 일하고." "음..." 생각해본다. 솔직히 답 없다. 이게 맞는 삶인지 모르겠다. 주변에선 일과 삶의 균형 얘기한다. 워라밸. 우리한텐 없다. 근데 후회는 안 한다. 우리 둘 다 이 일 좋아한다. 클라이언트한테 빡칠 때도 많지만, 좋은 결과물 나올 때 희열 있다. 그걸 서로 이해한다. "괜찮아. 우리한텐 이게 맞는 거 같아." "그치?" "응. 다른 사람들이 이해 못 해도, 우린 서로 이해하잖아." 아내가 고개 끄덕인다. 잠든다. 비어 있는 식탁의 의미 어제 퇴근하고 마트 갔다. 장 봤다. 고기, 야채, 과일. 장바구니 가득 담았다. 집 와서 아내한테 사진 보냈다. "오늘 내가 저녁 만들게." "진짜? 무슨 일이야ㅋㅋㅋ" "그냥. 오늘은 일찍 끝나서." 6시쯤 퇴근했다. 드문 일이다. 프로젝트 없는 주간이라 가능했다. 요리 시작한다. 삼겹살 굽고, 야채 썰고, 된장찌개 끓인다. 요리 못 하지만 할 수는 있다. 유튜브 보면서 한다. 7시 반. 상 차렸다. 그럴듯하다. 아내한테 메시지 보낸다. "다 됐어. 언제 와?" "30분 후. 금방 가." 기다린다. TV 켠다. 뉴스 본다. 식탁 본다. 두 사람 자리. 오랜만이다. 8시. 문 열린다. 아내 들어온다. 식탁 본다. 놀란다. "헐, 대박." "앉아." "오빠가 이걸 다?" "응. 맛있을지 모르겠다." 같이 먹는다. 맛은 그냥 그렇다. 근데 아내가 계속 맛있다고 한다. 거짓말인 거 안다. 근데 기분 좋다. "오빠, 고마워." "별거 아니야." "아니야. 이게 되게 큰 거야." 맞다. 큰 거다. 우리한텐. 함께 먹는 저녁. 일주일에 두세 번밖에 안 되는 이 시간이 우리한테는 특별하다. 밥 먹으면서 일 얘기 안 한다. 오늘은 다른 얘기한다. 주말에 뭐 할지, 다음 달 여행 갈지, 친구들 만날지. 평범한 대화. 설거지도 같이 한다. 아내가 설거지하고, 나는 닦는다. 싱크대 앞에서 나란히 선다. 아내가 갑자기 웃는다. "뭐?" "신기해서. 우리 이렇게 같이 설거지하는 거." "자주 못 하지." "응. 그래서 더 좋은 거 같아." 맞다. 자주 못 해서 더 좋다. 비어 있는 식탁이 일상이라서, 함께하는 식탁이 더 소중하다. 결국 우리는 오늘 아침. 출근 준비하는데 아내가 도시락 쌌다. 두 개. "오빠 거." "어? 나 점심 약속 있는데." "그럼 저녁에 먹어. 야근할 거잖아." "음... 맞네." 아내도 야근할 거다. 나도 안다. 내일 PT 있다고 어제 말했다. "오빠도 오늘 늦지?" "응. 미팅 있어." "그럼 저녁 각자?" "응. 미안." "괜찮아. 나도 어차피 야근." 현관에서 신발 신는다. 아내도 준비한다. 같이 나간다. 엘리베이터 탄다. 1층 내린다. 밖으로 나간다. 지하철역까지 같이 걷는다. 손 잡는다. "오빠." "응." "오늘 힘내." "너도." 역 앞에서 헤어진다. 아내는 2호선, 나는 6호선. 반대 방향이다. 돌아선다. 계단 내려간다. 출근길 사람들 사이에서 걷는다. 생각한다. 우리 부부 이상한가. 저녁도 각자 먹고, 주말에도 일하고, 함께 있어도 각자 노트북 보고. 근데 괜찮다. 우리한텐 맞다. 같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동료. 서로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 그게 우리다. 비어 있는 식탁이 외롭지 않은 이유.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을 알고 있어서다. 언젠가 함께 앉을 거라는 걸 알아서다. 그리고 그 사람도 똑같은 마음이라는 걸 아니까. 그걸로 충분하다. 오늘도 야근이다. 아내도 야근이다. 내일도 그럴 거다. 근데 주말엔 함께 국밥 먹을 거다. 그 정도면 됐다. 지하철 탄다. 앉는다. 아내한테 메시지 보낸다. "사랑해." 읽씹이다. 바쁜가보다. 괜찮다. 나중에 답 올 거다. "나도"라고. 그거면 된다.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매일의 저녁이 아니라, 이해하는 한 사람이었다.